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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이킴 Feb 06. 2022

한국에서 하던 영어

미국의 문화

미국에 오기 전까지는 스스로 영어를 꽤 잘한다고 생각했다. 자아도취의 평가만은 아니고, 한국에 출장으로 오는 본사 손님들하고 이야기할 때도 가끔 듣던 이야기다. 원어민 수준은 아니지만 그래도 미국에서 유학 정도는 한 영어라고 생각하는지, 미국 어디에서 공부했는지 물어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할리우드에서 공부했다고 대답하면 처음에는 약간 갸우뚱한다. 미국에서 살아본 적도 공부를 한 적도 없지만, 한국에서 대학교 다니면서 미국 영화를 많이 보면서 영어를 배웠다고 하면 박장대소를 하면서 아주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이어진다. 자주 써먹던 농담이고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다.


농담이라고 했지만, 이 이야기는 실화에 더 가깝다. 대한민국의 정상적인 교육 과정을 마친 학생답게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영어는 단어 외우기와 문장 해석을 위한 시험 과목이었다. 대학교에 들어와서도, 영어는 대화의 수단이 아니라 영어로 된 책을 읽고 이해하기 위한 공부의 수단이었다. 군대를 마치고 복학해서 처음으로 제대로 공부에 재미를 붙이면서, 원서와 인터넷의 영어로 된 정보들을 좀 더 많이 다양하게 보기 시작했다. 큰 물에서 놀려면 영어를 해야 한다는 동기 부여가 되었다. 학교 근처에 삼육 학원이 있어서 저렴하게 영어를 배울 수 있었다. 첫 입학은 쉬웠는데 두 달 후 재등록 기간에는 새벽에 줄을 서야 자리를 잡을 수 있을 만큼 경쟁이 치열했고, 거기서 실패한 이후로 영어 학원 쪽은 포기했다. 


유학에 관심이 있어서 당시 유행하던 Vocabulary 22,000이나 33,000 단어집을 들고 공부도 했지만, 꾸준히 하지는 못했다. 역시 같은 이유로 토플 공부를 한때 열심히 하기도 했지만, 가장 꾸준하게 한 것은 당시 학교 근처에 생겨서 유행하기 시작했던 비디오 방에서 미국 영화를 열심히 본 것이다. 공부한다는 생각보다는, 내가 가서 살아보고 싶은 나라의 모습을 재미난 이야기와 엮어서 보고 즐기는 유흥에 가까웠다. 그게 너무 재미있어서 복학 후 졸업할 때까지 거의 일주일에 몇 개씩은 꾸준히 영화를 봤으니 못 봐도 수백 편은 봤을 것이다. 그렇게 자주 미국 영화를 보다 보니 조금씩 내용을 알아듣기 시작했다. 내가 알아들은 내용과 자막에서 보여주는 내용이 조금이라도 다르면, 마치 뭔가 대단한 것을 발견해낸 듯 즐거워했다.


그렇게 몇 년을 학원도 안 다니고 영화만 주야장천 보다가 외국인 회사의 영어 면접시험을 보게 되었다. 그 회사에 지원한 신입 사원들은 모두 서강대 어학원에서 원어민 강사와 면접을 보아야 했다. 영어 면접을 그렇게 잘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는데 합격을 통보받았다. 또한 신입 사원 교육을 미국으로 보내는 순서도 영어 성적에 따른다고 했는데 꽤 빨리 미국으로 교육을 가게 되어서, 생각보다 영어 면접을 잘 봤다고 짐작만 할 뿐이다. 첫 직장을 관두고 다른 회사로 옮기고 나서도 영어를 꽤 잘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일했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도, 영어 공부에 관심은 많았지만, 딱히 시간을 내서 뭔가를 하지는 않았고 여전히 미국 영화를 많이 볼뿐이었다. 그러다가 좀 더 마음먹고 영어를 공부하게 된 계기가 생겼다.


새로 옮긴 회사에서 경력이 쌓이면서 시니어 필드 엔지니어 타이틀을 달게 되었다. 당시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이나 싱가포르, 인도를 비롯한 아시아 시장이 매우 빠르게 성장하는 시기였다. 한국 사무실의 첫 필드 엔지니어이고 아시아를 통틀어서도 몇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선임 직원이 되어있었다. 덕분에 한국을 벗어난 다른 나라의 행사에 초대받아서 발표하기 시작했다. 작게는 50여 명 모인 싱가포르의 작은 전문가 회의부터, 크게는 400명도 넘게 모인 인도의 대형 콘퍼런스 무대까지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발표도 하고 고객도 만났는데, 정말 힘든 시기였다. 영어를 잘한다는 소리를 들어봤자 미국에서 살아보지 않은 토종 한국인치고 잘한다는 소리였지, 영어를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싱가포르나 인도 사람들만큼 잘할 수는 없었다. 출장을 가서 발표가 있는 날은 아침이나 점심도 못 먹을 정도로 긴장했다. 덜덜 떨면서 무대에 올라갔는데 갑자기 머리가 하얘지면서 밤새도록 외운 발표 내용이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아서 버벅거렸던 기억도 많다.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우리말로 하는 발표에서는 목소리도 크고 선명하고, 내용도 또박또박 잘 설명하고 심지어는 유머도 가끔 섞어가면서 완급 조절까지 해서 무대 체질이라는 이야기까지 들었었다. 그런데 똑같은 내용을 영어로 언어만 바꿔서 발표할 때면 완전히 바보가 되는 나에게 크게 실망했다. 맘먹고 영어 공부를 다시 시작했지만, 여전히 학원은 아니었다. 영어로 하는 프레젠테이션 책을 사고 관련 표현을 외웠다. 전화 영어가 일상 영어와는 다른 표현을 쓰듯이, 무대에서 하는 발표에서도 자주 쓰는 단어와 표현이 있었다. 정말 민망하지만 스스로 발표를 녹음해서 다시 들어보고 어색한 표현을 찾아내서 고치는 연습도 했었다. 그렇게 집중적으로 연습하고 무대에 서도 버벅거리기는 마찬가지였다. 몇 년이 지나 한국 영업으로 일이 바뀌고, 해외 지원 업무가 없어지기 전까지, 해외 콘퍼런스에서 하는 발표는 내 회사 생활의 가장 큰 스트레스였다.


이 스트레스가 정말 순수하게 영어 실력의 문제에서만 오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인도나 싱가포르 그리고 홍콩 등지의 발표에서의 스트레스 지수가 최악이라면, 대만이나 중국 혹은 일본에서 있는 행사에서 발표하는 것은, 물론 스트레스를 받기는 하지만, 극도의 긴장으로 위가 쪼그라들어서 밥도 못 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즉, 영어를 공용어로 일상생활에서 쓰는 나라에서 발표할 때면, 발표를 듣는 청중이 나보다도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에, 단어 하나 표현 한마디에도 더 신경이 쓰이는 것이고, 그렇지 않은 나라에서는, 아무래도 그 친구들보다는 내가 영어를 조금이라도 더 잘한다는 생각에 그나마 좀 편하게 발표하는 것 같았다. 영어 자체로 인해서 받는 스트레스가 물론 가장 크지만, 자신의 영어 실력에 대한 자신감이 또 다른 큰 걸림돌로 작용해서 오히려 더 버벅거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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