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회사에서의 직장생활
요새는 많이 바뀌고 있다고 하지만 아직도 한국에서는 신입으로 입사해서 연차가 되면 대리가 되고 과장이 되고, 웬만큼 회사에서 인정받으면 차장, 부장까지는 무난히 올라가는 것 같다. 이사 이상의 임원이 된다는 것은 좀 다른 이야기가 되겠지만 그래도 회사에 충성을 다하면서 신뢰를 얻으면 어느 정도의 연차에서는 어느 정도의 직급으로 자연히 올라가게 된다. 한국에 들어와 있는 미국 회사는, 그 회사의 한국 지사의 규정이나 문화에 따라서 다르기는 하겠지만 미국식 직급과 한국식 호칭을 둘 다 관리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어떤 회사는 미국처럼 영어 이름을 부르면서 좀 더 수평적인 분위기를 만드는 곳도 있지만 그 경우에도 한국식 직급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같은 회사 사람들끼리만 일하는 것이 아니고 고객이나 파트너 회사와도 업무를 해야 하는데, 그 사람들에게도 우리 회사 직원의 영어 이름을 부르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국 지사에 처음 입사하면 가장 기본적인 타이틀을 받게 된다. 엔지니어라면 Field Engineer, Customer Engineer, Controls & Calibration Engineer 등등이 될 수도 있고 프로젝트 관리 쪽이라면 Project Manager, 영업이라면 Account Manager, 회계라면 Accountant, 인사부서라면 HR Business Partner 등 맡은 업무가 본인의 직함이 되는 것이다. 미국 본사 기준으로 가장 기본적인 직급에서 시니어가 붙는 직급 사이가, 한국 지사에서는 신입 사원에서 대략 부장 정도까지로 한국 직급이 연결된다. 그리고 내가 본 많은 외국인 회사의 한국 지사에서는 이사라는 직함까지도 이 안의 범위에 들어가게 된다.
일반 직원에서 시니어 명칭을 단 직원이 되기까지 몇 년 안 걸릴 수도 있고 20년이 넘게 그냥 일반 직원으로 머무를 수도 있는 것이 미국 본사의 직급 체계이다. 본인이 맡은 업무에서 승진 기준에 맞는 업무 역량과 비즈니스 성과를 보여주면 승진하고 그렇지 못하면 계속 그 자리에 머무르게 된다. 내가 지금 다니는 회사의 프로젝트 관리 조직은 그중에서도 좀 심한 경우인데, 모든 프로젝트 매니저는 다 똑같이 Project Manager이다. 다른 회사들처럼 주니어를 구별하기 위해서 어쏘시에이트(Associate)를 붙이지도 않고, 시니어를 구별하기 위해서 별도로 Senior라는 수식어를 붙이지도 않는다. 그다음 단계는 디렉터(Director) 급이 되는데 여기서부터는 임원이 된다. 즉, 평사원이냐 임원이냐 이렇게 딱 두 단계만 있는 것이다. 한국 문화에서는 20년간 같은 직급에 머무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므로, 평사원에서 몇 년 지나면 대리, 과장, 차장 이렇게 미국 본사 타이틀과 상관없이 직급을 올려주는 경우가 많다. 물론 본사 직급이 올라가면 당연히 부장, 이사 등으로 올려준다.
본사에서도 임원으로 쳐주는 디렉터 급이 되면, 한국 지사의 규모가 작다면 지사장이고, 지사의 규모가 크다면 상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이렇게 위로 갈수록 한국 타이틀이 꼬이기 시작하는데, 디렉터 급의 한국 지사장이 명함에 한국 타이틀을 지사장 혹은 사장이라고 하다가, 본사 타이틀이 시니어 디렉터로 승진한다고 회장님이라고 부를 수는 없어서 그렇다. 반면에 규모가 매우 큰 한국 지사의 경우에는 본사 부사장(VP)급의 임원도 한국에서 똑같이 부사장이라고 부르는 예도 있다. 물론 같은 본사 부사장급의 임원이 한국 지사의 책임자라면 그 사람은 사장이 된다. 따라서 한국에 들어와 있는 외국인 회사에서 일할 때는 한국 타이틀은 큰 의미가 없고 본사 타이틀이 무엇이냐가 나중에 미국에 들어와서도 결국 그 타이틀을 갖고 오게 되므로 더 중요하다고 하겠다.
미국 회사가 직급 체계가 간단하기는 하지만, 같은 시니어 엔지니어라고 해도 입사한 지 몇 년 안 된 사람과 20년 동안 근무한 사람이 같은 월급을 받지는 않는다. 외부에 공개되는 직급과는 별개로 회사 내부적으로 각 직원의 등급을 책정해서 관리하는데 이는 주로 내부 회계 관리에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서 대학교 졸업하고 갓 입사한 엔지니어가 E1급이라면 경력이 좀 있거나 석사/박사 학위를 갖고 들어오면 E2 정도가 되고, 거기서부터 경력이 쌓이고 월급이 조금씩 오르면서 E3, E4, E5 이렇게 등급이 올라간다. 이런 등급마다 그 경력에 적절한 수준의 월급 한도가 정해지는데, 단일 숫자가 아니고 최소치와 최대치를 갖는 범위가 된다. 회사에서 비용 산정을 할 때 모든 직원 개개인에 맞춰서 실제로 지출되는 비용을 더하기가 힘드니, 범위를 정해서 그 등급의 직원들에 대한 비용을 대략, 이 정도라고 하고, 그런 직원들이 업무에 할당이 되면 미리 책정된 비용 모델을 적용해서 수익 계산을 하는 등의 용도를 갖고 있다.
같은 E5라도 사는 지역에 따라서 연봉의 범위가 달라진다. 한국에서 그 정도 경력을 가진 엔지니어들의 업계 평균 연봉과 미국에서 그 정도 경력자의 연봉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는 지사가 들어와 있는 나라마다 물가와 생활비가 달라서 그렇게 되는데, 해외 지사는 물론이고 미국 내에서도 어느 주에서 일하느냐에 따라서 그 주의 집값이나 세금 등을 고려해서 차별을 두고 있는 회사도 많다. 따라서 한국에서 같은 직급으로 미국의 캘리포니아로 이주하면 추가로 드는 비용을 계산해서 적절한 연봉 인상을 받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미국에서 일하는 것이 꿈이었는데 그 꿈이 이루어지는 것만으로도 황송하다거나, 혹은 한국에서 미국으로의 이주 및 각종 법무/세무 처리 비용이 엄청나게 들어가니 연봉은 조금만 올려줘도 괜찮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미국에 와서도 한국과 비슷한 수준의 생활이 가능할 정도의 월급을 받지 못하면 이민 생활이 생각보다 열악해질 수도 있다. 이민을 처음에 오는 것은 한 번이지만 그 후로는 계속 월급을 받으면서 그에 맞는 수준으로 생활해야 하니 신중하게 협상할 필요가 있다.
한국에서도 임원 승진이 어렵지만 그런 부분은 미국에서도 비슷하다. 평사원에서 시니어 타이틀을 달기까지는 그렇게 어렵지 않다. 하지만 시니어에서 디렉터로 승진하는 것은 대부분 회사에서 매우 엄격한 잣대를 갖고 그 사람의 업무 능력이나 여태까지 이루어낸 성과를 평가하고, 내부적으로 많은 후보를 놓고 각 후보의 매니저들이 치열한 격론을 벌여서 그중에 선택된 소수의 사람을 승진시키는 경우가 많다. 디렉터부터 임원이라고 하는 것은, 맡게 되는 업무의 크기가 커지고, 결정할 수 있는 일의 양과 범위가 늘어나기도 하지만, 다른 면에서 보면 회사의 오버헤드, 즉 경비 부담이 늘어난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개발 업무가 됐던 프로젝트 관리가 됐던 원래 하던 실무보다는 관리와 전략 쪽에 더 신경을 쓰게 되는데, 물론 그런 일도 중요하기는 하지만 직접적으로 회사의 매출에 이바지하는 업무에서는 한 발짝 멀어지게 된다.
경쟁이라는 면에서 보면 한국에서 디렉터를 달고 미국에 오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미국에 시니어 엔지니어나 시니어 매니저로 와서 여기서 임원으로 승진하려면, 온 가족의 이민이라는 아주 큰 삶의 변곡선을 무사히 잘 넘기면서 본인도 새로운 업무 환경에 적응하고, 그러면서 동시에 승진에 필요한 업무 성과까지를 보여주어야 하는데, 이게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인이 친숙하고 결과를 내기가 수월한 한국 지사에서 디렉터 타이틀까지 달고 미국에 들어올 수 있으면 좋다. 물론 그러면 나이가 꽤 들어서 미국에 들어오게 된다는 단점이 있다. 평사원에서 과장, 차장, 부장 정도까지 해서 시니어 타이틀을 다는데도 시간이 꽤 걸리고, 거기서 더 인정받아서 디렉터로 승진을 하는 것은 실력과 운이 동시에 필요한 일이다. 내 경우엔 15년이 걸렸다. 남들에 비해서 빠르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그렇다고 엄청나게 오래 걸렸다고 보기도 힘든 기간이다.
반면에 기회가 얼마냐 많으냐는 면에서는 미국이 훨씬 유리하다. 디렉터부터 임원이라고는 하지만 미국 본사에 오면 개나 소나 다 디렉터인 것을 보고 나는 여태까지 한국 지사에서 뭐 하고 있나 하는 자괴감이 들 정도이다. 미국에서는 직원 면접을 볼 때 나이를 묻지 않는다. 물론 그 사람의 이력서를 보면 대충 나오지만, 그 사람이 경력이 20년이 넘어도 우리가 보기에 시니어 매니저 정도의 경력이라면 그렇게 일자리를 제안하고, 경력이 10년밖에 안 돼도 우리가 딱 필요한 임원 포지션에서 필요한 경력을 쌓은 사람이라면 디렉터로 뽑을 수도 있다. 아무래도 결정권자들이 미국 본사에 모여있고,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미국에서 임원 승진이 많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가능한 한 최대한 빨리 미국에 들어와서, 여기서 빨리 적응하고 본인의 실력을 증명하는 것이 임원 승진 확률이 높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물론 미국에 오는 시기가 마음대로 정해지는 것도 아니고, 내가 가본 길도 아니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일 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같은 회사 내부에서 승진하는 방법보다는 이직하면서 직급이 올라가는 길이 더 쉽다. 회사에서 더 높은 직급으로 올라가려면, 여태까지 하던 분야에서 더 좋은 성과를 내야 하고, 그 와중에도 다른 사람들과 경쟁도 치열하니 꽤 좁은 문이 된다. 반면에 이직을 할 때는, 이미 내가 원하는 직급에 지원하는 것이니, 인터뷰 과정만 통과한다면 바로 그 직급으로 업무를 시작하게 된다. 물론 임원급의 직원을 새로 뽑는 과정은 만만치 않지만, 내가 쌓아온 경력이 그 회사에서 원하는 임원 포지션과 맞고, 인터뷰를 담당하는 소수의 담당자에게 본인의 실력을 잘 어필하는 것은, 쭉 다니던 회사에서 승진하는 것보다 오히려 더 쉬울 수도 있다. 그게 꼭 맞는 방식이라고 보기는 힘들지만, 그래서 미국 사람들 가운데는 이 회사 저 회사를 옮겨 다니면서 매우 이른 시간 안에 높은 자리에까지 오르는 사람들도 있다.
일단 어떻게 해서든 디렉터까지 올라갔다면, 그 앞에 시니어를 달아서 시니어 디렉터가 되는 것은, 뭐 아주 만만한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예전 평사원에서 앞에 시니어 수식어를 다는 것처럼, 맡은 업무에서 괜찮은 성과를 보여주고 경력이 쌓이면 올라갈 수 있는 포지션이다. 다만,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도 위로 올라갈수록 어느 수준 이상의 정치적인 감각이 필요하다. 실력이나 업무 성과는 기본이다. 그 기본이 갖추어진 상태에서 다른 디렉터들과 경쟁해야 하는 것이다. 윗사람한테 아부하거나 실적으로 장난을 치거나 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미국에서는 그런 것이 잘 통하지도 않지만, 혹시라도 그런 분위기의 회사라면 빨리 다른 곳을 알아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여기서 정치적인 감각이란, 회사에서 원하는 그리고 내 보스가 원하는 방향을 빨리 알아채서 그것에 맞게 일을 하는 것을 말한다. 자기 의견을 내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고개 숙이고 시킨 일만 하는 사람은 리더십이 없다고 보고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경우가 많다. 회사가 보지 못하는 혹은 보스가 놓친 부분을 지적하고 필요하면 꽤 강하게 자기주장도 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다양한 의견이 모여서 가장 좋은 의견이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일단 방향이 정해지면 찍소리 없이 그 방향으로 전력투구해야 한다. 뒤에서 다른 소리를 하는 것은, 내가 만난 모든 상사가 가장 싫어하는 행동이었다. 어느 정도까지 생산적으로 의견을 개진한 후에는, 보스와 한 팀으로 최대한 보스가 원하는 방향으로 일이 될 수 있도록 열심히 해서, 자기 보스가 승진하면 자기도 같이 올라가는 방식이다.
시니어 디렉터 다음 단계의 승진, 즉 부사장 타이틀을 다는 것은 그 회사의 핵심적인 결정을 하는 위치에 올랐다는 것으로 일반 직원이 현실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위치가 된다. 물론 회사의 규모에 따라서 그 위에 Senior VP도 있고 Executive VP도 있고, 가장 위에는 CEO도 있지만, 확률적으로 생각해보면 VP까지가 더 현실적인 목표가 될 것이다. 디렉터나 시니어 디렉터까지는 그래도 여전히 실무에 깊숙이 관여하고, 회사의 상황이나 본인의 업무에 따라서 매우 작은 조직을 관리하거나 심지어 혼자서 일하면서도 올라갈 수 있는 위치이다.
하지만 부사장 직급부터는 거의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어느 정도 규모의 조직을 맡아서 운영하게 되고, 꽤 막중한 권한과 함께 그에 상응하는 책임도 져야 하는 자리이다. 여기서부터는 실무보다는 전략을 짜고 조직을 관리하는 일이 중요하게 된다. 외부의 고객과 대화할 때도, 실무 이야기보다는 회사를 대표해서 전체적인 비즈니스의 방향이나 파트너십을 조율하는 위치이다. 내가 여태까지 다녔던 미국 회사들 가운데 유일하게 한국인 출신의 부사장이 있었는데 국내 대기업 출신으로 바로 부사장으로 스카우트가 된 경우이고 미국에서 공부한 교포 출신이었다. 미국 회사의 한국 지사에서 토종 한국인으로 일하다가 미국 본사로 들어와서 부사장까지 올라간 경우는 아직 보지 못했다. 직급이 그 사람의 성공과 행복을 보장한다고 보지는 않지만, 미국 회사에서 부사장이라는 자리는 매우 의미 있는 성취임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