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보니 더 보고 싶은
올 겨울은 샌디에이고치고는 유난하다 싶을 정도로 비가 많이 왔습니다. 저희가 미국 와서 네 번째 맞는 겨울인데, 그중에서 제일 비가 많이 왔던 한해라고 생각이 될 정도입니다. 원래 남부 캘리포니아는 항상 가뭄 걱정을 하는 곳인데 비가 많이 온다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들 하네요. 한국에 살 때도 비 오는 것을 좋아했던 저로서는 불만이 없습니다. 얼마 전에는, 저녁에 책을 읽고 있는데 비가 오기 시작해서, 그 빗소리 듣는 것이 너무 좋아서 새벽까지 거실에서 한잔 하면서, 빗소리와 더불어 책 한 권을 다 읽고 올라온 적도 있습니다.
아직도 가끔 비는 오지만 이제 3월 말이면 겨울은 다 간 거고 온도가 조금씩 올라갈 때가 되었죠. 남부 캘리포니아 특유의 화창하고 쨍한 날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일요일 저녁에 이 글을 쓰고 있으니, 이제 집에서 재택근무하기 시작한 지 2주 되었네요. 2주 전 월요일 오후에 산호세 출장 때문에 공항에 갔는데 마지막 순간에 고객 미팅이 취소되어서 헛걸음을 하고 돌아온 후로 쭉 재택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그때 공항 바깥에서 계속 통화하면서 좀 있었는데, 그날도 참으로 햇볕이 좋은 날이었어요.
코비드 바이러스 사태로 가택 연금 아닌 가택 연금을 당하면서 힘들어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주변에도 식당을 하시거나 세탁소를 하시는 형님들이 계신데 당연히 비즈니스가 많이 힘들다고 하십니다. 경제 활동이 위축되어서 힘든 것도 힘든 거지만, 바깥 활동을 하지 못해서 느끼는 답답함도 못지않습니다. 원래 힘들 때일수록 서로 소주도 한잔하고 속 이야기도 털어놓으면서 위로도 받고 해야 좀 풀리는데, 그 풀어줄 수 있는 활동도 안되니 더 힘든 것 같아요. 평소에 친한 사람들끼리 운동 같이하고, 식사하고, 술 한잔 하면서 수다 떠는 것이 얼마나 잔잔한 행복이었는지 새삼 느끼게 되는 시간입니다.
회사를 다니는 제 입장에서도 불편한 것이 많습니다. 얼굴 보고 이야기하면 금방 해결될 수 있는 일도 메신저와 이메일, 그리고 전화로 할려니까 업무의 양이 더 많아진 것 같습니다. 회의의 숫자가 늘어서 그렇게 느끼는 걸 수도 있고요. 제 입장에서는 특히나, 회사 옮기고 새로 출근 시작한 사무실에 3주 정도 나가 보고 나서 이러고 있으니, 더 아쉽다고 느끼는 면도 있습니다. 사무실이나 사람들하고 친해질 겨를도 없이 이 사태가 벌어졌으니까요. 디트로이트나 산타클라라에도 사무실이 있는데 거긴 가보지도 못했고요.
그 와중에도 일은 해야 하니, 새로운 프로젝트에 합류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주일 정도 되어가는데, 그 이 주 전 월요일 산호세 출장이, 그쪽 새로 합류한 프로젝트 매니저 만나서 인사하면서 안면도 트고 업무 협의도 하기로 한 미팅이었습니다. 3주 전만 해도 좀 간당간당하게 미팅도 하고 출장도 다니는 분위기라서, 그다음 주 화요일에 그쪽 마운틴뷰 사무실에서 보기로 하고 월요일 오후 비행기를 탈 예정이었지요. 주말 동안 상황이 급변해서 결국 공항까지 갔다가 돌아왔는데, 덕분에 그쪽 담당 프로젝트 매니저랑은 그 후로 이메일과 메신저, 그리고 전화로만 일을 하고 있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우리랑 업무나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좀 다르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저는 토종 한국 사람답게, 같이 일하는 동료던 고객이던 결국 사람이 사람과 일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니, 이렇게 2주 넘게 같이 일하면서도 얼굴 한번 보지 못하고, 서로 호흡을 맞춰가면서 업무 협의를 하는 상황이 편하지는 않습니다.
우리 회사 같은 경우엔, 최근 2주간 이런 사태가 벌어지면서, 되도록이면 비디오 채팅을 하자고 하는 분위기입니다. 회의를 할 때, 비록 화면으로라도 서로 얼굴을 보면서 이야기를 하면, 아무래도 좀 더 같이 일한다는 느낌이 나니까요. 왜 커뮤니케이션할 때 내용보다도 목소리와 표정이 더 많은 의미를 전달한다고 하잖아요. 저야 아직 실물을 보지 못한 사람이 더 많습니다만, 다른 사람들은 이미 잘 아는 같이 일하는 동료들이니까, 이렇게 서로 얼굴 보며 회의를 하면서 외로움도 덜고요.
그건 우리 회사 이야기고, 같이 일하는 동료들이니까 스스럼이 없어서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일하는 이 고객 프로젝트의 팀 회의에 몇 번 들어갔는데 한 번도 영상 통화를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회사 문화에 따라서 다른 부분이 당연히 있겠지요. 그리고 들어오는 사람이 많은 회의는 아무래도 모두들 화상 통화를 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고요. 그리고, 다들 집에서 편한 복장과 편한 상태로 일을 하는 사람들도 많을 테니, 거기에 대고 화상 통화를 하자고 하는 것이 민폐를 끼치는 일이 될 수도 있고요.
제가 먼저 제안을 하기는 좀 거시기합니다만, 다음에 저랑 가장 밀접하게 일하는 이 친구랑은 한번 얼굴 보는 회의를 할 기회가 있으면 합니다. 서로 이메일도 많이 주고받고 일주일에 거의 네 번 정도 회의를 하면서 때로는 둘이서, 때로는 여러 사람들과 같이 대화를 했습니다. 링크드인으로 연결해서 보니까 나이는 젊어 보이는 친구인데 MIT를 나왔더군요. 근데 그렇게 좋은 학교를 나와서 지금 하는 일은 또 뭐 그렇게 어울리는 일 같이 않아 보입니다. 통화할 때도 대체로 목소리가 많이 지쳐 보이고요. 제가 뭔가 아이디어를 내거나 하면 호응도 잘해주지만 대체로 응답이 늦고, 일에 치여산다는 느낌도 듭니다. 우연히 스카이프 프로필 사진을 보니까 오토바이를 타고 있는 사진이 보여서 동질감도 좀 느꼈고, 혹시 그것 때문에 지금 다니는 회사를 들어갔나 싶기도 하고요.
얼굴도 한번 못 보고 2주 동안 회의만 엄청 한 주제에 오지랖도 넓다는 생각도 듭니다만, 하여튼 저는 어떤 일이든 잘 되려면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호흡이 맞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더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하나 봅니다. 스스로 생각해도 웃기는 건데, 엊그제는 문득 오래된 한국 영화 접속의 내용이 생각나더군요. 한석규와 전도연이 만날 듯 말 듯 애간장을 태우는 것처럼, 언젠가 만날 사람은 만난다는 대화의 내용처럼, 저도 제 카운터파트, 조쉬(Josh)와 얼굴 보면서 이야기할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저녁입니다. 오래간만에 접속을 한번 다시 볼까 생각 중입니다. 영화 주제가가 자꾸 귀에 아롱아롱 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