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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이킴 Jan 31. 2020

직장 선택하기

정답이 없을 테니 여전히 고민 중...

제 첫 직장은 수원에 사무실이 있던 외국계 반도체 장비 업체였습니다. 학교 선배님이 그 회사에 다니고 있어서 연봉을 많이 준다는 정보를 듣고 지원했습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그때 삼성이나 LG, 대우 같은 대기업에서 대졸 신입사원 연봉이 1,300만 원 정도일 때, 이 회사는 2,000만 원을 주었습니다.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데 꼴에 유학을 생각하고 있던 당시의 저에게는 뭐 두 번 생각할 이유가 없을 정도로 분명한 선택이었습니다.


다행히 학교 다니면서 본 수백 편의 할리우드 영화 덕분에 (https://brunch.co.kr/@tystory/5) 영어를 곧잘 했던 저는 면접을 잘 통과하고, 그렇게 가 보고 싶던 미국에 가서 신입사원 연수도 받고, 빵빵한 월급 받아서 자가용도 사고, 주변의 동기 및 선배님들과 즐거운 회사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신나고 설레는 기분이 처음의 몇 달 뿐이었습니다.


반도체 장비회사였으니 당연히 한국의 반도체 회사에 반도체 공정용 장비를 납품하고, 설치하고, 운용 중에 문제가 생기면 해결을 해 주는 업무였습니다. 신규로 라인이 증설되면, 방진복을 입고 반도체 공정을 처리하는 펩에 들어가서 장비를 설치하고 테스트하는 일은, 우선 방진복을 입고 마스크를 쓰고 몇 시간씩 일을 해야 하니 그 답답함도 답답함이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일이 재미가 없었습니다. 


저를 데리고 다니시며 가르쳐주시던 제 사수나 다른 선배님들은, 장비가 잘 설치가 되고 처음부터 씽씽 돌아가거나, 혹은 문제가 있어서 공정이 원하는 대로 나오지 않을 때 며칠씩 밤을 새워가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재미있다고 하시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반도체 업계의 특성상, 장비가 다운이 되면 매시간 손실이 어마어마하기에, 새벽에 급한 전화를 받고 공장으로 불려 들어가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스트레스마저도 업무의 일부분이고 도전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더군요.


그런데 제가 그 일을 하면서 유일하게 재미를 느꼈던 부분은, 그때 장비의 주 컨트롤러로 썬의 워크스테이션을 썼었는데, 거기서 운영되는 솔라리스라는 소프트웨어를 만지거나, 혹은 VME 컨트롤러에 쓰는 실시간 운영체제 (RTOS: Real Time Operating System)을 만질 때뿐이었습니다. 그런 재능을 인정받아서, 훨씬 복잡한 소프트웨어에 의해서 운영되는 최신 장비를 지원하는 팀에 뽑히기도 했고요. 하지만 그건 전체 업무의 작은 부분일 뿐이었고, 다른 대부분의 업무에서 재미를 찾을 수 없어서 결국 2년 만에 사표를 내고 나오게 되었습니다.


아무 대책 없이, 그냥 일이 재미없다는 이유로 사표를 던졌기에 거의 9개월 정도를 놀다가, 첫회사에서 장비 제어용 소프트웨어로 사용하던 실시간 운영체제를 만드는 외국인 회사의 한국 지사에 필드 애플리케이션 엔지니어로 입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나스닥에 상장되어있는 나름 규모가 있는 회사였지만, 전체 직원이 400명도 되지 않았고, 실리콘 밸리 소프트웨어 스타트업의 문화가 생생하게 살아있는 조직이라서, 처음 일을 배우고 입사하는 순간부터 딱 제가 기대했던 그런 업무였습니다. 


소프트웨어를 만들고, 그 결과물이 하드웨어를 통해서 구현되고 제가 의도한 대로 잘 동작하는 것을 보는 것도 물론 큰 기쁨이지만, 아무래도 제 적성에는, 그런 소프트웨어가 어떤 용도로 사용이 되고 왜 다른 제품에 비해서 더 뛰어난지를 설명하고 시연하고, 그런 비즈니스적인 측면과 기술적인 측면을 둘 다 보는 일이 너무나 재미있었습니다. 그래서였는지, 결국은 이 회사에서 7년 정도 필드 엔지니어로 일하다가 영업직으로 전환을 하게 되었습니다. 영업일이 딱 제 적성에 맞았다고 보기는 힘들겠지만, 어느 정도 감수를 하더라도 해볼 만한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몇 년 동안 열심히 재미를 찾아가며 일을 했었죠.


그러는 와중에 한국에 신규로 지사를 설립하고자 하는 외국계 스타트업의 제안을 받게 되었습니다. 50명짜리 비 상장회사였으니, 여기는 정말로 내일모레 어떻게 될지 모르는 소프트웨어 벤처기업이었던 셈입니다. 이 회사의 제안을 수락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인데, 첫째는 지사장이라는 지위였습니다. 필드 엔지니어도 했고 영업도 했으니 당연히 다음 목표는 한국 지사를 책임지고 운영을 하는 자리였죠. 두 번째는 스톡 옵션이었습니다. 꽤 많은 주식을 받았고, 그때 이 회사가 다른 회사에 인수/합병이 되었더라면 평생 먹고살 수 있을만한 돈을 벌 수 있는 아주 매력적인 제안이었죠. 물론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한국 지사는 일 년도 버티지 못하고 철수를 하게 되고, 그 후에 회사도 흐지부지 다른 조그만 회사에 합병이 되면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다시 원래 회사로 돌아와서 13년을 잘 다니다가 이제 새로운 선택의 기회를 얻게 되었네요. 이런 경험들을 보면, 우선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돈을 보고 직장을 선택하는 것은 잘 되지 않을 확률이 높다는 것이죠. 일이 얼마나 적성에 맞고 재미를 찾을 수 있느냐가, 제 입장에서는 한 직장을 즐겁게 오래 다니는 거의 유일한 지표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대학교 입학할 때 전공을 결정하라는 것과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피상적으로 생각은 해 볼 수 있겠지만, 실제로 그 회사에 들어가서 업무를 해 봐야, 그 일이 나에게 맞는지를 확실하게 알 수 있겠죠. 심지어는, 들어가서 딱 맞는 첫사랑도 있겠지만, 일을 몇 년 해 보면서 자기의 재능을 발견하고 점 점 더 그 일과 사랑에 빠지는 좀 진득한 연애도 있을 수 있으니 너무 성급하게만 생각할 일도 아니고요. 게다가, 한 직장에서도 여러 가지 다양한 직무가 있을 수 있으니, 처음 만난 업무와 잘 되지 않으면 다른 업무를 찾아서 옮겨 다니다가 결국은 천생연분을 만나는 자유연애가 있을 수도 있겠죠.


그래서 제가 지금 생각하는 것은, 계약직으로 일할만한 업무를 찾아보면 어떨까 하고 있습니다. 회사 입장에서도, 짧은 면접 만으로 저라는 사람을 검증하기 쉽지 않으니 들어와서 일 년 정도 일하다가 영 아니다 싶으면 내보내기 쉬운 계약직이 편할 수도 있죠. 제 입장에서도 정식 직원에 비해서 회사에 덜 얽매이는 계약직으로 일을 해 보고, 그 일이 정말 내가 오랫동안 하고 싶은 일이라는 확신이 들면 그때 가서 정규직 자리를 노리면 되지 않을까 합니다. 계약직으로 일하면서 다른 여러 가지 시도를 자유롭게 해 볼 수 있는 옵션도 있을 것 같고요. 


근데 제가 막상 취업 인터뷰를 해 보고 입사 지원서를 두 군데 정도 넣어보니, 이게 그렇게 쉽지만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고민 중입니다. 우선, 회사 입장에서는 사람을 뽑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니, 일단 뽑으면 그 사람에게 교육을 시켜주고, 업무를 맡기고, 팀의 일원으로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고 하는 등의 투자를 하게 될 텐데, 이 사람이 계약직으로 입사를 한다면, 언제 나갈지 모르는 사람이니 그런 정도의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투자를 하기가 망설여지겠죠. 그렇게 되면,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관계가 되어서, 고생해서 뽑은 사람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돈은 돈대로, 시간은 시간대로 그저 흘러 보내는 최악의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단 말이죠. 그러니, 차라리 잘못된 사람을 뽑는 위험을 감수하더라고 정직원으로 채용을 하고, 제대로 성심 성의껏 지원을 해서 자기 사람으로 만들려고 노력을 하는 것이 옳은 선택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사실 미국에서도 정규 직원 (Full Time Employee)와 계약직 직원 (Contractor)은 다릅니다. 일자리의 안정성도 그렇고, 지급되는 월급 수준이나 회사에서 지원해주는 각종 복지혜택이 차이가 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반면에, 정규 직원으로 뽑혀서 그런 혜택을 누리다가도, 아무런 이유 없이 해고를 당할 수 있는 나라거든요. 물론 직원이 잘못을 저질러서 해고되는 것 (Fire)과 회사의 필요에 의해서 내보내는 것 (Layoff)는 좀 다릅니다만, 기본적으로 고용계약서에 보면 'At Will Employment'라는 조항이 있어서, 회사나 직원이나 서로 간의 고용계약을 종료하는데 특별한 이유가 필요하지 않다고 명시되어 있거든요.


그러니 정직원으로 뽑아놓고도, 영 우리에게 맞지 않는 사람이라는 판단이 들면 6개월 안에 내보내는 것도 가능합니다. 실제로 제가 다니던 회사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고요. 그러니까, 제 경력을 살펴보고 면접을 봐서 괜찮은 후보라고 판단해서 입사 제안을 했는데, 그 당사자가, '저는 정직원 말고요 계약직으로 뽑아주시면 안 될까요?'라고 하면 좀 황당해할 것 같다는 걱정입니다. 이건 결혼하자고 프러포즈를 했더니, '결혼은 좀 나중에 하고 일단 동거를 좀 해 보면 안 될까요?'라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요? 어떤 의도로 그런 제안을 하는지 이해는 되지만 용납은 되지 않은 그런 상황...   ^^


물론 이 모든 일은 가상의 시나리오이고, 제가 아직 본격적으로 다음 직장에 대해서 확신을 갖고 찾아보기 시작하지도 않은 시점에서 하고 있는 생각이니, 좀 더 고민을 하면 다른 좋은 방법이 있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착각은 자유라는 우스개 소리도 있듯이, 이왕 이렇게 다음 커리어를 고민하고 있는 상황에서 여러 가지 다양한 옵션을 자유롭게 생각해보는 것도 나름 즐거움이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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