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다른 때는 잘한다는 이야기?
제가 생각하기에 저는 대체로 차분한 사람입니다. 물론 노는 거 좋아하고 가끔은 우리 집사람이 부끄러워할 정도로 나서기도 하고, 말도 안 되는 개그도 합니다만 대체로 술 한잔 하는 모임에서 그런 편이지요. 물론 술 안 마시고도 쉰소리 가끔 하고 필요하면 오버도 합니다만, 일반적으로는 감정의 기복이 심한 사람은 아니라고 스스로 평가합니다.
그러니 누구와도 크게 싸워본 적이 없습니다. 어린 시절을 지나고 대학교와 군대를 다녀온 이후에는 주먹질은 물론이고, 언제 마지막으로 쌍욕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크게 화를 내지 않는 성격입니다. 정말 화가 나면 그 자리를 피하거나 그 사람을 보지 않거나 하면서 넘기곤 합니다. 하지만, 역시 저도 사람인지라 아주 가끔씩 숨이 가쁘고 말이 안 나올 정도로 화가 나서 부들부들 떨었던 경험이 있지요. 물론 그런 상황에서도 쌍욕은 하지 않고 좀 말을 버벅거리다가 휙 일어서서 자리를 비운 정도지만요.
자 그러면, 이렇게 모국어를 쓰는 상황에서도 화가 많이 나면 말이 잘 안 나오는데, 영어를 쓰는 환경에서 비슷한 상황이 생기면 어떨까요? 당연히 말이 잘 나오지 않습니다. 영어로 하는 욕을 잘 알지도 못할뿐더러, 한국말로도 하지 않는 욕을 미국까지 와서 하는 것은 제 성격과 어울리지 않잖아요. 하지만, 욕은 아니더라도 뭔가 이 거시기한 심정을 분출해야 하는데, 단어도 모르겠고 흥분해서 발음도 틀리고, 그냥 답답해서 미칠 것 같은 그런 상황을 미국 와서 지낸 3년 동안 딱 한번 겪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 샌디에이고 오피스에 새로 발령을 받아서 같이 업무를 하게 된 인도인 동료가 있었습니다. 생긴 것도 멀쩡하고 옷 입는 스타일도 패셔너블한, 전형적으로 교육 잘 받고 승진 가도를 달리는 야심 찬 젊은 임원이었죠. 원래 인도 출신에 미국에서 계속 직장 생활하면서 MIT MBA까지 했으니 당연히 영어도 저보다 잘하고, 미국 문화에 대한 이해라던지 회사 내부/외부의 인맥이던지 저보다 나은 친구였죠. 다만, 우리 회사의 업무 경력과 업계에 대한 이해는 제가 더 나은 상황에서 서로 파트너로 그 친구가 제품을 기획하고 제가 개발팀을 관리하는 관계였습니다. 그런데 처음에 서로 잘 지내보자고 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각자의 아래 직원들끼리 영역 다툼을 하면서 티격태격 하는 상황에서 서로 자기 부하 직원 편을 들면서 감정이 점점 나빠져서 하루는, 제 사무실에서 대판 싸웠는데, 다른 사무실 사람들이 놀라서 쫒아올 정도로 목소리를 높였었죠.
뭐 그 다툼의 내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상황을 겪은 후에 제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흥분한 상태에서는 한국말도 잘 안되는데, 영어는 정말 안된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다행히 이성의 끈을 놓지는 않아서 Fxxk 같은 막말까지 하지는 않았습니다만, 웃프게도 화가 머리끝까지 나니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수많은 영화에서 봤던 그런 주옥같은 'What the fxxk...'으로 시작하는 화려한 욕들 뿐이더라고요.
그 일을 겪고 나서 제가 영어로 된 책을 몇 권 샀는데, McGraw-Hill에서 나온 Perfect Phrases 시리즈가 있더군요. 이런저런 상황에 맞게 미리 만들어놓은 모범 문장을 설명해주는 책인데, 사실 저희가 공부할 때도 내용을 다 알고 하는 것보다 그냥 외워서 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영어로도, 제가 정말 다양한 강도와 뉘앙스를 담은 감정적인 표현과 단어들을 많이 알고 있다면 얘들을 실시간으로 조립해서 대화를 하겠지만, 그런 것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는 잘 만들어진 문장을 많이 읽어서 따라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인 것 같아서요. 이 시리즈에 보면 재미있는 것이 많은데, 힘든 사람들을 다루는 상황 (Perfect phrases for Dealing with difficult people)에 관한 책도 있고, 인사 평가에 대한 대화를 보여주는 것 (Perfect phrases for Performance Reviews) 같은 것도 있습니다. 제가 맡고 있는 팀에 외국 직원들도 있는데, 분기별로 그 사람들과 회사 생활이나 성과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는 쉽지 않은 업무에 도움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이렇게 영어 표현을 익히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좀 더 근본적으로 느낀 것이 있습니다. 우선은 다른 무엇보다도, 그렇게까지 감정적으로 대응할 이유가 없었는데 그런 식으로 행동한 스스로에 대해서 반성을 많이 했습니다. 그날도 잘 돌이켜보면 제가 주로 흥분해서 목소리를 높였고, 그 친구는 화가 난 것은 표정이나 몸짓으로 보였지만 목소리를 높이거나 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제가 회사 생활하면서 보면, 미국 사람들은 어떤 일이든 감정적으로 대하는 것을 보기 힘들었습니다. 회의를 하다가 서로 의견이 다르고, 그로 인해서 아주 격한 토론과 대립 상황이 벌어져도, 일에 개인적인 감정을 섞지 않더군요.
저의 경우엔, 제가 고심해서 낸 아이디어를 누군가가 비판하면, 그것을 저에 대한 개인적인 공격으로 받아들여서 기분이 상하는 경우가 있는데, 막상 그렇게 한 당사자는 제가 기분이 상했다는 것도 모를 정도로 무신경하게 행동하더군요. 그리고 본인들이 낸 의견에 대해서 누군가가 조목조목 반박해도, 역시 개인적 감정은 배재하고 업무에 대한 논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사실 그게 맞죠. 제가 여기 와서 적응하기 힘들었던 문화중의 하나가, 회의 때 저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낸 의견에 대해서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는 일이었습니다. 아무리 저 스스로는, 외국인 회사에서만 25년을 일했고, 열린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고 자부했지만, 결국은 저도 유교 문화가 강한 한국 사회에서 태어나서 자란 한국 사람이고, 따라서 나이가 많거나 직위가 높은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고, 체면을 걱정하는 그런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거죠.
지금은 그래도 많이 적응해서 이런 위아래 없는 토론 문화에 적응을 하긴 했습니다만, 여전히 어릴 때부터 이런 식으로 본인의 주장을 표현하는데 거리낌이 없이 자라온 친구들과는 큰 차이를 느낍니다. 하여튼 다시 원래의 주제로 돌아가서, 비록 어떤 이유로든 서로 논쟁이 붙을 수는 있겠지만, 이것은 결국 모두 회사 업무를 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이니 감정적으로 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중요한 레슨이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저와 제 동료가 이렇게 대판 언쟁을 벌이게 만든 그 당사자가 언제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We are all here to work and get things done, not to make friends." 즉 우리는 회사에 일하러 온 거지 친구 만들러 온 거 아니잖아, 뭐 이런 의미인데요. 그때는 그 녀석이 너무 마음에 안 들어서, 그냥 싹퉁머리 없는 차가운 코멘트라고 생각하고 넘어갔는데, 나중에 다시 곱씹어보니까 깊은 의미가 느껴지는 한마디더라고요. 특히, 정이 많고 매사를 개인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강한, 한국의 문화에 익숙한 사람이 미국 와서 일을 할 때 두 번 세 번 새겨보면 좋을 말이라고 생각해서, 나중에는 그 녀석이 고맙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제 결론은 이겁니다. 화가 나서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호흡도 거칠어지면 당연히 영어가 안됩니다. 이걸 이겨내는 방법은, 이런 상황에서도 화난 내 감정을, 너무 심한 욕을 쓰지 않으면서도 세련되게 잘 표현할 수 있는 영어 단어를 외우던가 문장을 외우던가 해서, 흥분한 상태에서도 본능적으로 나올 수 있도록 갈고닦아야겠죠.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회사 생활을 하면서 어떤 상황이던 감정적으로 대하지 않고, 좀 납득이 가지 않고 불합리해 보이는 일이 있더라도 차분하게 업무로 대하는 내공을 쌓아야 하겠다는 겁니다. 근데, 이걸 좀 더 확장해보면, 이게 반드시 회사 생활에만 적용되는 이야기일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