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보다는 정확도
골프를 하다 보면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사람마다 타고난 리듬이 있다고요. 그래서 자기가 타고난 리듬에 맞춰서 골프를 해야 가장 잘할 수 있다고 합니다. 저는 골프 스윙이 빠른 편입니다. 평소 걸음걸이도 빠른 편이죠. 골프가 잘 맞지 않아서 좀 더 침착하게, 여유 있게 스윙을 하려고 하는데, 잘 되지 않습니다. 처음에 골프를 배울 때, 정확성은 나중에 잡으면 되니까 일단 있는 힘껏 스윙해서 공을 멀리 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배워서 잘 고쳐지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제가 타고난 리듬이 빨라서 그 리듬을 억지로 천천히 하는 것으로 바꾸기가 힘든 것이지 모르겠어요.
저는 말도 빨리한다고 생각합니다. 뭐 누구한테 제가 말이 빠르다고 지적을 받거나 한 것은 아니고 그냥 제 느낌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런데 한국어로 말할 때야, 어떤 사람이 좀 빠르게 말하던 좀 느리게 말하던 어차피 다들 모국어로 이야기하는 사회니까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죠. 업무상 사람들 앞에서 말을 많이 하는 편이고, 수백 명 앞에서 발표도 자주 했는데, 제 말하는 속도에 대해서 고민을 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어떤 내용을 갖고 어떤 무대 매너로 발표를 해야 하는 것이 고민이었죠.
제가 다른 글에도 몇 번 썼지만, 미국에 와서 살게 되면서 영어 콤플렉스도 심해지고 고민도 깊어졌습니다. 그런 고민 가운데 요즘 드는 생각이 제 영어 말하기의 속도에 관한 것입니다. 저는 제가 영어를 빨리 말한다고 느껴집니다. 할 말이 많아서나 자신감이 넘쳐서 그렇다기보다 뭔가 조급하다는 느낌이죠. 마침 어제 우리 내부 직원회의에서 제가 어떤 내용에 대해서 발표를 한 내용이 녹음 파일로 저장이 되었습니다. 그 녹음의 제일 앞부분과 중간 부분 정도의 1분을 골라서 단어 수를 세어 봤습니다. 중간에 조사도 들어가고 버벅거리면서 '어~' 이런 말도 많이 합니다만 대략 130 ~ 150 단어 정도 쓰는 것 같습니다.
이 결과를 보면 저는 전혀 빠르게 영어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원어민의 일상 대화 속도가 150 ~ 190 wpm (words per minute: 일분당 단어 숫자) 정도라고 하니, 오히려 그 기준으로는 천천히 말하는 사람입니다. 궁금해서 요새 맨날 뉴스에 나오는 트럼프 대통령의 기자 회견 중에 한토막에서 나오는 단어수를 세어봤습니다. 10초 약간 넘는데 거의 30 단어를 말하더군요. 60초 기준으로 180 단어 정도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꽤 느리게 말한다고 생각하는 양반인데, 이 경우에는 그렇지 않더군요.
트럼프랑 아주 앙숙인 MSNBC의 레이첼 매도(Rachel Maddow)라는 여자 앵커가 있습니다. 특유의 카리스마가 넘치는 양반인데, 제 느낌에는 이분이 말을 정말 빨리합니다. 그래서 어떤 한 장면의 단어를 1분 동안 세어봤습니다. 미주리주에서 간호사들이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에 대해서 주지사에게 보다 강력한 조치를 촉구하는 성명을 냈다는 건데, 참고로 미주리주는 3월 30일 현재까지도 아직도 자택 대피령을 내릴 생각이 없다고 하는 곳입니다. 관련 뉴스의 앞부분의 동영상을 보니 일분에 170 단어 정도 말하더군요. 미국 뉴스에서의 평균 말하기 속도가 160 ~ 180 wpm 정도라고 하니 아주 딱 평균이라고 하겠습니다. 전혀 빠른 게 아니죠.
현재 미국에서 가장 크게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를 겪고 있는 뉴욕의 주지사 앤드류 쿠오모는 안 그래도 방송에 매일 나오고 있는데, 어제 동생이 확진을 받았다는 내용을 발표해서 더 화제가 되었죠. 그 기자회견의 일부를 세어봤는데 대략 125 단어 말하더군요. 이 양반은 확실히 제가 느리게 말한다고 생각한 만큼 느리게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제가 어떤 상황의 일부분만을 찾아서 단어를 카운트했으니 좀 들쑥날쑥 할 수는 있겠습니다만, 제가 빠르거나 느리게 말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그런 사람도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는 겁니다.
고통스러울 정도로 부끄럽지만 제가 발표하거나 말하는 내용을 잘 들어보면, 의미 있는 단어수에 비해서 쓸데없는, '어~'나 'You know' 이런 말들이 매우 많습니다. 그리고, 이것도 그냥 제 느낌일 수 있겠는데, 영어 단어를 발음할 때 뭔가 후루룩 말한다는 느낌이 들어요. 악센트와 발음을 지켜가면서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그 단어를 마치 한국어로 하듯이 음절 단위로 소리는 나는데 뭔가 좀 급하게 지나간다는 느낌이죠. 이런 것 때문에 실제로 제가 말하는 속도에 비해서 스스로 빠르게 말한다고 생각이 들 수도 있겠습니다.
버벅거리는 거 좀 진정하고, 쓸데없는 단어들 빼고 나면, 쿠오모 주지사의 125 단어 정도의 속도가 외국인인 저에게 적당한 속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분 말하는 거 들어보면 천천히 말하지만, 단어 하나하나를 꾹꾹 눌러서 전달을 하는 느낌이죠. 귀에 쏙쏙 들어오고 진심이 느껴집니다. 반면에 제가 말하는 것을 녹음해서 들어보면, 산들바람에도 훨훨 날리는 벼 껍질 같은 느낌입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많다는 것은 알겠는데, 뭐 좀 들어보려고 하면 휘리릭 지나가 버리는, 그대 이름은 바람, 바람, 바람~
골프 스윙을 좀 더 여유 있게 교정하는 것은, 특히나 십몇년 동안 이모양으로 스윙을 해온 저에게 참으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 연습장에서는 잘 되다가, 막상 필드 나가서, 홀당 3불짜리 내기라도 걸리면 두근거리는 마음에 그냥 눈감고 냅다 옛날처럼 서두르는 스윙으로 돌아가죠. 그래서 타고난 스윙 리듬이라는 것이 있고, 고치기가 쉽지 않다고들 하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정말 가끔, 왠지 마음이 편해지면서 아무 생각 없이 부드럽게 스윙을 했는데 공도 빨랫줄처럼 날아가고 피니쉬도 잘 잡히면서 스스로 프로처럼 쳤다고 생각하는 샷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그런 게 가능하다는 것은, 열심히 노력해서 몸에 익혀주면 교정이 가능하다는 의미가 아닐까 합니다.
가끔은, 나이 먹고 이제 와서 영어 공부를 한다고 얼마나 늘 것이며, 또 그렇게 몇 년을 고생해서 늘려놓은들 남은 직장생활 동안 얼마나 쓰겠냐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좀 불편하고 부끄럽고 그렇지만, 지금도 사실 영어를 그렇게 못하는 것도 아니니, 그냥 이 정도로 만족하고, 차라리 그렇게 하고 싶은 중국어 공부를 더 하던가, 글쓰기 공부를 더 하던가, 아니면 정말로 맘먹고 골프를 한번 마스터해 보던가, 뭔가 해야 해서 하는 일 말고 내가 정말 하고 싶어서 하는 공부를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지금 미국 온 지 3년 좀 넘었는데, 그 3년 동안도 영어 콤플렉스가 많았고, 특히 최근에 회사 옮기면서 아시아 쪽 업무랑 전혀 상관없이 순수하게 미국 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업무를 하면서 더욱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지요. 제가 하루의 거의 8시간을 회사 업무를 하면서 보내는데, 그 8시간의 꽤 많은 부분이 대면이나 전화로 하는 회의이고, 그때마다 제가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그것이 더 큰 문제라는 생각도 들어요.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도 즐겁겠지만, 힘든 일을 좀 덜 힘들게 만드는 것도 보다 행복한 삶을 사는데 중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영어에도 리듬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 리듬을 잘 한번 타 봐야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