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회사에서의 직장생활
미국 회사에서 맡게 될 업무는 회사에 따라서 그리고 본인의 업무 분야에 따라서 다르게 마련이다. 한국 지사에서 일하면서 평소에 관심을 두고 미국 본사의 업무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국과 교류가 많은 업무라면 그런 정보를 접할 기회가 많겠지만 한국의 개발팀에서 독자적인 업무를 맡아서 하는 엔지니어라면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본사 돌아가는 사정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회사의 문화와도 관련이 있는데, 어떤 회사는 관련 업무에 직접적으로 할당된 사람들만 볼 수 있도록 정보를 막아놓는가 하면, 어떤 회사는 보안이 필요한 특정 프로젝트가 아닌 이상 회사의 직원이라면 모두 접근할 수 있도록 정보를 공개해놓은 곳도 있다.
본인이 하는 일에 여유가 있어서 미국 본사의 다른 프로젝트의 기술적인 부분까지 챙겨볼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엔지니어들이 자투리 시간에 자율적으로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것을 장려하거나 허용하는 회사라면 그쪽 업무를 보면서 관련 기술 문서나 혹은 소프트웨어에 논평을 달거나 어떤 식으로든 조금씩이라도 기여를 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그쪽에서 얼마나 자주 회의하고, 어떤 식으로 업무 협의가 되고, 업무 할당이 이루어지는지를 간접적으로라도 볼 수 있으면 도움이 될 것이다. 애자일(Agile) 개발 방법론을 따르는 회사라면 예를 들어서 데일리 스크럼(Scrum) 미팅 같은 곳에까지 참여는 못 해도, 프로젝트의 업무 할당이나 각종 문서 등을 보면 대충 어떤 식으로 개발이 이루어지고 업무가 할당되는지 분위기 파악은 가능할 것이다.
기술 관련 업무라고 해도 미국 본사에 와서도 여러 가지 분야의 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선 영업을 지원해 주는 필드 엔지니어들이 있다. 우리 회사의 제품에 대한 높은 이해를 바탕으로 영업팀에서 고객과 미팅할 때 함께 들어가서 기술적인 설명도 해 주고 제품 시연도 해 준다. 때로는 고객이 보고 싶어 하는 시나리오에 맞춰서 응용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하니 약간의 개발 업무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크게 봐서 필드 (애플리케이션) 엔지니어들은 영업 지원이 주목적인 조직이며 소속도 영업팀 안에 있을 확률이 높다. 그리고 고객과의 대면 업무나 외부 발표 등 바깥 활동이 많은 자리라서, 한국에서 일하던 사람이 본사로 가서 하기에는 쉽지 않은 업무라고 볼 수 있다.
한국 지사에 혹시 필드 엔지니어 중에서도 영업 지원이 아니고 고객 지원이 주 업무인 전담팀이 있을 수 있다. 필드 기술 지원 팀이라고 해서, 이미 우리 회사 제품을 사서 쓰고 있는 고객들이 제품 사용에 문제가 발생하면 기술 지원을 주로 제공해주는 팀이다. 한국에서 같은 시간대에,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기술 지원 엔지니어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회사에서는 이런 조직을 운영할 수 있다. 이런 팀이 한국에 있다면 고객사를 방문해서 직접 장비를 보거나 문제가 되는 소프트웨어를 고객사 담당 엔지니어와 함께 보면서 문제를 해결하는 업무를 할 것이다. 이렇게 한국 지사의 기술 지원 조직에서 일하고 있다면, 본사의 기술 지원 조직으로 옮기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본사의 기술 지원 조직은 고객사 방문이 필요 없이 원격으로 지원 업무만 맡게 된다. 전화 통화를 하는 경우가 없다고는 못해도, 대부분의 일이 이메일이나 온라인상의 기술 지원 시스템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다. 이런 일은 한국에 있던 엔지니어가 미국에 간다고 해도, 맡은 고객이 한국의 고객들이라면 당장 간 첫날부터 별문제 없이 잘 처리가 가능한 종류의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메일을 통한 기술 지원이 주 업무라면, 본사에 가서 한국만이 아니라 전세계의 고객들을 지원하는 업무도 충분히 가능하다.
다른 기술 지원 업무로는 프로페셔널 서비스가 있다. 이건 회사마다 부르는 이름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하는 일은 비슷하다. 고객의 요구 사항에 맞춰서 소프트웨어나 하드웨어를 개발해 주고 그에 대한 개발비를 받는다. 필드 애플리케이션 엔지니어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고객과의 커뮤니케이션이 꽤 필요한 업무이다. 경력이 짧은 주니어 엔지니어라서 위에서 시킨 일만 하는 경우라면 몰라도, 어느 정도의 경력이 된 엔지니어라면, 고객이 원하는 것을 이해하고 우리의 기술력을 설명하기 위한 업무 협의 미팅에서부터, 요구 사항을 받고, 추가로 질문을 하고, 개발에 필요한 노력과 시간을 산정하고 제안서에 들어갈 기술적인 사항들을 정리해주는 것까지, 다양한 형태로 영업팀과 협업을 하게 된다. 우리가 제출한 프로젝트 제안서가 채택돼서 실제 프로젝트가 진행되면, 담당 프로젝트 매니저의 지휘 하에 개발 업무가 시작된다. 전통적인 방식의 개발이냐 애자일 방식이냐에 따라서 회의 주기나 업무 보고 방식이 바뀌긴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고객사와의 주기적인 프로젝트 상태 보고 및 기술 협의 회의가 있으므로, 꽤 높은 수준의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필요한 업무이다.
마지막으로는 제품 (혹은 서비스) 개발 엔지니어링 팀이 있다. 우리가 흔히 본사 개발팀이라고 하면 이 조직을 말한다. 대부분의 IT 관련 기술회사에서 회사의 가장 핵심적인 역량을 가지고 있는 팀이다. 엔지니어링 담당 부사장이 이끄는 경우가 많으며, 그 밑에 개발 분야별로 디렉터(Director) 급 임원들이 있다. 조직의 구성이나 개발 스타일은 회사별로 천차만별이지만 하는 일은 크게 봐서는 다를 것이 없다. 마케팅이나 영업팀에서 들어온 피드백을 바탕으로 시장을 분석하고 이에 맞게 제품이나 서비스 개발 계획이 수립이 된다.
소프트웨어 제품의 경우에는 짧게는 분기별로 제품 업데이트가 되는 곳도 있고, 반년이나 일 년에 한 번씩 제품의 주요 업데이트를 제공하는 때도 있다. 하드웨어 제품도, 간단한 선행 모델 개발이나 기존 제품의 업데이트라면 몇 달짜리 개발 업무도 있을 것이고, 좀 대형 프로젝트의 경우엔 몇 년 후에 제품 출시를 목표로 개발하는 일도 있다. 방위산업이나 항공 우주 분야는 한번 개발을 시작하면 10년짜리 프로젝트도 있고, 그런 거 두 개나 세 개 정도 하면 은퇴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니 참으로 다양한 사이클이 있다고 하겠다.
한국에서 일하던 미국에서 일하던 이런 종류의 개발 업무는 기술력이 가장 중요한 척도이므로 미국 진출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물론 개발 엔지니어라고 해서 회의가 없지는 않다. 애자일 개발 방법론을 채택하는 회사의 경우, 스크럼 팀 내부에서 매일 아침에 짧게 만나서 그날그날의 업무를 의논하는 데일리 스탠드업 회의에서부터 스프린트 플래닝(Sprint Planning), 스프린트 리뷰(Sprint Review) 등 이런저런 미팅이 꽤 자주 있는 편이다. 그리고 그런 회의에서 꿀 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있을 수 없으니 어느 정도의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필요하지만, 앞에서 예를 든 다른 엔지니어들처럼 고객과 상대하는 일에 비해서는 내부 회의라서 부담이 좀 덜하다.
내 경우엔 엔지니어가 아니고 매니저로 왔고, 원래 한국에서 하던 일을 들고 미국에 오게 된 것이라서 처음에 적응하는 것이 그나마 순조로웠다. 한국 지사에서 일하다가 미국 본사로 들어오게 될 때는 아마 이렇게 자기가 원래 한국에서 하던 일을 갖고 오면서 추가적인 업무를 맡는 경우가 많을 것으로 짐작한다. 한국에 지사가 들어와 있다는 것은 한국을 중요한 시장으로 생각하는 회사라는 뜻이다. 그런 회사에서 한국말이나 한국의 문화를 이해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당연하게도 한국 시장을 지원할 가장 좋은 조건이 되고 따라서 미국에 불러와서도 관련 업무를 시키는 것이 회사로서는 효과적인 자원의 배분이 된다. 한국 시장이 매우 커서 전담 인력이 필요한 상황이라면 아마도 한국 지사 및 고객 지원이 업무 대부분이 될 것이다. 이 경우에는 이른 시간 안에 본인의 자리를 잡고 성과를 내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한국에서 일하는 것보다, 미국에 들어와서 한국 업무를 지원하면서 본사의 다른 팀과 원활하게 협조를 끌어내는 모습을 보여주면, 큰 비용을 들여서 나를 미국까지 데려온 것이 잘한 일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한국 시장이 전담 지원이 필요할 정도로 크지 않거나 혹은 본인이 미국에 오면서 맡은 업무가 더 커지면 조금 신경을 써야 할 부분이 있다. 예를 들어서 처음에는 한국 관련 업무만 하다가 능력을 인정받아서 아시아 지역 전체의 지원을 맡았다면 그래도 좀 부담이 덜하다. 일본이 아시아 지역에 들어가기도 하고 별도의 지역으로 분류하는 회사도 있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의 문화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높은 편이다. 중국의 경우에는 땅덩어리도 워낙 크고, 중국 특유의 비즈니스 스타일이 좀 다를 수는 있겠지만, 그래서 중국 지사가 있어서 문제 대부분은 해결하고, 본사의 도움이 필요한 부분만 요청할 테니, 같은 아시아 사람으로서 통하는 부분을 바탕으로 잘 지원해 주면 된다. 인도의 경우에는 중국 못지않은 거대한 나라에 다양한 종교와 언어가 있는 곳이고,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에게 그리 친숙한 나라가 아니라서 좀 적응이 필요한데, 영어로 커뮤니케이션할 때 특유의 악센트가 있는 데다 영어를 공용어로 쓰니 말도 많아서 어려움이 있을 때도 있지만, 역시 같은 아시아권의 일원이라 그런지 나중에는 서로 말이 잘 통하는 편이다.
나는 미국 본사로 발령받은 이후에 폴란드와 루마니아에 있는 개발팀을 맡았었는데, 워낙 낯선 문화라서 적응하는데 좀 고생했었다. 주로 이메일로 커뮤니케이션하고, 가끔 전화로 회의만 한다면 크게 문제가 될 것이 없다. 하지만 그쪽 팀의 팀장들이 나한테 보고하고 업무를 지시받다 보니, 유럽 내부에서 자기들끼리의 역할이나 업무 분담, 미국 본사의 개발팀과의 협업 문제 등을 조율하는 일에서부터 연봉 협상과 스톡옵션, 업무 평가 및 승진 문제까지 매니저로서 관여해야 하니, 다른 많은 일들이 그렇듯이 업무 지침만으로는 답이 없는 문제들이 생기고 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내 방식만 고집하기보다는 그쪽 사람들의 처지를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내 경우에는 그 과정이 특히나 조심스러웠던 것이, 내가 한국 출신이고 한국 개발팀을 이끌다가 본사로 왔으니, 아무래도 자기들 보다는 한국팀을 더 챙겨줄 거 아니냐는 시각이 있을 수밖에 없어서였다. 객관적으로 봐서도 한국 쪽 개발팀이 더 잘할 수 있는 업무라서 일을 그쪽에 주더라도 내가 그쪽 출신이라서 한국팀을 더 편애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니, 업무를 배분할 때는 그런 정치적인 그리고 감정적인 부분까지도 고려해야 했었다.
그 회사를 떠나서 다니고 있는 지금 회사에서는 해외 업무보다는 미국 국내 프로젝트를 맡아서 일한다. 당연히 상대하는 고객사도 미국 회사이고 나랑 같이 일하는 우리 회사 직원들도 미국 본사 직원들이다. 물론 미국 본사 직원들도 온갖 나라 출신들이 모여있지만, 원래 출신 국가와 상관없이 소속은 미국이니 미국 직원이다. 일단 다행인 점은, 개발 업무라는 것은 미국이든 한국이든 유럽이든 큰 틀에서 볼 때 비슷한 과정을 따라서 흘러가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프로젝트 계획을 세우고, 비용과 일정을 예측하고, 사람과 장비를 투입해서 제품을 개발하는데 분명히 그 과정에서 생각지 못한 문제들이 발생하고, 비용이 더 들어가고 일정이 지연되는 문제가 생기게 마련이다. 이런 것들을 제때 관리하고 대책을 세워서 프로젝트를 성공리에 마무리면 되는 것이고, 이런 일들을 잘 처리하면 유능한 매니저이고, 사사건건 문제가 생기고, 고객사에서 불평불만이 들리고, 비용과 일정은 계속 늘어나는데 프로젝트는 언제 끝나게 될지 모르고, 이러면 무능한 매니저가 되는 것이다. 어려운 점은, 이런 모든 업무를 제대로 해 내려면 꽤 높은 수준의 커뮤니케이션과 업무 조율 능력, 심지어 정치적이면서 영업적인 감각이 필요하고, 이 모든 것들이 미국에서 미국 스타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프로젝트 매니저도 한국 사람이 미국에 와서 바로 잘하기에는 쉽지 않은 업무라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