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회사에서의 직장생활
미국에서 흔히 하는 말이 있다. "People don’t quit a job, they quit a boss." 대충 번역하면, 사람들은 일이 싫어서 직장을 관두는 것이 아니고 매니저가 싫어서 떠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만큼 같이 일하는 보스와의 관계가 직장 생활에서 중요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나는 그런 경우가 없었다. 미국에 나를 불러온 보스와의 관계야 당연히 말할 것도 없고, 그 양반이 회사를 떠난 후에 같이 일을 했던 사람도, 나랑 일하는 결이 좀 다르긴 했지만, 성향이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지 그것 때문에 회사를 다니기 싫을 정도는 아니었다. 회사를 옮기고 새로 만난 보스도, 살뜰하게 사람을 챙겨주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같이 일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최근에 바뀐 보스도 아직은 서로를 알아가는 중이지만 크게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다. 주변에도 보스와의 문제가 있어서 회사를 떠난 사람들이 가끔 있기는 하지만, 대개는 바깥에 더 좋은 기회가 있어서 회사를 떠나는 경우이다.
보스 때문에 회사를 떠난다는 말은 좀 과장된 면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회사에서 어떤 사람 밑에서 일하게 되느냐는 여전히 매우 중요하다. 자기가 맡은 업무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는 처음에 회사에 들어올 때 들은 설명도 있고 회사의 업무 프로세스에 따라서 정해지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그건 큰 틀에서 그렇다는 것이고, 하루하루 실제로 벌어지는 일에 대한 모든 것을 업무 지침이나 직무 설명으로 정해놓을 수는 없다. 예를 들어서 내가 프로젝트 매니저로 어떤 프로젝트를 맡아서 관리한다고 했을 때, 기본적으로 해야 하는 업무들은 정해져 있다. 비용이나 일정을 관리하고 팀원들 업무 조정하고 문제 생겼을 때 적절한 조처를 하는 등의 일들은 가장 기본적인 업무의 범주에 들어간다. 하지만 예를 들어서 내가 바빠 죽겠는데 나한테 다른 프로젝트의 제안서 작업을 맡긴다던가, 아니면 일이 너무 없어서 빈둥거리고 있는데도 아주 사소한 프로젝트만 준다든가 하면 문제가 있는 것이다.
회사에서 업무 시스템이 아주 잘 갖춰져 있다면 일들이 골고루 분배될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 회사라는 것은 사람과 사람이 같이 일을 하는 것이고, 어떤 시스템도 완벽하게 모든 사람의 상황에 맞춰서 일이 돌아가도록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회사에 매니저들이 있는 것이고, 그들이 서로 협의해서 우선순위를 조정하고 일을 나누고 문제가 생겼을 때 조처를 하는 것이다. 내 매니저가 내가 맡은 일의 업무 상황을 잘 알고 있고, 내가 잘하는 일, 잘하지 못하는 일, 그리고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파악하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에서 일할 때는 퇴근하고 삼겹살에 소주 한잔하면서 내가 모시는 보스와 이런저런 진솔한 이야기를 할 기회가 많다. 회식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워낙 술도 좋아하고, 그런 자리에서 알코올의 힘을 빌려서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매우 즐겼다. 꼭 회식 자리가 아니더라도 같이 골프를 한다거나 등산 혹은 캠핑을 같이한다거나 하다못해 당구라도 같이 치면서 보스와 개인적인 관계를 쌓고 본인의 이야기도 할 기회가 많은 편이다.
미국에서 일할 때는 그런 기회가 많지 않다. 보스와의 관계는 회사에서 시작해서 회사에서 끝난다고 봐야 한다. 미국에서도 가끔 직원들끼리 모여서 식사하는 회식이 있지만 대부분은 점심을 같이 먹게 된다. 규정상 그런 자리에서는 술을 마시지 못하게 되어있는 회사도 있고, 우리 같은 경우에는 가볍게 맥주 한잔을 곁들이기도 하지만 딱 거기까지이다. 몇 시간씩 이어지는 한국의 저녁 회식과 다르게, 짧게는 30분에서 길게는 한 시간 정도 이어지는 점심을 같이 먹는 자리에서는 아주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전부이다. 저녁 회식이 있는 경우는 회사의 공식적인 업무가 있을 경우이다. 대규모로 회사에서 주최한 연말 파티일 수도 있고, 아니면 매니저들끼리 모여서 며칠간 하는 전략 회의일 수도 있다. 이럴 때 저녁에 회식이 있는데 이 경우에도 워낙 여러 곳에서 모인 사람들이 다양한 주제를 갖고 왁자지껄하게 떠들기 때문에 어떤 한 사람과 깊이 있는 이야기를 할 자리는 아니다. 내가 맞았던 가장 좋은 경우는 내 보스와 나랑 단둘이서 다른 도시로 업무 출장을 가게 되는 경우이다. 그러면 싫건 좋건 아침 점심 저녁을 같이하면서 며칠을 붙어 다닐 수밖에 없고, 그럴 때는 오붓하게 인간적인 관계를 쌓을 수 있지만 이런 기회는 그리 흔하지 않다.
상사와의 관계는 결국은 업무를 통해서 쌓아나가는 수밖에 없다. 주어진 일을 똑 부러지게 잘 처리하는 것은 기본이다. 그 이상의 업무 능력을 보여줘야 하는데 조직에서 일하면서 슈퍼맨이 되기는 힘들다. 따라서 여기에서 업무 능력이라는 것은 혼자서 북 치고 장구치고 일을 다 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자원과 조직의 힘을 이용해서 보스가 원하는 업무 결과를 만들어내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실무를 맡아서 하는 위치에 있다면 어느 정도 본인의 능력으로 업무 성과의 대부분이 좌우되겠지만 이 경우에도 다른 사람들 혹은 다른 부서와의 원활한 협업이 매우 중요하다. 매니저나 임원의 위치에 올라가면 본인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일의 결과만큼이나 다른 사람과 조화를 이루어서 일하면서 조직이 잘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리더십을 발휘하는 핵심이다. 똑똑하다고 해서 믿고 일을 맡겼는데, 본인 혼자서 독불장군처럼 다 일을 쥐고 다른 사람들과 충돌이 계속 생긴다면 그런 사람은 승진하기가 힘들다.
한국에서 일하다가 미국 본사로 들어간 사람은 이런 면에서 핸디캡이 있을 수밖에 없다. 같은 말을 하더라도 단어 하나 혹은 말의 뉘앙스나 전체적인 톤에 따라서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속마음을 읽어내는 면에서, 영어를 원어민처럼 하지 못하는 이민자로서는 답답할 수밖에 없다. 가볍게 농담처럼 던지는 말에도 뼈가 숨어있고, 매우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다른 사람들 보는 눈이 있어서 그런 것이고 실제로는 그렇게 깊은 뜻이 있지 않을 수도 있다. 한국에서는 눈치라고 부르는 이것을 언어의 장애로 인해서 제대로 잘 이해하지 못해서 헛발질하는 때도 있다. 이런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언어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느는 것도 아니고, 미국이라는 나라의 문화도 와서 몇 년 살아본다고 바로 체득이 되지도 않는다. 언어도 그렇고 문화도 그렇고 미국에 오기 전부터, 그리고 오고 나서도 긴장을 늦추지 말고 의식적으로 공부하고 노력해서 그 핸디캡을 조금이라고 줄이려고 노력을 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을 것이다.
윗사람과의 관계만큼이나 부하 직원들과의 관계에서도 이런 핸디캡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 영어로 대화하더라도 그쪽도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해외의 직원들을 관리하는 처지라면 그나마 좀 낫다. 물론 이 경우에 둘 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니 의사소통이 좀 답답해지는 불편함은 있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문서나 이메일, 채팅 등 다른 대안을 통해서 서로의 의사를 더 정확하게 이해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하지만 미국인 부하 직원을 관리할 때는, 아무래도 그 친구가 하는 이야기의 뉘앙스를 이해하는 것이 미국인 매니저에 비해서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일반적인 업무 이야기라면 크게 문제가 될 것이 없다. 대화 말고도 다양한 수단을 통해서 업무를 협의하면서 보충해 나가면 된다. 업무 평가나 회사에서의 경력 관리, 다른 부서나 직원들과의 갈등 상황 등 보다 섬세한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한 상황이 어렵다. 아무래도 알고 있거나 사용하는 단어의 수준에 제한이 있다 보니, 내가 의도한 것과는 다르게 좀 거칠게 표현이 되는 때도 있다. 상황이 복잡하고 전달해야 하는 메시지가 조심스러울수록 답답함이 더해진다.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도 원론적일 수 밖에 없다. 꾸준히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향상할 수 있도록 노력을 해야한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문제가 있는 상황에서 유용한 단어나 표현 모음, 직원들 고과 평가할 때 쓸 수 있는 좋은 표현 모음 등 재미난 책들이 많이 있다. 그 책의 머리말을 읽어보면 이런 책들이 외국인을 위한 영어 공부 책이라는 이야기가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미국인들도 이런 상황에서 고민이 있을 것이고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정선된 표현을 모아놓은 책으로 보였는데, 그렇게 생각하니 좀 위안이 되기도 했다. 상사나 부하 직원들과의 원활하고 재치 있는 커뮤니케이션은 미국 사람들도 어려워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