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 없는 영어의 문제
아들 녀석이 어려서 영어를 배울 때 배우던 교재 가운데 하나가 파닉스(Phonix)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제목만 봐서는 무슨 소리인지 잘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까 영어 단어의 소리를 내는 법을 배우는 과목이라고 하더군요. 별 희한한 수업이 다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아들 녀석이 유치원 다니던 그 시절에도 이미 한국에서 외국인 회사를 다니면서 매일매일 영어로 업무를 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파닉스라는 이야기는 생전 처음 듣는 내용이었고, 영어 단어는 아는 것은 아는 대로 소리를 내면 되고, 모르는 것은 사전을 찾아서 뜻도 배우고 악센트 어디 있는지랑 특이한 발음 있는지만 확인하면 소리를 낼 수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언젠가부터 이 파닉스라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꼭 미국에 와서야 이걸 느낀 건지 한국에 있을 때도 알게 모르게 느꼈는데 미국에 와서 그 느낌이 더 강해진 것인지는 확실치 않습니다만, 생각나는 계기가 있습니다. 회사의 고객 가운데 일본의 자동차 회사인 혼다가 있어서 그 이야기를 자주 했었습니다. 혼다는 영어로는 Honda로 쓰지요. 그리고 일본어 발음도 어느 정도 아는 한국 사람들 입장에서는 혼다라는 발음이 맞다는 것도 알고 있고요. 그런데 미국 사람들은 이 회사의 이름을 "한다"라고 발음합니다.
어떤 미팅에서는 처음에 한동안 본사 임원이 이야기하는 그 "한다"가 그 "혼다"를 말하는 것인지도 못 알아들을 정도로 낯설게 들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의문이 들기 시작한 거예요. 영어 단어가 스펠링과 발음이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아.에.이.오.우 이렇게 기본적인 발음은 다 있는 것이고, 그중에도 "O"의 발음은 우리말의 "오"에 해당한다고 무의식 중에 생각해왔던 겁니다.
사람은 아는 만큼만 보인다고 하더니, 그다음부터는 영어의 알파벳 O를 매우 많은 경우 "아"로 발음하는 것이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현재 미국 대통령 이름이 도널드 트럼프잖아요. 근데 미국 사람들은 Donald를 다널드라고 발음을 하더라 이거죠. 예전에는 그냥 도널드를 좀 굴리는 발음이라고만 생각했었거든요. 그런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니까 궁금해진 겁니다. 내가 여태 영어를 20년 넘게 하고 있는데, 정말 가장 기본적인 영어의 O 발음도 제대로 못하고 있었나 하는 생각도 들고요.
예를 들어서, 얼마 전에 고객사와 미팅을 하면서 '내가 너네 일하는 것을 2주 정도 지켜보니까...' 이런 이야기를 할 일이 있었죠. 그때 제가 선택한 단어는 Observation이었습니다. 예전 같으면 이미 알고 있는 단어이니 사전을 찾아볼 생각을 하지 않았겠지요. 굳이 아는 단어를 사전을 찾는다면, 악센트의 위치가 가물거릴 때 정도였을 겁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아는단어도, 특히 O가 들어가는 단어는 한 번씩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 단어의 미국식 발음은 "압"저베이션 이더군요. 그걸 저는 여태 "옵"저베이션이라고 발음해왔던 거죠. 물론 그래도 알아 들는 사람은 알아듣겠죠. 아시아 사람들이랑 비즈니스를 많이 한 사람들은 아시아 사람들 특유의 발음 방식에 익숙해져 있으니까요. 그런데, 잘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특히 미국에서 미국 사람들 상대로 비즈니스를 하는 입장에서, 제가 하는 영어 발음이 완벽히 원어민과 같을 필요는 없겠지만, 그 차이가, 내용을 잘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발음이 부정확하면 문제가 되겠지요. 저랑 하는 회의에서, 제가 한 말을 다 못 알아들어도, 그렇게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지적을 해 줄 사람이 없다는 것도, 제 발음의 정확도와 미국 사람들의 이해도에 대해서 객관적인 데이터를 얻기가 힘든 이유기도 합니다.
물론 다들 아는 단어의 알파벳 O가 "아"로 발음되는 경우 많습니다. Power나 House처럼 친숙한 단어도 많고, Our처럼 늘 쓰는 단어도 그렇고, 쉬운 단어 가운데 무수히 많겠죠. 문제는, 이런 단어를 발음할 때는 그걸 의식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엔 이렇게 되지 않고, 그냥 한국식 "오" 발음이 나올 때가 많습니다. 제가 다니던 회사가 소프트웨어 운영체제를 만들던 회사입니다. 영어로는 Operating System이라고 하죠. 이 회사를 20년 넘게 다녔는데, 그냥 별생각 없이 "오"퍼레이팅 시스템이라고 발음을 해 온 것 같습니다. 근데 이 "한다" 사건 이후로 이제는 "아"퍼레이팅 시스템이라고 발음하고 있습니다. 미국 사람들 발음을 들어보니 다들 그렇게 발음하고요.
파닉스의 수많은 발음 규칙 가운데 딱 하나를 의식하기 시작하면서 단어의 발음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는데, 문제는 제가 무의식 중에 한국식으로 발음하고 있는 단어가 얼마나 많은지를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뒤늦게 파닉스 공부를 짬짬이 하고는 있는데, 또 많은 부분은 제가 잘하고 있단 말이죠. 문제는, 어느 정도까지 발음 규칙에서 벗어나야 '흠 이 사람 아시안 악센트가 좀 있네' 수준이 되는 거고, 어디서부터는 '방금 무슨 말을 한 거야?'로 넘어가는지 그걸 알 방법이 없다는 거죠.
근본 없이 배운 영어가 미국 본토에 와서 고생한다는 생각도 듭니다만, 뭐 하나씩 파닉스 규칙을 보면서 비교를 해 보는 수밖에 없겠죠. 이제 와서 누구한테 매일 수업 들어가면서 발음 교정을 받기엔 시간도 부족하고 지겹기도 할 거고요. 이래서 공부에는 다 때가 있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에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