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일한다는 것의 의미
젊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처럼, 이왕이면 한 살이라도 젊을 때 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가끔 출장을 와서 보는 미국과 직접 사는 미국은 매우 다르다.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사람들의 여유로운 태도는 물론 그대로일 것이다. 하지만 호텔에 묵으면서 렌터카를 타고 출퇴근하다가 식당에서 밥을 먹고 주말에 아웃렛 들려서 귀국 선물을 사서 돌아가는 출장이, 예를 들어 횟집에 앉아서 광어회를 시켜서 맛있게 먹고 가는 경험이라면, 미국에서 살면서 일을 한다는 것은,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서 광어를 잡아서 직접 회를 쳐서 먹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것이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사람들은 나이를 먹을수록 변화에 적응하는 것을 힘들어한다. 몸에 익은 편한 것이 좋고, 낯설고 새로운 것은 불편하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매년 나오는 새로운 가요를 따라가는 것이 점점 힘들어졌고, 아주 유명한 노래가 아니면 잘 듣지 않거나, 젊은 가수들의 리메이크만 듣게 되었다. 미국에 오고 나서는 증세가 더 심해져서 이제는 그냥 추억의 인가가요에 정착했다. 가사도 잘 들리고, 감정이입도 잘 되고, 잘 아는 멜로디라 따라 부르다 보면 기분도 전환된다. BTS가 잘 나가는 것을 보면 대견하고 자랑스럽지만 내 취향의 음악은 아니다.
음악 취향이야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지만 미국 생활은 그렇지 않다. 미국에 와서 살다 보면 하루하루가 드라마의 연속이다. 처음에 와서는 마주치는 모든 것이 새로웠다. 2017년 1월 13일에 LA 공항에 도착했으니 미국에서 5년을 넘게 살고 있는데, 여전히 낯설고 새로운 일들이 끊이지 않는다. 미국에 왔으니 영어를 써야 하는데 이놈의 영어가 한국에서 쓰던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살 집을 구해야 하는데 미국에는 전세도 없고 신용도를 보여주는 점수가 없으면 월세를 구하는 것도 쉽지 않다. 아이 학교를 보내야 하는데, 정부에서 정해서 알려주는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내가 마음에 드는 학교를 찾아가서 상담하고 몇 학년으로 들어갈지 협상해야 한다. 의료 보험이 월급에 따라 나라에서 정해준 금액을 내는 것이 아니고 내가 수십 가지 옵션을 정해야 하고 그에 따라서 내는 금액이 달라진다. 아파서 병원에 갈 때도 아무 데나 막 가면 안 되고 내 보험이 되는 병원에 찾아가야 하고, 바로 전문의를 쉽게 만나는 것도 아니다. 관공서 일 처리가 온라인으로 되는 것은 아주 드물고, 직접 찾아가거나 편지로 왔다 갔다 하는데, 몇 주면 일 처리가 정말 빠른 경우고, 몇 달씩 걸리는 경우도 많다.
미국 발령이 확정되고 나서 가족회의를 통해서 그 사실을 통보했다. 중학교 3학년이던 아들 녀석이 크게 충격을 받았나 보다. 자기는 가지 않고 한국에 남겠단다. 친구들도 다 한국에 있고, 영어도 잘 못 하는데 자기가 어떻게 미국에 가서 살겠냐고 하면서, 서울역에서 노숙하는 한이 있더라도 자기는 안 가겠다는 것이다. 참 웃기지도 않았다. 한국에 친가와 외가 친척들이 그렇게 많으니 그럴 일도 없을 것이고, 또 노숙 장소를 (TV 드라마 같은 곳에서 봤을 듯한) 서울역으로 지정을 한 것 등의 정황으로 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인생의 변화에 놀라서 본능적으로 거부를 한 것이지 뭔가 깊은 성찰의 결과로 보이지는 않았다. 미국에 오기 전까지 몇 달에 걸쳐서 대화하고 설명해서 마음을 풀어주어야 했다.
좀 안타깝기는 했지만, 한국에서의 마지막 중학교 졸업식을 해보지 못하고 1월 초에 미국으로 들어왔어야 했다. 처음 두 달을 회사에서 얻어준 아파트에서 생활했는데, 처음으로 피자를 주문하는 전화를 하기 전에 한 30분 정도 온 가족이 모여 의논하고 각종 시나리오에 따라서 예행연습을 했었다. 그리고도 주문하는데 영 버벅거려서 그다음부터는 온라인으로만 주문했다. 온 지 며칠 후에 싱크대가 막혀서 관리사무소에 전화할 때도 싱크대가 막혔다는 말을 영어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에 따라서 상대방의 예상 답변은 무엇 무엇이 있을지 30분을 공부하고 나서 전화를 할 수 있었다. 월셋집을 보러 다니는데 무엇을 봐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조건은 어떻게 다른 지도 이해하지 못했다. 막상 마음에 들어서 신청하면, 여기는 월셋집도 무슨 경쟁 입찰처럼 오픈하우스를 해서 집을 보여주고,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집주인에게 신청하는 방식으로 되는데, 우리는 미국에서의 신용이 없어서 그런지 연락이 오지 않았다.
아마 초창기 미국 생활의 서러움의 하이라이트는 자동차 면허시험이었을 것이다. 미국의 DMV(Department of Motor Vehicles)는 자동차 등록이나 면허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곳인데, 직원들이 불친절하고 업무처리가 느리기로 악명이 높다. 어찌어찌해서 필기시험 통과하고 실기 시험 접수해서, 지정된 날 차를 갖고 시험장으로 갔다. 자동차 운전면허 실기 시험을 보는데, 보험이 들어있는 본인의 차량을 가지고 DVM를 찾아가서 시내 도로 주행 시험을 보는 희한한 방식이었다. 집사람과 같은 날 실기 시험을 접수해서, 우선 내가 먼저 떨리는 마음으로 실기 시험을 시작했다.
인터넷에서 검색한 대로 차선 변경할 때 사이드미러뿐 아니라 꼭 고개를 돌려서 확인하면서 얌전하게 운전하다가 적색 신호등이 들어온 첫 사거리를 만났다. 서행하면서 보니까 왼쪽에서 차가 오지 않길래 살살 우회전했더니 옆에 있던 시험관이 막 뭐라고 하면서 바로 탈락을 시키는 것이었다.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 적색 신호등에 우회전하는 것은 괜찮지만 반드시 완전 정지를 한 후에 안전을 확인하고 우회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울한 얼굴로 시험장으로 돌아왔는데, 그 이야기를 집사람한테 해 줄 겨를도 없이 차에서 내려서 바로 운전자를 바꾸고, 같은 시험관으로 바로 집사람의 주행 시험을 시작했다. 그리고 집사람도 내가 탈락한 바로 그 사거리에서 똑같은 이유로 탈락했다.
지금 생각하면 쓴웃음이 나는 정도의 에피소드지만 그 당시에는 그게 그렇게 서러웠다. 연수라도 한번 받았거나 좀 더 자세하게 인터넷을 검색했다면 그런 실수를 하지 않았을 테니 너무 안이하게 생각한 우리 잘못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20년 넘게 운전했고, 그 사이에 미국에 출장을 아무리 적게 잡아도 한 해에 한 번 이상은 왔으며, 요새는 렌터카를 쓰지 않고 우버도 많이 타지만 그 당시에는 미국 출장을 나오면 무조건 렌터카를 빌렸으니, 나름 미국에서도 운전을 꽤 했는데, 첫 면허시험에서 주행 시험 시작한 지 5분도 안 돼서 첫 사거리에서 탈락했다는 것이 매우 화가 났다. 속담에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되고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된다고 하는데, 이 경우에는 집사람도 똑같은 곳에서 떨어져서 서러움도 두 배였다. 그날 집에 운전해서 오면서 술을 한 병 사서, 집에서 집사람과 주거니 받거니 분노의 술판을 벌였던 것이 기억난다.
우리가 이러고 있는 동안 서울역에서 노숙하겠다던 아드님께서는, 한 달 정도 지나서 바로 집 근처의 고등학교로 등교를 시작했다. 미국의 학기제는 한국과 달라서 가을에 새 학기가 시작한다. 그러니 2월 말에 시작하는 것은 봄학기이고, 우리나라로 따지면 2학기에 편입을 하는 것이 된다. 이게 왜 문제가 되냐면, 한국에서 중학교를 졸업했으면 미국으로 따지면 9학년 2학기를 마친 것이 된다. 그런데 우리나라로 치면 고등학교 1학년인 10학년 1학기는 이미 지났고 2학기로 편입해야 하는 것이다. 아이가 영어가 익숙하지 않으니 9학년 2학기로 들어가면 안 되겠냐고 했더니, 한국에서 이미 9학년 2학기까지 마친 성적표가 있어서 미국 공립학교 규정상 같은 학기를 다시 다닐 수는 없고, 6개월을 건너뛰고 10학년 2학기부터 다니라고 하는 것이다. 물론 비싼 돈을 내고 사립학교를 보내면 뭐든 내가 원하는 대로 해 준다고 하는데 그럴 형편도 아니고 그렇게까지 할 이유도 느끼지 못해서 그냥 아들 녀석을 믿고 10학년 2학기부터 다니도록 했다. 물론 그 학교가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외국인 학생들을 위한 프로그램들이 잘 되어있어서 좀 수월하게 한 것도 있지만, 결국 아들 녀석은 그 후 다섯 학기 동안 거의 모든 과목을 A 학점을 받으면서 가뿐하게 우수한 성적으로 미국 유수의 공립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질풍노도의 사춘기는 어느 정도 지났지만, 여전히 말이 많은 녀석은 아니라 학교생활을 시시콜콜 다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짐작건대 녀석도 나름대로 애로가 많았을 것이다. 이민을 와서 주변 환경도 낯설고 영어도 익숙지 않은데 미국을 오자마자 한 달 정도 후에 바로 등교를 시작했으니 아마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처음에 학교 다니기 시작할 때 수업 내용을 어느 정도 알아듣겠냐고 했더니 절반 정도는 알아듣겠다고 했었다. 나중에 졸업할 무렵이 돼서 다시 물어보니 70% 정도는 알아듣겠다고 하던데, 물론 수학이나 과학 같은 과목은 쉬웠을 거고 역사나 경제 같은 수업은 더 어려웠을 것이다. 내가 숙제를 많이 도와주지도 못했는데도 거의 A 학점을 받아오는 것을 보면 대견하기도 했고, 여전히 주변의 만나는 친구들이 한국이나 일본 친구들이고, 결국 졸업할 때까지도 백인 친구들이 없었던 것을 보면 안쓰럽기도 했다.
이 녀석이 한국에 있을 때도 워낙 집돌이이고 게임을 좋아해서, 미국에 와서도 별로 외출을 많이 하지 않는 것이 크게 이상해 보이지는 않았다. 고등학교 다닐 때 아침에 학교 갔다가, 수업이 많지 않은 날은 점심 무렵이면 돌아오고, 수업이 많은 날도 3시 정도면 집에 들어왔다. 따로 학원에 다니거나 하지 않으니 집에 와서 숙제 좀 하고 나면 한가롭게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지냈다. 졸업하고 커뮤니티 칼리지에 가서 좀 생활의 반경이 넓어지나 했는데 중간에 코로나 사태로 집에서 원격 수업을 하는 바람에 다시 집돌이 생활로 원상 복귀했다. 그거야 인력으로 어쩔 수 없는 부분이지만, 혹시 녀석이 좀 더 어렸을 때 미국에 왔으면 좀 더 적극적으로 바깥에서 활동하고 미국 친구들도 사귀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미국에서는 대학에 지원할 때 학점만큼이나 여러 가지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많은 학생이 방과 후에도 운동이나 사회봉사 등 다양한 활동을 하는 것 같다. 한국에서 중학교 졸업하자마자 여기 10학년 2학기로 들어왔고 12학년에 졸업했던 우리는, 그런 사정에도 밝지 못했고 뭐 우리 식구의 성향이 또 그렇게 굳이 뭘 찾아서 돌아다니면서 하는 스타일도 아니라서 그냥 식구들끼리 몇 년간 복닥복닥 우리끼리만 잘 지냈었다. 아들 녀석 처지에서는 제대로 된 미국 생활을 한 건지 그냥 학교만 몇 년 다닌 건지 궁금할 때가 가끔 있다.
미국에 와서 살겠다는 생각이 있다면 가능한 한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오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아이들도 어려서 미국에 올수록 적응을 쉽게 빨리하는 것 같다. 주변에서 듣는 이야기가, 초등학생 때 미국에 이민을 오면 영어를 미국 사람처럼 할 수 있고, 중학교 때 오면 잘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억양이 생기게 마련이고, 고등학교 때 오면 절대 원어민 수준의 영어를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게 마련이지만 얼추 맞는 것 같다. 이건 어른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살아온 세월이 길고 이루어놓은 것이 많고 가진 것이 많을수록 낯선 환경에 적응하기가 더 힘든 것은 당연하다. 성인이 돼서 미국에 오면 누구나 힘들지만 그래도 젊을수록 도전 의식과 패기가 살아있다고 보면, 좀 불편하고 부끄럽고 자존심 상하는 일들도 웃어넘길 수 있는 여유가 있다. 가능하다면 일찍 오는 것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