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의 가족생활
미국에 처음 와서 참으로 막막했던 것이 아이 학교 문제였다. 이민을 오기 몇 달 전에 사전 답사차 미국에 들어왔을 때 다행히 집 근처에 좋은 고등학교를 봐 놨고, 정말 운이 좋게 예약도 없이 갔다가 학교 교감 선생님과 면담하게 되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막상 1월에 미국에 들어와서 학교 입학 수속하고 하는 일이 꽤 큰일이었다. 학년이나 학기 제도도 워낙 한국과 다르지만, 더군다나 같은 공립학교 사이에도 어떤 학교는 우리가 흔히 아는 2학기 제도이고 어떤 학교는 3학기 제도라, 어느 시점에 들어가는 타이밍이 중요하기도 했다. 어떤 학교는 딱 새 학년 시작하는 가을 학기에만 신입생을 받기도 하고 어떤 학교는 겨울에도 신입생을 받기도 한다.
사립학교는 처음부터 생각하지도 않았다. 돈이 꽤 든다는 이야기는 얼핏 들었지만, 보낼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알아보지도 않아서 얼마인지도 모른다.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다기보다, 미국에 이민을 왔으면 그냥 미국 사람들 다니는 일반 공립학교에 가는 것이 맞는다는 생각이 들어서, 집에서 너무 멀지 않은 공립학교만 알아보고 다녔다. 딱 한 번 고민을 좀 하게 했던 부분이 있긴 했다. 아이가 중학교 3학년을 한국에서 졸업했다. 1월 13일에 미국에 들어왔으니 졸업식은 하지 못했지만, 졸업장이나 성적표 등은 열심히 챙겨서 가져왔다. 미국은 겨울 학기가 2월에 시작하는데, 가을에 새로운 학년이 시작하니 겨울 학기가 그 학년의 2학기가 된다. 한국에서 가져온 중학교 3학년까지의 성적표를 제출하니, 10학년 2학기로 들어가라고 하는 것이다.
미국도 한국처럼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을 다니면 9학년까지 마친 것이 된다. 그렇게 따지면 10학년이 고1, 11학년이 고2, 그리고 12학년이 고3 졸업반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9학년부터 고등학교(High School)라고 하니 미국 대학처럼 9학년을 신입생(Freshman), 10학년을 2학년(Sophomore), 11학년을 주니어(Junior) 그리고 12학년을 시니어(Senior)라고 부른다. 어쨌거나 우리 아들을 10학년 2학기로 들어가라는 것은 말하자면 중3을 졸업하고 고등학교 1학년 2학기로 한 학기를 건너뛰고 학교생활을 시작하라는 것이다.
우리 아이가 미국에 이민해 온 지 한 달이 되었고 아직 영어가 익숙하지 않으니 9학년 2학기로 들어가고 싶다고 이야기해 봤지만 공립학교 정책상 같은 학년을 두 번 다니는 것은 허용이 안 된단다. 한국에서 이미 9학년 2학기까지 마치고 왔으니 그 학기를 다시 다니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사립학교에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원하는 학년에 넣어준다고 들었지만 사립학교를 보내는 것은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리 길게 고민하지 않고 그냥 10학년 2학기로 들어가겠다고 해서 입학 절차를 밟고, 미국 온 지 몇 주 만에 바로 학교생활을 시작했다. 만약에 이런 사정을 알고 있었더라면, 한국에서 중학교 3학년 1학기 성적표까지만 띄어왔을 걸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미국에 와서, 중학교 3학년 2학기를 완전히 마치지 않아서 9학년 2학기부터 다녀야 한다고 이야기했으면 통하지 않았을까 한다.
학교생활을 하는 기간이 짧아져서 좀 고생스럽지 않을까 걱정했었다. 9학년부터 시작하는 미국의 고등학교(High School)는 마치 우리나라 대학교처럼 꼭 이수해야 하는 졸업 학점이나 의무 과목들이 있어서, 한국에서 받아온 중3 성적표의 과목들이 어떻게 처리가 되냐에 따라서 좀 바쁘게 학교생활을 해야 했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런 부분도 꽤 인정받았고, 또 이 학교가 ESL(English as a Second Language)이라고 해서,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학생들을 위한 수업이 잘 되어있어서, 금방 진도를 따라가는 것 같았다. 진도를 따라가는 정도가 아니라, 웬만한 수업은 다 A 학점을 받아오는데, 특히 수학이나 과학은 한국에서 이미 다 배웠던 부분이 많아서 쉬웠다고 한다. 나중에는 AP (Advanced Placement)라고 해서 좀 높은 수준의 과목들까지 챙겨서 듣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건 고등학교 수준을 넘어서 대학교 수준의 내용을 미리 공부하는 것이고, 돈을 내고 시험을 봐서 통과하면 대학에서도 학점을 인정해주는 과목들이라고 들었다.
처음에 한동안은 학교에서 숙제를 내주면 항상 나랑 같이 들여다보곤 했다. 숙제 자체가 어렵다기보다, 무엇을 해 오라는 건지를 잘 이해를 못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것만 설명해주면 내 도움이 없이도 혼자서 곧잘 숙제를 잘해서 필요한 점수를 받아왔다. 나중에 시간이 좀 지나면서는 나한테 들고 와서 물어보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물론 컴퓨터 과목처럼 내가 도와주면 훨씬 금방 할 수 있는 부분이나, 혹은 좀 어려운 소설 읽기같이, 한국에서 중학교에 다닌 녀석이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들은 종종 같이 숙제를 봐주곤 했지만, 나중에는 거의 나에게 숙제 도움을 요청하는 경우는 없었다. 생각보다 빨리 적응하고 혼자서 잘 알아서 학교 생활하는 것이 고맙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했지만, 반면에 미국 고등학교의 여러 가지 시스템에 대해서는 부모인 우리도 잘 모르고, 녀석이 대부분 혼자 알아서 하는 것이 좀 불안하기도 했었다.
2년이라는 시간은 생각보다 금방 지나갔다. 여전히 미국의 고등학교 시스템은 친숙하지 않았지만, 인터넷 검색도 해 보고 학교에서 졸업 관련된 설명회가 있으면 가능하면 참석해서 이야기를 들었다. 학교를 찾아가서 진학 담당 선생님과 상담했던 기억이 난다. 아들 녀석이 10학년 2학기부터 시작했고, 주립대학교 진학에 필요한 조건 중의 하나인 4년간의 정규 영어 교육을 마치지 못했으니, 마치 유학생들처럼 토플 시험을 봐서 대학 교육 수준에 맞는 영어 실력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할 거라고 했다. 그 외에도 미국 대학 입시를 하기 위한 여러 가지 조건들이나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을 텐데, 학교 성적은 좋지만, 그것만으로 좋은 대학을 가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선생님도, 이대로 바로 정규 대학을 가면 적응하기가 쉽지 않을 거라면서 커뮤니티 컬리지를 권했다. 주 정부에서 지원하는 일종의 전문대학 혹은 평생 교육 기관인데, 거기서 2년을 다니면서 영어도 늘리고, 대학 생활에 적응할 시간을 갖는 것도 괜찮을 거라고 했다. 캘리포니아의 주립대학교에서 어느 숫자 이상의 학생을 커뮤니티 컬리지에서 뽑는 제도가 있으니 원하는 대학의 원하는 과에 가기도 이게 더 유리할 것이라는 말도 들었다.
집에서 아들 녀석과 여러 번 대화했던 것 같다. 결국 선택은 너의 몫이니, 바로 정규 대학 진학을 노려보겠다면 지원해 주겠지만, 준비할 시간이 짧으니 너도 그만큼의 노력이 필요할 거라고. 결국 우리는 집에서 멀지 않은 커뮤니티 컬리지에 진학하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거기서도 여전히 성적은 잘 받아왔다. 그런데 1년도 채 못 다니고 코로나 사태가 벌어져서 나머지는 집에서 온라인 수업을 받으면서 졸업하게 되었다. 커뮤니티 컬리지도 고등학교만큼이나 시스템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더구나 이제는 대학생이라고 생각해서, 알아서 잘하겠지 하고 신경을 덜 쓴 부분도 있었다. 성적도 매우 우수하니, 원하는 주립대의 컴퓨터 공학 관련 전공의 3학년으로 바로 전과가 가능할 것이라고 믿고 크게 걱정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매우 안이한 생각이었다. 딱 두 군데의 주립대에 전과 신청을 했고 둘 다 떨어졌다. 지금 생각하면 부모로서 좀 더 신경을 써주고, 같이 대화도 더하고, 여러 가지 옵션을 고민하고, 그랬어야 했는데 너무 아이에게만 맡겨두지 않았었나 하는 후회가 들기도 한다.
일 년 정도만 먼저 들어와서, 미국의 정규 고등학교 과정이 시작되는 9학년 1학기부터 다녔으면 여러 가지 미국의 교육 제도상 순리대로 흘러갔을 거라는 생각도 해 본다. 주변의 학부모들과 교류하면서 그 사람들은 어떻게 준비하는지 좀 더 적극적으로 알아봤어야 했다는 생각도 든다. 그게 어렵다면, 좀 웃기는 일이지만 한국의 흔한 유학원 같은 곳에라도 연락해서 전문가로부터 입시 상담이라도 받아봤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우리는 미국에 주재원으로 가족이 이민을 왔으니까 그냥 미국 사람들처럼 살겠다는 생각으로 그렇게 학교에 다녔는데, 그러기에는 우리가 모르는 것들, 익숙하지 않은 것들이 너무 많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참으로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었었나 싶다. 하지만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말처럼, 결국은 다 좋은 쪽으로 풀릴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커뮤니티 컬리지를 다니는 덕분에 2년 치 주립대 학비를 절약하게 되었다. 그리고 주립대 전과가 되지 않는 바람에 미루어 두었던 군대 이야기를 더 진지하게 할 수 있었고, 결국은 한국에 들어가서 군대 문제를 해결하기로 하였다. 아들 녀석의 인생이, 한국에 가서 군대를 마치고 돌아와서 남은 공부를 더 하든 바로 취직하든, 여기서부터 더 좋은 방향으로 풀릴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