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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이킴 Feb 14. 2020

설레임이 없는데 왜 매일 출근하나요

회사가 아이스크림 가계냐?

오랫동안 다녔던 회사를 갑작스럽게 떠나게 되면서 그동안의 회사 생활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인생을 계획하는 좋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평소에 회사를 다니면서 당연히 했어야 했고 충분히 할 수도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몸에 좋은 운동을 당장의 필요가 보이지 않아서 미루듯이, 진지하게 회사 생활을 돌아보고 다음 단계를 준비하는 고민을 해 본 적이 없었던 거죠.


한국에서 일할 때 직원들과 회식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다가 서로들 거나하게 취하면 가끔 이런 질문들을 하곤 했습니다. '아침에 눈뜨고 일어나서 회사 출근할 때 어떤 생각으로 사무실에 나오게 되나요?' 어찌 보면 "답정너" 질문이고 어찌 보면 정말로 궁금해서 물어본 질문이기도 합니다.


저는 22년 넘게 이 회사에서 일하면서 회사 생활이 정말 즐거웠습니다. 아침에 알람이 없이도 번쩍 눈이 떠지고, 지금 벌어지고 있는 각종 업무와 오늘 출근해서 해야 할 일들을 즐거운 마음으로 기대하면서 사무실에 나왔다고 하면 과장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그런 날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물론 힘든 시절도 있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때는 '나가서 뭐 다른 거라도 해 볼까?' 하는 생각도 있었고, 실제로도 중간에 짧게 회사를 떠나서 다른 시도를 해 본 적도 있었죠. 하지만 22년간 회사에서 다양한 업무를 맡으면서, 그 모든 업무에서 즐거움을 찾았고, 설레는 맘으로 출근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 저에게, 다른 직원들의 매우 솔직한 답변은 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대답들이 다 똑같지는 않았지만 저처럼 미친 듯이 일이 재미있다고 대답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사실 많은 사람들이 월급 받기 위해서 출근한다고 했고요. 이런 대화가 술자리에서 벌어지다 보니, 그다음의 제 질문도 그 이상 솔직했죠. '아침에 눈떠서 회사를 가는 것이 즐겁지 않고, 하루하루의 업무가 설렘이 없다면, 그런 회사를 계속 다니나요? 다들 능력도 있고 태도도 좋은데 정말로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떠나는 것이 맞지 않나요?'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참으로 공감 능력에 문제가 있는 매니저였다는 생각에 부끄러운 마음입니다. 저는 이 회사의 두 번째 한국 직원이고 첫 번째 아시아 담당 필드 엔지니어였습니다. 그동안 일하면서 모신 상사들도 모두 저와 궁합이 잘 맞았고, 몇 년 동안 한 포지션에서 업무를 하다가, 그다음에 새로운 포지션으로 옮겨가서 또 다른 도전을 하고 꽤 괜찮은 성과를 내는 일을 반복했습니다. 열심히 일한 것도 물론 있겠지만, 그 이상으로 제가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런 특수한 저의 경우를,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도 그대로 기대하는 일반화의 오류를 저지른 거죠.


물론 회사 생활이 즐겁고 그래서 열심히 일해서 성과를 내고, 그래서 인정을 받아서 또 다른 재미있는 일이 주어지고 하는 것은 괜찮은 선순환 구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 다른 시각에서 보면 좀 과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과유불급이라는 말도 있듯이, 뜨거운 열정과 매일매일의 출근이 기다려질 정도의 설렘만 갖고 회사 생활을 하는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저의 경우엔 '회사가 잘 되어야 내가 잘되고, 내가 잘해야 회사가 돌아간다.'라는 믿음이 있을 정도로 회사와 저를 한 몸처럼 생각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저는 그동안 참으로 운이 좋았던 것이었는데, 이번에 정리해고를 당하면서 그 운이 다 한 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처럼 운이 좋지 않았던 사람들이 더 많았을 겁니다. 그래서 회사가 잘 되어도 그 보상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겠죠.


내가 잘해야 회사가 돌아간다는 것도 오만입니다. 물론 모두들 열심히 일해야 업무가 잘 돌아가는 것은 맞겠지만, 그건 시스템적으로 그렇게 굴러가도록 되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뛰어나고 열심히 하는 개인이 있더라도 그 사람 없어도 잘 굴러가는 것이 조직의 힘이죠. 오히려 그 뛰어나고 과하게 열심히 하는 한 사람으로 인해서 가려져 있던 시스템의 문제라던가 다른 사람들의 재능이, 그 사람이 떠나고 난 후에 발현이 되어서 더 건강한 조직이 되는 일도 충분히 벌어지기도 하고요.


이렇게 회사 생활을 사랑하고 열심히 하는 경우의 또 다른 문제점이 있습니다. 지금 제가 이렇게 브런치에 글을 쓰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오래전부터 글 쓰는 것을 좋아하고, 작가의 꿈을 꾸고는 있었지만 한 번도 제대로 시도를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아침에 눈뜨면서부터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온통 회사일 생각만 하니 다른데 한눈을 팔 겨를이 없었지요. 그러다가 이번에 회사를 떠나게 되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갑자기 아침에 눈떠서 챙겨야 할 이메일도, 회의 일정도, 나가야 할 사무실과 심지어는 노트북 컴퓨터도 없어지니까 시간이 많아진 부분이 가장 큰 이유겠지요.


하지만 그 여유가 오로지 시간의 여유만은 아니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새로운 도시로 여행을 간다고 할 때, 차를 타고 쌩쌩 달리면서 보는 것보다, 여유 있게 걸어 다니면서 보는 것이 훨씬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잖아요? 제 회사 생활은 차를 타고 달리는 수준을 넘어서 한 목적지에서 다음 목적지로 가는 비행기 수준의 여행이었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러니 중간에 아름 다운 풍경이던, 다른 사람들이건, 다른 길이건 보고 즐길 여유가 없는 거죠. 그런데 비행기에서 내려보니까 제가 하고 싶었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미루어두었던 일이 보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글쓰기가 가장 쉽게 당장 시작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외에도, 이번 일을 겪으면서 참으로 오랜만에 연락을 주고받은 친구들, 일자리를 제안하는 사람들, 비즈니스 아이디어를 주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잊고 지내던 사람들, 이 회사 바깥에 있는 수많은 기회들, 그리고 회사 다니지 않아도 먹고살 수 있는 일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고마운 일입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연인과 부부 사이라도 어느 정도의 여유와 공간이 있으면 더 좋은 것 같습니다. 저는 일하면서 출장을 자주 다니던 편이었는데, 출장을 다녀오고 나면 집사람과의 사이가 더 새롭고 애틋해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회사 생활도 그런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번에 배우게 되었지요. 스토커 수준의 과다한 애정보다는, 몸과 마음의 여유를 갖고, 본인의 회사 생활을 돌아볼 필요도 있겠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 외에, 회사 안에도 회사 바깥에도 많은 기회가 있습니다. 몇 년 만에 내가 힘들 때 연락해도 엊그제 만난 것처럼 나를 아껴주는 사람들도 주변에 많이 있고요. 하고 싶다고 머릿속으로만 생각하지만, 바쁜 회사 생활을 핑계로 미루는 일들도, 사실 막상 해 보면 할 수 있는 방법이 많이 있겠지요.


제가 20년 넘게 이 회사를 다니면서, 왜 즐겁고 설레는 마음으로 회사 생활을 하지 못하는지, 그리고 그렇다면 계속 회사를 다니는지, 새벽 2시에 3차를 간 해장국집에서 저에게 괴롭힘을 당했던 그 멤버들을 포함한 많은 동료, 후배 직원들에게 죄송한 마음과 더불어 응원을 보내는 이 글을 바칩니다. 제가 많이 오버했던 것 미안하게 생각하고, 회사 생활은 출퇴근 시간에 열심히 하고 그 사이에 취미도 즐기고 가족/친구들과 시간 보내는 것이 더 건강한 방식이라고 뒤늦게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공감 능력이 부족했던 저를, 그래도 잘 도와주고 왕따 시키지 않고 잘 놀아줘서 고맙다고 전하고 싶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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