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의 직장생활
미국에 와서 3년간 일하다가 해고(layoff)당했을 때는 눈앞이 깜깜했다. 한국에서는 구조조정이니 정리해고이니 하는 일들이 물론 있기는 하지만 그렇게 흔한 일이 아니다. 큰 회사의 경우에는 회사의 경영이 어려워서 어쩔 수 없는 경우에, 매우 조심스럽게 신청자 위주로 오랜 시간 동안 계획해서 단행하고, 그 과정에서 해고당한 직원이 원래 받을 퇴직금 외에도 회사에 큰 유감을 갖지 않도록 충분한 수준의 보상을 주는 편이다. 작은 회사도 정말 힘들어서 갑자기 인원을 줄이더라도 최대한 인간적으로 일을 처리하도록 노력한다. 그에 비해서 미국에서는 기본적으로 고용 계약의 기반이 임의 고용 (at will employment) 형태이다.
고용주도 언제든 직원을 내보낼 수 있고, 직원도 언제든 회사를 떠날 수 있다. 고용 계약서에 따라서 조금씩 달라지기는 하지만 대략 2주의 통지 기간을 주게 된다. 직원의 경우에 회사를 떠나고 싶으면 2주 전에만 회사에 이야기하고 사표를 제출하면 된다. 이런 경우엔 대개 회사로서는 그 2주의 기간 동안 업무 인수인계를 처리하게 된다. 회사가 직원을 내보내는 것도 이론적으로는 그런데, 이 경우에는 회사가 그 직원에게 통보하는 순간부터 출근하지 않아도 되고, 그래도 2주 치 월급을 주겠다는 의미이지 2주 동안 실제로 근무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대개 미국의 월급은 한 달에 두 번 지급이 되니 그런 의미에서 회계상 편리해서 정해진 듯도 싶다. 실제로 직원을 해고하면 여기에 약간의 위로금을 더 주는데 그것도 잘해야 몇 주 치 정도 월급이 고작이다.
미국에 오기 전이나 혹은 오고 나서도 회사의 다른 직원들이 해고되는 것을 많이 겪었지만 실제로 내 눈앞에서 본 광경은 생각보다 충격적이었다. 실리콘 밸리에 있는 본사에서 우리가 있는 샌디에이고 사무실로 별 특별한 이유도 없이 부사장이 방문했다. 일반 직원들은 모르는 다른 업무가 있어서 출장을 오는 때도 있지만 이 경우에는 좀 특별했다. 와서 차례대로 직원을 한 사람씩 따로 불러서 면담하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우리 사무실의 모든 직원과 면담하고, 그 자리에서 해고를 통보받은 직원은 바로 짐을 싸서, 남은 직원들과 짧게 인사를 나누고 떠났다. 해고를 통보받은 직원이 노란 종이상자에 개인 짐을 챙겨서 사무실을 떠나는 모습은 영화에서 보는 것과 완전히 똑같았다. 그 떠나는 직원이 나와 같은 사무실에서 지난 몇 년간 때로는 웃고 떠들고 밥도 같이 먹고 때로는 투덕거리며 미운 정 고운 정이 쌓인 직원이라는 것이 다를 뿐이다. 아직도 어색한 얼굴로 작별 인사를 하던 그 친구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내 경우에는 여러 면에서 그것보다도 오히려 더 극적인 면이 있었다. 이런 일의 특성상 극도의 보안이 유지되고, 따라서 누구에게든 해고 통보는 난데없이 다가올 수밖에 없다. 우리 회사는 매년 1월 첫 주에 라스베이거스에서 하는 CES에 참가한다. 비용도 많이 들고 고위급 임원 미팅도 많이 잡혀서 항상 매년 가을에 데모 준비부터 시작해서 몇 달간 정신없이 바쁘게 일한다. 그해의 CES는 특히나 기억에 남는 것이, 보통 금요일 오후에 행사가 마무리되므로, 금요일 미팅이 없는 경우엔 목요일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는 일도 있고, 끝까지 남아있어야 하는 인원들도 금요일 저녁이나 늦어도 토요일 오전 비행기로 다들 떠나게 된다. 그런데 중국에서 온 고객사의 고위급 임원의 일정 때문에 토요일 오후까지 미팅이 잡혔고, 결국 토요일 저녁 비행기로 파김치가 돼서 집에 들어왔다. 일요일 잠깐 쉬고 월요일에 출근했는데 난데없이 우리 부서를 책임지는 부사장과 30분짜리 미팅이 월요일 아침에 잡혀서, 아무 생각 없이 화상 회의를 통해서 들어간 그 자리에서 해고를 통보받았다.
더욱 섭섭한 것은 그 부사장과 CES 내내 서로 얼굴을 보면서 지냈고, 특히 토요일 오후까지 진행된 마지막 미팅도 함께 했다는 것이다. 그러던 양반이 월요일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화상 회의를 통해서 회사에서 조직을 개편하면서 네가 맡던 포지션이 없어지게 되었다고 하니 머리가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 바로 뒤에 인사 담당자가 들어와서 이것저것 조건을 설명하는데 하나도 머리에 들어올 턱이 없었다. 회의를 마친 게 10시였는데, 바로 집에 돌아가도 된다고 했지만, 이것저것 정리할 것이 있어서 사무실에 오후 4시 정도까지 있었다. 오후 5시에 이메일 계정을 비롯한 회사의 IT 시스템에 대한 접속이 차단된다고 해서 4시까지 남은 업무를 정리하고 같이 일했던 직원들에게 굿바이 이메일을 보내고 사무실을 나섰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집사람과 아들 녀석이 마침 그때 겨울 휴가차 한국에 있어서 바로 식구들 얼굴은 보지 않아도 됐었다. 전화로 이야기할 수는 없어서 그 후로 일주일인가 지나서 둘이 미국 집에 돌아왔을 때 눈물의 가족 상봉을 했다는 것이 이 사건을 보다 극적으로 만든 여러 요소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미국에서 직장 생활을 하면서 해고의 위험은 직위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자동차 사고 같은 것이다. 조심조심해서 운전하다 보면 확률을 줄일 수는 있겠지만, 다른 차가 난데없이 와서 들이받으면 그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정신적으로나 금전적으로 큰 타격이 될 수도 있지만, 의외로 별 큰 피해 없이 지나가기도 한다. 운이 없다고 생각해도 되고 불편하게도 느껴지거나 심지어 화도 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끄러워할 일은 아니다. 그 일을 겪고 나서 조언을 구한 한국인 혹은 미국인 지인들의 공통된 이야기가, 처음 겪는 일이라면 당황스럽긴 하겠지만 대단한 일도 아니니 상심할 필요 없고 새로운 일을 찾으면 그만이라는 것이었다. 다행히 바로 다른 직장을 구해서 출근을 시작했지만, 여러 번 겪어서 익숙해지고 싶은 일은 결코 아니었다.
미국 직장인들이야 직장 생활 일부분으로, 유쾌하지는 않지만, 어깨 으쓱하고 넘어갈 일일 수도 있겠지만, 한국에서 이민을 와서 미국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체류 신분이라는 문제가 있다. 주재원 비자로 들어와서 일하고 있는데 어떤 이유로든 회사와의 고용 계약이 종료되면 60일간의 유예 기간에 다른 회사에서 적법한 비자를 받아서 일을 계속하든가 아니면 한국으로 돌아와야 한다. 미국에 남아있고 싶다면 관광이나 학생 비자 등으로 전환해야 하지만 이렇게 되면 취직을 할 수는 없다. 이런 일을 예상한 것은 아니었지만, 내 경우엔 미국 들어오자마자 회사의 인사부와 상의해서 회사의 지원으로 영주권을 신청했고 약 일 년 반 정도 후에 주재원 비자에서 영주권으로 신분 변경이 되었기 때문에 비자 문제를 걱정하지는 않았다. 한국 회사의 미국 주재원이면 이런 영주권 신청에 제약이 있다고 들었는데, 내가 본 주변의 미국 IT 회사는, 비용 문제는 몰라도 직원의 영주권 신청을 문제 삼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이렇게 갑작스레 회사를 떠나게 되고 나서, 같이 일했던 사람들에게 연락했고 모두 여기저기 소개를 해줘서, 그래도 내가 직장 생활을 못 하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먼저 연락했던 사람이 전에 모시던 보스였고, 그 양반이 바로 자기네 회사 인사부에 연락해서 면접 진행하고 워낙 일사천리로 재취업이 이루어지는 바람에 다른 곳은 면접을 볼 기회가 없었다. 여기서 중요한 교훈 한 가지는, 회사 생활을 하면서 꾸준히 사람들과 연락하고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그중에서도 본인이 모시던 보스는, 그 양반이 연세가 많이 드셔서 은퇴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우리 회사를 떠나서도 다른 회사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을 확률이 높고, 특히나 나와 같은 산업 분야에서 일하고 있을 것이니 가장 중요한 인맥이다.
또 한 가지 한국에서 이직하는 것과 다른 점은, 미국에서는 이직하면서 온 가족이 이사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워낙 땅덩어리가 커서, 새로 얻은 직장이 좀 떨어진 도시라면, 비행기 타고 출퇴근을 할 수는 없으니 이사를 해야 하는 것이다. 이건 같은 캘리포니아주 내에서도 그렇다. 내가 있는 샌디에이고는 캘리포니아의 최남단에 있는데, 여기서 실리콘 밸리까지는 차를 타고 8시간 걸리고 비행기로도 한 시간이 걸리는 거리다. 월요일 아침 비행기로 출근해서 금요일 저녁 비행기로 돌아오는 주말 부부같이 사는 사람도 있기는 한데, 그러면 회사 근처에 묵을 곳을 구해야 하니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코로나 사태로 원격 근무가 일상화되는 덕분에 회사를 옮겨도 이사까지는 가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하지만, 하여튼 규모가 큰 나라답게 우리나라와는 좀 다르게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이직이고 아주 강력한 회사 내 후원자가 있어서, 인터뷰 절차도 짧게 후딱후딱 진행된 후에 입사를 제안받아서 뭐 별다른 연봉이나 직급 협상 없이 바로 출근하게 되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이렇게 얼떨결에 결정을 내리기보다는 좀 더 협상 전략을 갖고 절차에 임할 필요가 있다. 해고로 인해서 시간의 압박을 받기보다, 현역에 있으면서 레이다를 가동하고 있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물론 지금 하는 일에 매우 만족하고 있다면 자꾸 다른 곳을 두리번거리는 것이 오히려 정신을 산만하게 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또 한가지 단점은, 지금 직장을 다니는 상황에서 다른 회사의 인터뷰를 보고나서, 그쪽으로 취업이 진행되지 않았을때, 그 쪽 회사의 사람을 만나게 되면 상당히 어색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해고라는 것은 예측이 가능한 것도 아니고 꼭 내 잘못으로만 벌어지는 일도 아니니 어느 정도의 대비는 항상 해 놓는 것이 중요하다. 일하면서 회사 내에서 혹은 외부의 고객사나 파트너사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나의 능력을 어필하고, 개인적인 친분을 기회 닿을 때마다 쌓는 것은 좋은 대비책이다. 일하면서 아주 가끔, 고객이나 파트너사로부터 너 혹시 우리 회사 와서 일할 생각 없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매우 잘하고 있다고 생각해도 된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그 사람들이 큰 힘이 돼줄 수 있다. 전 직장의 동료들, 혹은 현 직장에서 일하다가 다른 곳으로 옮겨간 동료들과도 꾸준히 연락하는 것도 중요하다. 물론 전제 조건은, 그 친구들과 회사 다닐때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그 사람들이 내 능력에 대해서 인정을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지만, 그런 인맥을 통해서 새로운 기회가 나타나는 경우도 많다.
링크트인(LinkedIn)을 통해서도 취직이 될 수는 있겠지만 내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확률이 그리 높지 않다고 생각한다. 일단 포지션이 하나 오픈이 되면 수백 명이 벌떼처럼 달려드는데, 그렇게 많은 지원자 모두에게 인터뷰를 제안하는 회사는 없다. 회사의 리크루터가 서류를 검증하면서 후보자 대부분을 떨어뜨리는데, 이 친구들도 전문가가 아니라 회사에서 주어진 업무 명세를 보고 구직 희망자의 이력서와 키워드를 기반으로 맞춰보면서 가장 공통점이 많은 후보를 뽑는 과정이라서, 이력서를 매우 잘 써놓지 않으면 통과하기가 만만치 않다.
그 사람들이 원하는 키워드와 내 이력서에 써있는 경력이 잘 맞아야하는 운도 필요하다. 물론 괜찮은 이력서라면 인사부(HR)에서 직접 전화를 통해서 사전 면접을 하는데, 역시 이것도 전문적인 대화가 아니고 그냥 그 사람의 분위기, 태도, 왜 옮기고자 하는지 등의 기본적인 필터링 수준이다. 이렇게 하고 나서야, 인원을 뽑고자하는 부서의 매니저(Hiring Manager)에게 연락이 오는데, 나도 가끔 인터뷰에 참여하지만, 지금 하는 일도 바쁜데 사람하나 뽑자고 하면 일주일에도 몇번씩 면접을 보고, 그 결과를 정리해서 다른 사람들과 의논하고, 그래도 확신이 서지 않으면 면접을 더 보는 등, 꽤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는 것이라 그리 달가운 일은 아니다.
나는 링크트인을 통해서 취업 제안을 받아본 적이 없다. 같이 일했고 나를 잘 아는 지인을 통해서는 몇 번 연락을 받았었고, 대부분은 아직 이직을 생각하고 있지 않다면 정중히 거절했지만, 그중에 딱 한 번, 평소에 관심이 있던 회사의 부사장급 포지션에는 지원한 적이 있었다. 워낙 높은 임원 자리였고 나의 전문성과 잘 맞는 곳이라 지원했다. 고용하는 매니저 본인이 Senior VP였는데 그 양반과 두 번 정도 사전 인터뷰했고, 그 후에 정식으로 인사 담당자를 통해서 시니어 매니저부터 해서 CTO까지 총 6명과 화상 면접을 진행했고 결국 떨어졌다. 꼭 그 자리에 가겠다는 절박함은 없었기에 큰 아쉬움은 없었고, 오히려 내가 아직 그 정도 레벨에 뽑히려면 영어부터 다양한 전략적인 질문들, 미국의 문화, 임원이 가져야 하는 카리스마 등등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소중한 경험이었다.
미국에 와서 영주권을 취득해서 신분 문제가 해결되었다면, 반드시 이직할 생각이 없더라도 가끔은 이런 경험을 하는 것을 추천한다. 한국은 워낙 시장이 좁아서 다른 회사에 면접만 보고 다녀도 바로 소문이 나지만, 미국은 워낙 회사도 많고 보안도 잘 유지되는 편이라서 인터뷰를 본 사실 자체가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다. 물론 그 회사가 내가 일하는 회사의 업무와 관련이 있고, 흔한 경우는 아니겠지만 하필 인터뷰에 참가한 사람과 업무를 해야할 일이 생기면, 상당히 어색한 상황에 처할 수는 있다. 사실 회사에서도, 유능한 친구들은 항상 이런 외부의 유혹에 노출되어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어서 혹시 알려져도 그런 것을 문제로 삼지는 않을 것이고, 아마 오히려 어떻게 하면 이 사람을 회사에 잡아둘 수 있을지, 혹은 뭔가 좀 더 비중이 있는 일을 맡겨야 할지 고민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