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주: 38)
웨스트버지니아와 버지니아 위에 아주 복잡한 모양의 주가 메릴랜드입니다. 영국의 신대륙 식민지 개발이 한참이던 1632년에 볼티모어 남작인 조지 캘버트가 당시 영국 왕이던 찰스 1세에게 매사추세츠와 버지니아 사이의 지역에 대한 식민지 개발권을 허가받아서 개발된 곳입니다. 당시 영국에서 박해받던 소수 종교인 가톨릭 교인들을 위한 피난처라는 명분을 세웠다고 하죠.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와서 매사추세츠 지역에 정착한 필그림(Pilgrims)이나 혹은 뉴 잉글랜드 지역에 자리를 잡은 성공회 교인들 위주의 퓨리턴(Puritans)들은 가톨릭 교도들을 받아들이지 않았거든요.
메릴랜드 주의 생긴 모양을 보면, 북쪽 경계는 북위 39도 43분의 라인으로 펜실베이니아와 깔끔하게 나뉘어있습니다. 1600년대 후반에서 1700년대 중반까지 오랫동안 계속되던 신대륙 식민지들 사이의 경계 분쟁이 결국 1760년에야 공식적으로 Mason-Dixon 라인이라고 불리는 형태로 정리가 된 것입니다. 즉, 미국에 식민지를 두고 있던 영국의 귀족들 사이에 합의된, 지도의 위도와 경도를 기준으로 북위 39도 43분을 펜실베이니아와 메릴랜드의 남북 경계로, 그리고 서경 75도 47분의 일직선을 메릴랜드와 델라웨어의 동서 경계로 정한 것입니다.
메릴랜드의 크기는 3만 2천 제곱킬로미터 정도로 대한민국의 3분의 1 정도의 크기에 인구는 2020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6백2십만 명으로 나왔습니다. 인구 밀도 기준으로 뉴저지, 로드 아일랜드, 매사추세츠 그리고 코네티컷에 이어서 미국 50개 주 가운데 5위인데, 다른 어떤 주보다 압도적인 인구밀도를 보이지만 정식 주가 아닌 워싱턴 DC까지 포함해서, 6위인 델라웨어와 7위인 뉴욕까지, 인구 밀도 기준 상위 7개 주가 모두 동부에 다닥다닥 모여있다는 특징이 있네요.
메릴랜드는 또한 굉장히 돈이 많은 주입니다. 중위 가구 소득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워싱턴 DC를 제외하고 미국의 50개 주 가운데 2019년 기준으로 8만 7천 불 정도로 1위를 차지했습니다. 같은 조사에서 워싱턴 DC는 9만 2천 불로 나왔고, 2위인 매사추세츠가 8만 6천 불, 3위인 뉴저지가 거의 비슷한 수준, 4위는 하와이로 8만 3천 불 그리고 5위는 캘리포니아로 8만 불 정도로 나왔네요.
메릴랜드는 북미 대륙의 축소판 (America in Miniature)라는 별명이 있는데, 모래 언덕의 사막 지형에서, 다양한 야생동물이 서식하는 습지와 체사피크만 주변의 낙우송 (bald cypress) 군락에 더불어 참나무들이 즐비한 피트먼트 고원 지대와 서부의 메릴랜드 마운틴 지역에 수많은 소나무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자연환경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렇다고 합니다.
메릴랜드의 남서쪽 경계는 포토맥 강과 새넌도허 산맥을 따라가는 복잡한 모양으로 웨스트버지니아 및 버지니아와의 주 경계를 이루는데, 버지니아 주와의 경계에 끼여있는 곳이 워싱턴 DC입니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진 이 특별 자치구는, 미국이 처음 설립될 때 연방 정부의 수도가 어떤 특정한 주에 속하지 않고 독립적인 권한을 갖는 별도의 자치구로 남아야 한다는 이유로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도시입니다. 원래 계획 당시에는 버지니아의 부분까지를 포함한 마름모꼴로 만들어졌는데 나중에 버지니아 쪽의 지역이 버지니아에 반납되면서 지금처럼 왼쪽 부분이 포토맥 강을 경계로 하는 불완전한 마름모꼴이 되었죠. 워싱턴 DC는 나중에 50개 주를 다 다루고 별로의 편으로 한번 들여다보도록 하겠습니다.
체사피크 만은 버지니아와 메릴랜드 주 양쪽에 걸쳐있는데, 이곳이 메릴랜드 풍광과 경제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워낙 지대해서 그런지, 메릴랜드 주의 별명을 베이 스테이트(Bay State)로 바꾸자는 이야기가 주기적으로 나온다고 합니다. 현재 메릴랜드 주의 별명은, 영국과의 독립전쟁에서 메릴랜드 군의 혁혁한 공을 기리면서 조지 워싱턴이 불렀다는 이름에서 유래한 “Old Line State”, 혹은 “Free State”, “Little America”, “America in Miniature” 등입니다.
메릴랜드는 워싱턴 DC를 끼고 있는 덕분에 다수의 정부 기관 및 관련 업체들의 경제적인 기여도가 큰 편입니다. 기술과 관리 분야의 사무직이 주의 노동 시장의 25%를 차지한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국방이나 정부의 보안 관련 부서 등이 모여있고, 존스 홉킨스 대학과 관련된 병원 분야, 바이오 기술 관련 분야 등에서 많은 사람들이 일하고 있습니다.
메릴랜드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는 볼티모어(Baltimore)입니다. 영국 왕에게 신대륙에서 메릴랜드에 대한 개척 허가를 받은 양반이 볼티모어 남작(Baron of Baltimore) 조지 캘버트인데, 그의 아들 세실 캘버트(Cecil Calvert)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진 도시입니다. 특정 카운티에 속하지 않는 독립 도시(Independent City)인데 미국에서 가장 큰 독립 도시라고 하네요. 워싱턴 DC에서 동북쪽으로 40마일 정도 떨어져 있어서, 워싱턴 DC와 볼티모어를 합친 Washington-Baltimore CSA(Combined Statistical Area)에 사는 인구가 9백8십만 명으로 미국에서 3 ~ 4번째로 큰 CSA라고 합니다. 시카고 지역의 Chicago-Naperville-Elgin과 거의 동일한 규모입니다. 참고로 캘리포니아의 LA-Long Beach-Anaheim 지역의 CSA는 천 9백만 명 정도의 인구로 2위, New York-Newark-Jersey City를 합친 CSA는 2천4백만 명 정도의 인구로 미국 내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War of 1812”라는 전쟁이 있습니다. 잊혀진 전쟁이라고도 불리는 이 전쟁은, 미국이 영국의 식민지로부터 독립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유럽에서 벌어진 프랑스와 영국의 전쟁으로 인한 갈등이 미국과 프랑스의 해상 교역에 영향을 미치면서 결국 미국이 영국에 전쟁을 선포하고, 당시 북미에 있던 영국의 식민지 (지금의 캐나다)를 공격하면서 시작된 전쟁입니다. 이 전쟁에서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미 합중국의 수도인 워싱턴 DC가 영국군에게 함락당하고, 백악관과 국회의사당이 불타는 수모를 겪었던 전쟁이죠. 2012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백악관을 방문한 영국의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를 맞아서 했던 연설의 앞머리에 다음과 같은 농담으로 좌중을 웃겼습니다:
“It’s now been 200 years since the British came here to the White house under somewhat different circumstances. They made quite an impression. They really lit up the place. But we moved on…” (영국 사람들이 백악관에 200년 전에 왔었는데 그때는 좀 상황이 달랐죠. 상당히 깊은 인상을 남겼어요. 아주 화끈하게 말이죠. 하지만 그건 그때 일이고요…)
여기서 lit up the place는 light up the place의 과거형 표현으로, light up은 뭔가 좌중을 즐겁게 한다는 표현이기도 하고, 담배에 불을 붙인다는 표현이기도 하지만, 이 경우에는 당시 영국군이 워싱턴 DC를 침공해서 백악관을 불태운 것을 빗댄 표현입니다. 글로 표현해서 이렇게 보이지만 실제 연설 동영상을 보면 오바마 대통령이 계속 웃는 표정에, 가끔 캐머런 총리를 힐끗힐끗 보면서 농담을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캐머런 총리도 본인 연설에서 이에 대한 농담을 했고요.
이 1812년의 전쟁에서 워싱턴 DC 바로 옆에 있던 볼티모어도 영국군의 강력한 공격을 받았습니다. “Battle of Baltimore”라고 하는데, 이때 매킨리 요새 (Fort McHenry)에서 영국군의 파상 공세에도 불구하고 성조기가 계속 게양되어있는 것을 보고, 변호사이자 작가이며 아마추어 시인이던 프랜시스 스콧 키가 시를 썼는데 이것이 현재 미국 국가의 가사가 된 “The Star-Spangled Banner”입니다.
볼티모어의 흑인 인구는 남부에서의 유입과, 백인들의 교외 이주로 인해서 1950년에 도시 인구의 24% 정도에서 1970년에는 46%까지 늘었고, 2020년 조사에서는 62% 정도로 나왔습니다. 1950년에 95만 명으로 정점을 찍은 후에 지속적으로 인구가 감소해서 지금은 59만 명 정도의 도시 인구가 사는 것으로 나왔습니다. 2009년의 조사에서 가구당 평균 소득이 $42,241로 나왔는데 이는 당시 미국의 평균인 $53,889보다 현저히 낮은 수준이고, 도시 인구의 24%에 가까운 인구가 빈곤선 이하에 속한다는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주인 메릴랜드의 가장 큰 도시의 숫자가 보여주는 극명한 빈부격차의 아이러니를 볼 수 있지요. 1980년대부터 슬럼화가 되면서 점점 불안해진 도시의 치안은, “The murder capital of the United States”라는 살벌한 별명이 붙을 정도로 강력 사건이 많이 발생하는 곳으로도 악명이 높습니다.
메릴랜드의 주도는 아나폴리스(Annapolis)라는 곳인데, 체서피크 만과 세 번 강 하구가 만나는 지점에 있는 인구 4만 명 정도의 조그만 항구 도시입니다. 1845년에 설립된 미국 해군사관학교 (United States Naval Academy)가 있는 곳이죠. 메릴랜드에 한인들이 대략 5만 명 정도 산다고 하는데, 그중에 하워드 카운티 (Howard County)에 있는 엘리콧시티 (Ellicott City)에 많이들 모여산다고 합니다. 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민족답게 공교육 시스템이 잘 되어있어서 그곳에 많이들 모였다고 하는데, 2021년에 머니 메거진이 뽑은 메릴랜드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1위 및 미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10위에 올랐다고 합니다. 2021년 10월에는 “한국 사위” 래리 호건 메릴랜드 주지사와 유미 호건 여사가 참석한 가운데, 엘리콧시티에 있는 코리아타운을 정식으로 개막하는 행사도 열렸었지요.
2015년부터 메릴랜드 주지사로 일하고 있는 래리 호건은 1956년생으로, 공화당 출신입니다. 메릴랜드는 연방 상원의원 두 명이 모두 민주당이고, 하원의원 8명 가운데 7명이 민주당이며, 주 상원과 주 하원도 모두 민주당이 다수당을 차지하고 있는 민주당 텃밭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2014년에 민주당 후보를 51%대 47%로 꺾고 당선됐고, 2018년에는 55%의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해서, 메릴랜드 역사상 (1954년 이후) 재선에 성공한 두 번째 공화당 출신 주지사가 되었고, 메릴랜드 역사상 가장 많은 득표율을 기록한 주지사라는 역사를 썼습니다. 두 번이 넘는 연속된 주지사 재임을 금지하는 조항으로 올해 말 치러질 주지사 선거에는 출마를 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이 양반이 2024년 대선에서 과연 출마를 할 것이냐가 궁금해지는 대목입니다.
마지막으로 4월부터 체사피크 만의 블루크랩(Blue Crab) 시즌이 시작입니다. 집게발을 제외한 다리들이 파란색이라서 붙은 이름이고, 살이 달콤하고 즙이 많아서 찜 요리로 먹으면 맛있다고 이맘때쯤이면 게 먹으러 온 사람들로 엄청 북적인다고 합니다. 저는 한국에서 꽂게도 먹기 귀찮아서 잘 먹지 않습니다만, 한때 미국을 대표하는 10대 명물로 뽑힌 적도 있다고 하니 혹시 근처에 갈 일이 있으면 먹어봐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