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문화
원숭이와 판다 그리고 바나나를 보여주고 이 가운데 2개를 묶어보라는 질문에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권 사람들은 80%가 원숭이와 바나나를 같이 묶고, 서양 사람들은 80%가 원숭이와 판다를 고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원숭이와 판다가 모두 동물이라는 분류적인 사고와 원숭이가 바나나를 좋아한다는 관계적인 사고의 차이라는 설명이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본인의 위치를 찾는 것은, 인간의 사회적인 특성 때문에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두 중요하다. 한국에서는 오랜 유교문화와, 힘든 역사를 겪으면서 쌓인, 개인보다는 우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신이 면면히 전해져 오는 것이고, 미국에서는 권위적인 유럽에서의 종교 박해와 계급의 한계를 떠나 신대륙에 온 이민자들의 후손답게, 기회와 평등, 개인의 능력과 자유의 가치를 집단의 가치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미국에서도 배경과 관계는 중요하다. 동부의 대도시에서 자라고 명문대학교에 다닌 사람이 비슷한 배경의 사람을 만난다면 분명히 말이 훨씬 더 잘 통할 것이다. 사소하게는 말을 하는 속도나 억양에서도 공통점을 찾기 쉬울 것이고, 옷을 입는 방식이나 취향도 동부와 서부가 다르다고 한다. 누구나 다 알아주는 명문대학교 출신이라고 하면, 분명히 그 사람이 학창 시절에 공부도 열심히 한 성실한 사람이었고, 괜찮은 성적으로 졸업했다면 그 힘든 대학의 공부와 경쟁을 이겨낼 머리와 의지가 있다고 일단은 기본적으로 평가를 할 것이다. 직장 인맥도 매우 중요하다. 처음 만나는 사람이라도 같은 직장을 다닌 적이 있다면, 그리고 그 회사에 대한 인상이 나쁘지 않다면, 그 화제로 한참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어느 정도 경력이 쌓이면, 전 회사에서 같이 일했던 상사나 동료의 추천으로 회사를 옮기는 경우가 매우 많다. 어떤 회사에 새로운 사장이나 부사장급 임원이 오면, 본인이 예전 회사에서 같이 일했던 믿을만한 직원들을 데리고 와서 중책을 맡기는 경우나 아주 흔하다. 미국에서도 인맥과 조직에서의 관계는 여전히 중요하다.
다른 점은 그 관계의 깊이와 강도에 있다. 한국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직원들의 가족들끼리도 서로 잘 알게 된다. 젊은 직원이 결혼했다면 신혼집에 같은 부서 사람들을 불러서 집들이하면서 부부와 인사를 나누게 된다. 아이를 낳고 돌잔치를 해도 직원들을 초대하고, 취미가 같다면 가족끼리 여행도 다니게 된다. 더 좋은 집으로 이사를 하면 당연히 친한 사람들을 불러서 집들이를 또 하고, 다른 집 아이들이 재수하는지 어느 대학 어느 과에 진학했는지가 모두의 관심사가 된다. 부모님 상을 당했을 때 당연히 문상하러 가고, 거기에서 그 사람의 다른 가족들을 짧게나마 보는 기회가 된다. 한국에서의 직장 생활은 어떤 의미에서는 온 가족이 함께 나누는 삶의 중요한 일부가 되는 것이다.
내가 지난 5년간 겪은 미국에서의 직장 생활은 이런 끈끈함은 전혀 없었다. 물론 이곳에서 자라거나 학교에 다닌 적이 없으니 지연이나 학연도 없고, 오래 직장 생활을 하면서 쌓인 탄탄한 인맥이 있는 것이 아니라서 내가 보고 경험한 것이 미국 직장 생활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내가 겪은 미국 회사에서의 관계는 딱 직원들끼리의 관계에서 끝난다. 물론 일을 하다 보면 배우자나 자녀들 이야기가 나오지만, 그냥 이야기가 나오는 수준에서 끝난다. 어떤 경우에는 아이들이 회사에 잠깐 나오거나 배우자와 주차장에서 마주치거나 하는 때도 있지만 잠깐 인사를 나누는 수준이다. 회사의 지원으로 열리는 행사나 혹은 파티에서 부부 동반으로 참석하는 예도 있지만, 역시 그 행사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정도이다. 정말 드물게 본인의 집으로 직원들을 초대하는 때도 있는데, 20년 넘게 미국 회사에 다니면서 딱 3번 있었고, 그것도 모두 한국에 있다가 미국에 출장을 왔을 때였다.
장례식은 친지와 친구들을 많이 부르는 편이다. 미국 사람 장례식은 가보지 못했지만, 한국 지인의 장례식은, 한국에서와 같이 교회에서의 추도식, 공원묘지에서의 행사, 그리고 찾아준 문상객들을 위한 식사 자리로 이어지는데, 물론 한국에서처럼 밤늦도록 남아서 술을 마시고 고스톱을 치면서 떠들썩한 그런 분위기는 아니다. 결혼식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이곳의 결혼식은 결혼하는 당사자들이 정한 아주 작은 숫자의 손님들, 그리고 양가 부모님과 친한 친지들만을 초대한 작은 규모로 한다고 한다. 이런 개인적인 행사들은 회사 생활과 철저하게 분리되어 개인적으로 치르는 것 같다. 친한 동료가 부모님 상을 당했다거나 모시는 상사의 자녀가 대학에 간다거나 하는 것도, 본인이 원해서가 아니고 휴가를 내면서 이야기가 나오는 수준이고, 당연히 그에 대해서 위로나 축하의 말 몇 마디 외에는 더 이상 관여하는 일은 드물다.
최근에 회사의 CEO가 새로 부임을 했다. 온라인으로 전체 직원들과 첫인사를 하는 미팅이 있었다. 자기가 여태까지 어떤 회사에서 어떤 일들을 했고, 우리 회사에 어떻게 오게 되었으며, 앞으로 어떻게 회사를 운영하겠다고 이야기하는 미팅이었다. 그 미팅을 시작해서 거의 10분 동안을 자기 가족들 그리고 자기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생의 우선순위에 관해서 설명을 했다. 어떻게 부인을 만나게 되었는지, 두 딸은 지금 어떤 학교를 다니고 있고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어 하는지, 자기가 일을 할 때 가족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를 구구절절이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자기의 인생에서 가족들이, 그리고 특히나 두 딸이 가장 중요한 가치이며, 직원 여러분들도 모두 자기의 가족이 있을 것이고, 그 가족을 소중하게 여기는 만큼, 회사에서 행복하면 집에서도 행복한 가장이 되는 것이고, 또 반대로 가족을 잘 돌볼 수 있도록 회사에서 잘 배려를 해 주어야 행복한 직원이 되므로 회사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숫자를 주로 다루는 회계사 출신의 CEO인데 회사의 숫자 이야기보다 가족 이야기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다니 신선한 충격이었다.
내가 만난 모든 CEO가 이런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참으로 사무적이어서 그 사람 가족 이야기는 전혀 모른다. 물론 내가 그 사람과 친하게 지낼 정도의 위치가 아니어서 그랬을 수도 있다. 어떤 CEO는 가족 이야기는 잘 모르겠는데 키우는 개는 종류와 이름까지 전 직원이 다 알고 있을 정도로 이야기를 자주 했다. 미국에서는 개를 산책시켜야 한다는 게 아이 학교에 태워다 줘야 한다는 정도의 중요한 일이다. 전화로 한참 업무 이야기하다가도, 나 이제 개 산책시켜줘야 할 시간이라면서 마무리하자고 하면 다들 이해한다. 아침에 회의 일정을 잡을 때도, 아이 학교에 데려다주어야 해서 회의에 조금 늦는다고 하면 다들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오후에 만나서 업무 이야기를 하기로 했는데 갑자기 집에 일이 생겨서 일찍 가봐야 하니 다음에 하자고 한다. 뭔가 급한 일이냐고 물었더니, 요새 집에 공사를 하는 곳이 있는데 인부들이 와서 뭔가를 물어보는데, 아내가 잘 모르니 당신이 와서 도와달라고 했단다. 최근에 HR 부사장이 거의 하루 반 정도를 모든 미팅을 취소하거나 일찍 마치는 일이 있었는데, 어린 아들이 감기가 심하게 걸려서 돌봐주느라 낮에도 바쁘고 밤에도 잠을 잘 못 자서 그랬다는 것이다.
물론 한국에서도 살다 보면 이런저런 예기치 못한 문제가 생기고 그 때문에 업무에 지장을 받거나 일정을 조정하는 일이 있다. 차이가 있다면 아주 분명한 우선순위에 있다. 가족과 관련된 문제라면 (여기서는 개도 가족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 같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당연히 일보다 훨씬 중요하게 생각한다. 한국에서도 아이가 아프거나 혹은 집에 공사를 한다든가 하면, 맞벌이 부부의 경우에 누군가 휴가를 내고 돌봐주어야 한다.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있다면 그분들이 돌봐 줄 때도 있다. 남편만 일한다면 당연히 엄마의 몫이 되고, 아빠는 회사에 출근해서 정상적으로 일을 하는 것이 보통이다.
개를 산책시켜야 한다는 이유로 퇴근을 일찍 한다거나 하는 일은 한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 가족은 개를 키우지 않지만, 미국 사람들은 개를 정말로 가족의 일원으로 생각한다는 것, 그리고 저녁 산책이 개들에게 아주 중요한 일과라는 것은 들었다. 미국은 대중교통이 거의 없다시피 해서, 아이들 학교나 각종 방과 후 활동을 하는 데 있어서 부모들이 태워주고 데려오는 것이 한국에 비해서 훨씬 중요한 일이고, 특히 아이들이 둘 이상이 되면 엄마랑 아빠가 잘 일정 조정을 해서 이 문제를 처리하는 것이 하루하루의 중요한 일과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가장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이 모든 것들을 너무나 당연하게 회사의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양해를 구하면서 업무를 조정하고, 다들 이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문화였다. 사람 이름도 잘 못 외우는데, 직원들이 키우는 개의 종류와 성별 그리고 가능하면 이름까지 알아야 하니 첩첩산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