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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이킴 Feb 06. 2022

영어 이름이 필요할까

미국에서의 가족생활

한국 사람들만 그렇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름에 대해서 매우 큰 의미를 부여한다. 어릴 때 친구와 싸우고 나서 그 친구를 원망하는 마음에 빨간색 볼펜으로 그 친구의 이름을 써 본 기억이 있는 사람은 이해할 것이다. 아이들 사이에서 이름을 빨간색으로 쓴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수준의 해코지였다. 이름과 본인의 실체 사이의 강력한 연관을 느낀다는 의미가 아닐까 한다. 이름을 살짝 바꿔서 별명을 부르는 것도 비슷한 수준의 충격을 줄 수 있다. 그리고 이건 옛날이야기만도 아니다. 우리 아들 이름에 원이라는 글자가 들어가는데, 예전에도 그랬듯이 요새도 이름에 원이 들어가면 딱 생각나는 영장류 동물의 이름으로 놀리는 경우가 가끔 있고 그런 것은 본인에게도 꽤 마음에 남는 상처가 될 수도 있다.


한국에서 개발팀의 매니저로 일할 때 직원들에게 영어 이름을 모두 하나씩 만들어서 쓰자고 제안한 적이 있다. 한국 이름이 발음하기도 어렵고 스펠링을 기억하기도 어려우니 영어로 별명을 하나씩 만들어서, 회사 이메일도 그걸로 쓰고 외국의 동료들과 일할 때도 그렇게 부르는 것으로 하면 편하지 않겠냐는 의도였다. 이에 동의하고 기꺼이 영어로 닉네임을 만든 친구들이 절반이 넘었던 것 같은데, 끝까지 반대하는 사람들도 매우 많았다. 유럽 사람들도 그렇게 하는 사람이 없고, 일본 사람들 이름이 아무리 복잡해도 아무도 영어 닉네임을 쓰지 않는데 왜 한국만 그렇게 해야 하는 논리였다. 중국이나 대만은 영어 별명을 쓰고, 이름이 복잡한 인도 사람들도 줄여서 간단하게 만든 애칭을 쓴다고 설명했다. 일본 이름은 복잡해도 외국 사람들이 발음하기 어렵지 않은데 우리 이름은 받침이 있어서 발음도 어렵고 스펠링도 기억이 잘 나지 않아서, 업무 할 때 편하게 서로 이름을 부르지도 못하고 나중에 이메일 보낼 때도 불편할 수 있다고도 설명했지만, 이건 편리성의 문제라기보다는 정체성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시각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영어 이름의 문제를 좀 더 열린 마음을 갖고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내 이름은 다른 사람이 나를 인식하고 구별하는 상징이다. 다른 사람들이 내 이름을 발음하고 기억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면 그만큼의 어려움을 갖고 미국 생활을 시작하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 문화이다. 회사에서도 사장님, 이사님, 부장님, 과장님이라는 직책이 사용된다. 부인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도 집사람, 아이 엄마이고 아이 이름도 아들 녀석, 큰 딸내미 이런 식으로 이야기한다. 식당에 가서 필요한 것을 시킬 때 부르는 사람도 이모님이고, 나이 지긋하신 분들은 아주머니, 젊은 분들은 아가씨나 총각이 호칭이 된다. 정 애매하면 저기요라는 만능 호칭도 있다. 회사에서 직급이 아직 없는 사람이나 무슨 무슨 씨라고 부르는데 그것도 윗사람이나 그렇게 부를 수 있지 비슷한 사이에서 그런 호칭은 기분 나쁘게 들릴 수 있다. 


미국에서 다른 사람들과 가족 이야기가 나오면 보통은 자녀들의 이름을 직접 부른다. 우리 아들이 이번에 대학교 가게 되었는데 전공을 컴퓨터 공학을 할까 하고 있다고 이야기할 때, 물론 우리 아들(my son)이나 딸(my daughter)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브랜던이니 스카일라니 이렇게 이름을 부르면서 이야기를 이어 나간다. 사장님을 부를 때도 마커스이고 부사장님을 부를 때도 토니이며 엊그제 입사한 신입 사원을 부를 때도 아담이나 네브딥이라고 한다. 골프장에 갈 때 문을 열어주는 나이 지긋한 할머님은 캐럴이고 식당에서 주문을 도와주는 종업원은 다이앤이다. 은행에 필요한 것이 있어서 전화해도 디애나와 통화를 하는 것이지 부 지점장님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골프장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끼리도 첫 홀 티샷 전에 서로 인사를 하면서 통성명하는데, 이런 문화에 익숙하지 않아서 처음에는 고생을 많이 했는데 다음부터는 이름을 들으면 스코어 카드에 슬쩍 적어놓는다. 안 그러면 18홀 내내 말 한번 걸기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미국 온 지 몇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아서, 식당에서 종업원이 우리 테이블에 와서 자기 이름을 이야기하거나 혹은 전화로 처음 보는 사람과 통화를 하면서 자기는 누구라고 이야기하는데, 이때 정신 바짝 차리고 듣지 않으면 기억에 남지 않아서 애매하게 호칭하거나 혹은 나중에 민망함을 무릅쓰고 이름이 뭐였는지 다시 한번 물어봐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


미국에 온 이후에 나에게는 4개의 이름이 생겼다. 여권이나 각종 법적인 문서에 적혀있는 내 한국 이름(Taeyong)이 첫 번째다. 회사에서도 공식적인 문서에는 이 이름이 사용된다. 그리고 한국 문화에 친숙하고 내 한국 이름을 부르기를 원하는 친구들은 이 이름으로 나를 부른다. 발음은 그리 어렵지 않은데 스펠링이 좀 복잡해서 이메일을 쓸 때는 많이들 헷갈린다. 두 번째 이름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미국 회사에 입사했을 때 그 회사에서 알려준 대로 영어 첫 글자로 만든 이름이다. 나의 경우에는 TY가 되는데 한국 사람들끼리도 김태용 씨라고 부르는 것보다는 티와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좀 더 친근감이 들어서 많이들 사용했다. 이것이 내가 한국에서 다른 외국인 회사에 다닐 때의 기본적인 이름이 되어서 그때 만난 외국 친구들은 나를 티와이 킴이라고 부른다. 


그 후에 미국에 이민을 와서는 Ty라고 자신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영어 발음으로는 “타이”라고 한다. 영문자 Y를 대문자에서 소문자로 바꾸고 발음을 알파벳 약자에서 그냥 한 음절 단어로 바꾼 것이다. 앞으로는 나를 TY가 아니고 Ty로 불러달라고 설명하는 장문의 이메일을 회사 사람들한테 미국에 오자마자 보낸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하면 웃긴 일이지만 그 당시에는, 근무 환경도 한국에서 미국으로 바뀌었고 하니, 비록 같은 회사를 쭉 다니고 있었지만 새로운 나로 봐 달라는 의미도 있었다. 그 외에도 미국 사람들이 나를 티와이라고 부르면 좀 이상한 느낌이 들곤 했다. 한국 이름 두 음절의 첫 글자를 따서 만든 것인데, 뭐 DJ나 YS처럼 유명한 정치인의 이름을 직접 부르기 거시기하니까 약자로 부르는 것처럼 한국에서 일할 때, 한국 직원들끼리 서로 이름 부를 때 편하니까 쓴 것이다. 미국에서도 좀 친한 사람들끼리 애칭처럼 그렇게 이름의 약자를 부르기도 하지만 그 경우에는 DJ는 Dustin (이름) Johnson (성)을 합쳐서 DJ가 된다. 그렇게 따지면 나는 TK라고 하는 것이 맞지, TY는 뭔가 좀 이상하다. 그래서 생각해낸 아이디어가 뒤의 y를 소문자로 해서 Ty라고 하면 이건 알파벳 첫 글자가 아니고 한 음절의 단어가 된다. Ty Cobb이라고 아주 유명한 야구 선수처럼 그 자체로 이름이기도 하고 Tyrone이나 Tyler의 애칭 혹은 줄여서 부르는 약칭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이름은 최근에 생긴 것이다. 지금 다니는 회사의 사무실에 나이가 지긋한 독일 출신의 엔지니어가 있다. 실력도 좋고 재미난 농담도 많이 하는데 이 양반이 귀가 좀 어둡다. 그래서 회의할 때나 식사할 때 좀 목소리를 크게 해야 알아듣는다. 처음에 만나서 나를 Ty라고 소개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를 “티”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래서 한 번 더 “티”가 아니고 “타이”라고 발음한다고 웃으면서 알려줬는데 그때는 고개를 끄덕끄덕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천진난만하게 웃으면서 “굿 모닝, 티~”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이제는 그러려니 하고 있다. 그 사람과 나 사이에만 괜찮으면 그 사람은 나를 “티~”라고 생각하는 것도 거슬리지 않는다. 다만 내가 없을 때 그 사람이 나에 관해서 이야기하면서 그렇게 지칭하면 다른 사람들이 좀 헷갈리겠다는 걱정은 되지만, 우리 사무실에 이름이 T로 시작하는 사람은 CFO밖에 없는데 그 사람은 다들 톰이라고 부르니까, 이 양반이 “티”라고 찰떡같이 불러도 콩떡같이 사람들이 알아들을 거라고 마음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미국에 와서 산다고 해서 반드시 영어 이름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우리 아들의 경우에는 한동안 고민 끝에 Will이라는 멋진 이름을 제안했는데 본인이 싫다고 해서 쓰지 않았다. 이름이 "원식"이고 영어로 "Wonsik"이라고 쓰는데 미국 사람들이 발음을 몹시 어려워하는 것은 아니라서 괜찮단다. 한 가지 걸리는 것은 마지막의 sik이 아프다는 의미의 sick이라는 인상을 주지 않을까 하는데 뭐 기우일 듯하다. 본인의 이름이 발음과 스펠링이 꽤 어려운 한국말이라면 영어 이름을 갖는 편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미국은 우리나라에 비해서 이름을 직접 부르는 문화라서, 어디 가서 뭘 하더라도 서로 이름을 부르면서 대화한다. 그때 내 이름의 발음이 어려워서 사람들이 내 이름을 부르기를 꺼린다거나, 스펠링이 어려워서 엉뚱한 실수를 한다거나 하면 불편한 점들이 있어서 그렇다. 반면에 어차피 법적인 이름은, 시민권을 따서 영어 이름이 생기지 않는 한 한국 여권에 나와 있는 한국 이름이고, 좀 불편해도 오히려 이를 나의 브랜드로 삼아서 극복해나가는 재미를 느끼고 싶다면 한국 이름을 그대로 쓰는 것도 물론 당연히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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