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문화
그렇게 20년 동안 필드 엔지니어로서 일을 시작해서 영업을 포함한 다양한 포지션을 거치면서 출장도 자주 다니고 전화로 회의도 많이 하면서 영어를 곧잘 한다는 이야기는 계속 들었다. 몇 년간 아시아 담당 필드 엔지니어로 일한 덕분에, 순수하게 한국 업무만 맡았던 사람들보다는 영어로 일할 기회가 많은 것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서당 개도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는데, 같은 회사에서 20년 동안 일했으니 업무도 친숙하고, 매주, 매달, 매년 듣고 말해야 하는 영어의 양이 쌓였으니 그것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하루아침에 달라지지는 않겠지만, 알게 모르게 조금씩 알아듣는 표현도 늘고 사용하는 문장도 조금씩 세련되어진 것 같다. 물론 그 기간에도 미국 영화는 꾸준히 열심히 봤었고. 나중에 한국에서 합병한 개발 조직을 맡게 된 것도 내 영어가 큰 도움이 됐을 거라고 짐작한다. 물론 한국 지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일한 직원이라는 프리미엄도 있었겠지만, 본사의 엔지니어링 팀과 밀접하게 일을 조율해야 하는 자리이니 영어로 의사소통이 불편했더라면 절대 올라가지 못했을 자리이다.
그 일을 5년간 하다가 미국에 오게 되었다. 한국에서 하던 일에 비해서 업무의 내용이 근본적으로 바뀌지는 않았다. 내가 미국으로 오면서 원래 관리하던 한국 개발팀의 조직이 조금 바뀌게 되었고, 한국의 팀 외에도 유럽의 개발팀도 맡아서 관리하는 등 업무의 범위가 약간 커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소프트웨어 솔루션 개발을 관리하고, 제품 개발 담당자와 협의하고 영업을 지원하는 기존의 업무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미국 회사의 한국 지사에서 일하다가 본사에 주재원 형태로 들어와서 일할 때의 가장 큰 장점이 여기에 있다. 업무를 하던 환경이 한국에서 미국으로 바뀌기는 해도 하는 일 자체는 원래 하던 일을 계속할 때 아무래도 적응하기가 쉬워진다. 살 집을 구하는 일부터 아이 학교 문제나 세금 보고, 아팠을 때 병원에 가는 문제 그리고 하다못해 자동차가 고장이 났을 때 정비소 가는 일까지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한국과는 매우 다른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데, 일상생활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회사에서의 업무라는 부분은 그나마 익숙하게 원래 하던 일이라 다행이었다.
아침에 사무실에 출근해서 컴퓨터를 켜고 밤새 한국에서 들어온 이메일을 확인하고 우리말로 답장을 쓰고 있다 보면 한국에서 일하는 건지 미국에서 일하는 건지 잠시 잊을 때도 있었다. 차이를 느끼기 시작하는 것은 다른 직원들이 출근하고 그 친구들과 아침 인사를 하면서 시작된다. 미국 들어온 지 5년이 다 되어가는데, 참으로 간단한 문화지만 아직도 자연스럽게 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이 간단한 인사이다. 우리나라 영어 교과서에 아직도 상대방이 “How are you?”라고 물어보면 “I am fine, thank you and you?”라고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격식을 차리는 경우는 드물다. 미국에서 서로 마주치면 “How are you?”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How’s it going?” 이렇게 묻는 사람도 있다. 그러면 그냥 “Good, how are you?” 혹은 그냥 “Hey, what’s up?” 이렇게 간단하게 대답하면서 상대방의 안부를 물으면 된다. 이런 인사말은 실제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를 자세히 알고 싶어서 물어보는 것이 아니고, 그냥 “안녕?” 혹은 “좋은 하루” 뭐 이런 느낌이다. 그런데 아직도 누가 나한테 How’s it going? 혹은 What’s up? 이렇게 물어보면 왠지 내가 오늘 어떤 기분인지 혹은 내가 요새 뭐 하고 있는지 제대로 대답해 줘야 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한국에 있을 때 미국과의 회의는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내용을 갖고 원격으로 하게 된다. 한국의 아침이 미국의 오후 시간이 되므로, 양쪽이 업무 시간에 맞추어 회의를 잡고, 회의를 시작하면 간단히 인사말을 하긴 하지만 바로 업무 주제로 들어가게 마련이다. 반면에 미국 사무실에서는 아침에 출근해서 서로 얼굴을 마주치면 간단한 인사에서 날씨 문제, 간밤의 주요 뉴스나 혹은 나누고 싶은 일상의 이야기 등등 업무와 상관없는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많아진다. 혹시 회사가 빠르게 성장하는 중이라 새로운 사람들이 사무실에 자주 온다면 그 경우에 서로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고, 그 후에 한동안은 그 새로 온 사람과 좀 더 친해지려고 노력도 하게 된다.
한국에서 일할 때도 사람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었는데, 미국에 와서 아직도 잘 안 되는 것이 사람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다. 이건 회사에서 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그렇지만, 미국 사람들은 처음에 인사하게 되면 서로 이름을 알려준다. 그렇게 한번 인사를 나누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서로 이름을 부르면서 대화를 하는 것이다. 음식점에서 주문받는 웨이터도 우리 테이블에 와서 자기 이름을 이야기하고, 골프장에서 처음 만나서 같이 운동하게 된 사람도 자기 이름을 알려준다. 전화 상담원도 전화를 받으면 가장 먼저 자기 이름을 이야기하고 무엇을 도와줄 것인지 물어보고, 아이 학교에서 교감 선생님을 만나도 이름을 알려주고 나서 그 후의 대화는 서로 이름을 부르면서 하게 된다. 이렇게 들은 이름이 톰이나 제임스같이 흔한 이름이라면 그나마 다행이다. 미국의 문화에서는, 성은 매우 독특한데 이름은 거의 잘 알려진 흔한 이름을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주변에 톰이나 제임스가 너무 많아서 헷갈리기는 하지만 그건 곧 익숙해진다.
전형적인 미국 이름이 아닌 경우에는 좀 고생하게 된다. 다행히 한국에서 일할 때도 아시아의 다른 사무실 친구들과 일을 많이 했으므로 중국계나 인도계 이름은 쉽게 발음하고 기억도 잘하는 편이다. 유럽계 이름이 가장 힘들다. Michal은 마이클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미칼이라고 발음한다. Pieter도 살짝 헷갈리지만, 피터라고 발음하면 된다. Tomasz는 뒤에 sz 때문에 망설여지지만, 마지막 z는 무시하고 토마쉬 정도로 발음한다. Cesare (체사레)나 Desarae(더사레) 같은 이름은 글자는 읽을 수 있는데 도대체 어떻게 발음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만나서 인사를 할 때 잘 집중해서 들어야 한다. 전화로 회의할 때는 워낙 짧게 자기 이름을 말하고 지나가서 놓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러면 좀 민망하지만, 나중에라도 따로 어떻게 발음해야 하는지 물어봐야 한다. 남미계 이름도 어려울 때가 있는데 J 발음이 스페인어에서 H 발음으로 나는 것을 알면 실수를 덜 한다. San Jose (산 호세)나 La Jolla (라 호야) 같은 도시 이름처럼, Alejandro는 알레한드로이다. Jorge는 좀 더 어려운데 이 경우엔 마지막에 g도 h로 발음이 되므로 호르헤라고 부른다.
그렇게 아침에 만나서 인사를 나누고 통성명하는 고비를 지났다면 이제 또 다른 고비가 찾아온다. 점심 식사 시간이 그것이다. 가끔 미국에 출장을 와서도 본사 사람들이랑 밥을 먹을 때가 힘들었다. 미국의 식당에서 메뉴를 보면 정말 눈을 부릅뜨고 익숙한 메뉴를 찾거나 아니면 발음도 잘 안 되는 메뉴를 시켰다가 전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음식을 먹거나 하는 선택의 갈림길에 설 때가 자주 있었다. 하지만 출장을 와서 식사하고 술을 한잔하게 되면, 물론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대개 업무의 연장으로 결국은 회사 이야기로 돌아가게 된다. 그런데 미국 사무실에서 일하게 되면 업무 이야기는 원래 평소에 맨날 하니까, 점심을 같이 먹게 되면 다른 일상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뭐 그렇다고 깊숙한 가정사를 이야기하는 경우는 없고, 새로 산 차 이야기나 이사 간 집, 아이 학교나 휴가 계획 등 소소한 이야기를 나눈다. 문제는 그런 소소한 이야기에서 나오는 단어가 하나하나 정말 낯설다는 것이다.
바깥의 식당에 나가서 먹건 아니면 음식을 배달시켜서 사무실에 모여서 같이 먹건, 하여튼 미국 사람들은 말하는 것을 참 좋아한다. 눈이 마주치면 곱게 웃어주고 격조 높게 식사하면 참 좋으련만 어떻게든 말을 걸고 아무리 사소한 주제라도 세상 중요한 일처럼 한참을 이야기한다. 그런 대화에서 나오는 단어도 낯설지만, 미국에서 살아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이해가 가지 않는 문화적인 차이에서 오는 어려움도 많다. 한국에서는 대화하다가 현충일 무렵에 지방에 간다거나 개천절 무렵에 휴가를 낼 거라거나 하면 대충 언제인지 바로 알아듣는다. 그런데 여기서 Labor Day (노동절)에 가족 여행 계획이 있다거나 Memorial Day 때 결혼식을 한다고 이야기를 하면 바로 감이 오지 않고 그 자리에서 물어보거나 나중에 따로 찾아봐야 한다.
최근에 집을 팔고 새로운 집으로 이사 갔다는 이야기를 듣다 보면, 한국과는 전혀 다른 미국의 집을 사고파는 방식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왜 저렇게 흥분해서 이야기하고 왜 그 상황이 웃긴 건지 남들 다 웃을 때 헤매는 경우가 많다. 우리도 가끔 그런 경우가 있지만, 여기도 특히 아침에 회의할 때 전날 있었던 야구나 미식축구 이야기하면서 서로 자기가 응원하는 팀, 자기 고향 팀 혹은 자기가 다녔던 대학의 팀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 어느 팀이 어느 지역에 있고, 어느 팀과 어느 팀이 경쟁자 관계이고 이런 것을 전혀 모르는 나에게는 전부 외계어처럼 들릴 수밖에 없다.
미국은 거대한 나라이다. 대한민국이 10만 제곱킬로미터 정도의 면적을 갖고 있는데, 내가 사는 캘리포니아주만 해도 우리나라의 4배가 넘는 크기이다. 캘리포니아의 최남단에서 멕시코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샌디에이고에서 최북단으로 오리건주와의 경계에 있는 유레카라는 도시까지 743마일이 떨어져 있다. 1,200킬로미터 정도의 거리이다. 시속 100킬로미터로 한 번도 안 쉬고 달려도 12시간이 걸린다. 실제로 운전해 보면 중간에 좀 막히고 해서 그것보다는 더 걸린다. 처음에 미국에 와서 친해진 주변 사람들과 라스베이거스 여행을 갔는데 비행기를 타고 간 것은 우리 부부가 유일했다. 5시간도 안 걸리는 거리를 비행기를 타고 갔다고 사람들이 매우 신기해했다. 몇 달 전에 애리조나 투손으로 출장을 갈 일이 있었는데 공항 가서 기다렸다가 비행기 타고 하는 것이 귀찮아서 편도 5시간이 넘는 거리를 자동차로 다녀온 적이 있었다. 여름휴가 때 시애틀까지 몇천 킬로미터를 차로 운전하고 다니면서 미국의 자동차 문화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했다. 대중교통이 매우 불편한 미국에서 차는 사치품이나 선택사항이 아니다. 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필수의 교통수단이고 자기의 취향을 드러내는 표현 수단이기도 하다.
경험을 직접 해 봐야 비로소 와닿는 미국 특유의 문화도 있지만 책이나 인터넷으로 공부를 할 수 있는 문화도 있다. 미국 사람들도 미국의 50개 주를 다 가본 사람은 흔하지 않다고 한다. 업무 출장이 잦은 비즈니스맨이라면 매우 많은 주를 가 봤을 수는 있겠지만 그것도 비행기 타고 출장으로 잠깐 머무른 것이라면 그 주를 제대로 가 봤다고 하기는 힘들 것이다. 미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직접 가보지 않았어도 학교 다닐 때 지리 시간이나 역사 시간, 혹은 주변 사람들이나 TV, 영화 등 일상생활에서 늘 미국의 다른 주들 이야기를 접하게 된다. 하지만 나는 미국에 와서 다른 사람들과 회의할 때 그 사람이 자기는 어느 도시에 있다고 이야기하면, 도대체 그곳이 중부에 있는지 남부에 있는지 동부에 있는지조차 감이 오지 않았다. 그 사람 위치에 따라서 시간대가 다르니, 캘리포니아는 아직 오전이라도 그쪽은 오후라면 굿모닝이 아니고 굿 애프터눈이 되는 것이다. 그냥 이렇게 손을 놓고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캘리포니아에서 시작해서 주변의 주들 하나하나에 대해서 블로그에 글을 쓰면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냥 그 주의 수도가 어디고 면적이 얼마고를 찾는 게 아니고 기후와 경제 그리고 역사까지 찾다 보면 몇 시간은 쉽게 지나간다. 정리해서 글을 쓰다 보니 시간이 걸리기도 하지만, 찾아보면 신기한 것들을 많이 알게 되니 재미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