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타이킴 Apr 26. 2020

등 떠밀려 새 출발

그런데 의외로 지낼만하다는

졸린 눈을 비비고, 찌뿌둥한 몸을 침대에서 일으켜 일층 부엌으로 갑니다. 찬장에서 유리 물컵 하나와 검은색 자기로 된 커피잔 하나를 꺼내, 습관적으로 싱크대 오른쪽 모서리로 갑니다. '아차, 얼마 전에 집사람이 커피 머신을 왼쪽 냉장고 옆으로 옮겼지.' 커피 머신에서 물통을 분리해 정수기 물을 담고, 커피 캡슐을 넣고 버튼을 누릅니다. 징~하는 소리와 함께 커피가 만들어지는 동안 냉장고를 열고 보리차를 물컵에 한가득 담습니다. 한 손에는 커피를 한 손에는 보리차를 들고 이층 서재방으로 들어와서 불을 켭니다. 책장 한편에 있는 상자에서 얼마 전에 산 보라색 향을 한대 꺼내, 반으로 자른 뒤 불을 붙입니다. 그리고 노트북 컴퓨터의 전원을 켜면 하루가 시작됩니다.


한 달 전부터 시작한 프로그래밍이 점점 속도가 붙어서 재미있습니다. 소프트웨어 업계에 몸을 담고는 있지만 프로그래밍을 언제 마지막으로 했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았습니다. 다시 프로그래밍을 시작한 것은 코로나 사태로 자택 대피령이 내려진 이후입니다. 항상 같이 모여서 운동도 하고 식사도 하고, 한 사람 집에 모여서 카드 게임도 하고 화투도 하는 부부 모임이 있는데, 서로 얼굴을 못 보니 화상 회의로 수다라도 떨자고 제가 제안했습니다. 스카이프로 화상 채팅을 하면서, 어떻게들 지내는지 이야기도 하고, 술도 마시면서 즐겁기는 했는데 앉으면 눕고 싶다고, 예전에 하던 카드 게임이나 화투 놀이가 그리워지는 겁니다.


나이롱 뽕이라는 화투 놀이가 있습니다. 저희 어머님이 화투를 좋아하셔서 가족끼리 고스톱도 하고 나이롱 뽕도 하곤 했었는데, 이 부부 모임에 저희 제안으로 도입을 하게 되었죠. 규칙이 단순하고 게임의 진행이 빨라서 모이면 꼭 한두 시간씩 하면서 즐겁게 시간을 보냈었죠. 아무리 인터넷을 찾아도, 온라인으로 모여서 할만한 게임을 찾지 못해서 제가 하나 만들기로 했습니다. 3주 만에 어설프게나마 결과가 나왔습니다. 스카이프로 모여서 얼굴 보면서 두어 번 했는데 꽤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요새는 하루 업무를 마치고, 그 프로그램에 새로운 기능을 넣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지난주에 게임하면서 아쉬웠던 것을 개선해서 다음 주 모임에 짜잔~하고 보여주는 거죠.


두 달쯤 전에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회의시간에 회사 이름을 이야기할 때 머뭇거립니다. 자꾸 옛날 회사 이름이 입에 맴돌아서죠. 두 달이 좀 넘었으니 내가 새로운 회사로 옮겼다는 것은 실감이 나는데, 20년 넘은 습관까지 바꾸려면 시간이 좀 더 있어야 하나 봅니다. 특히나, 새로운 회사로 출근하고 한 달도 되지 않아서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가 터지면서 재택근무를 하기 시작했으니, 새로운 사무실이나 새로운 동료들과 친해질 시간이 부족해서 더 그런지도 모르겠네요.


자의로 회사를 옮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1월 초에 라스베이거스에서 힘들게 CES 업무를 마치고, 주말에 집에 돌아와서 겨우 숨 돌리고 월요일에 사무실에 출근한 날 아침 9시의 첫 회의에서 정리해고 통보를 받았습니다. 10시 정도까지 들을 이야기 다 듣고 나서, 이제 퇴근해서 집에 가도 된다고 하는데, 아직 정리할 것이 많다는 핑계를 대고 억지로 6시 정도까지 사무실에 남아있었습니다. 당황한 마음에 일이 손에 잡히지는 않았지만, 그 시간에 아무도 없는 집에 돌아가는 것보다는 그게 나았으니까요.


회사에 대해서 섭섭한 마음이 컸지만, 누구 탓을 한다고 돌이킬 수 있는 일도 아니라고 생각해서 감정적인 부분은 잘 추스른 것 같습니다. 회사 욕도 같이 해주고, 그동안 고생 많았다고 격려도 해주고, 앞으로 뭐 할 건가 아이디어도 짜면서 제 곁을 지켜주었던 친구들 덕이 컸습니다. 나이도 꽤 먹었는데 이제 와서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방식으로 직장 생활을 시작하는 것보다는, 오래전부터 생각만 해오던 비즈니스 아이디어를 잘 다듬어서, 내 사업을 시작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심정은 이해하지만 충분히 준비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감정적으로 판단을 내리는 것은 좋은 결과를 내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저를 아껴주는 사람들의 조언이 거의 비슷했습니다. 마침 좋은 기회가 와서 2월 중순경에 새로운 곳에 취직을 하게 되었는데, 지금의 코로나 사태를 생각해보면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입니다.


3년 전 1월에 LA 공항에 세 식구가 설레는 마음으로 미국에 도착했습니다. 미국 발령이 결정되고 나서, 정말 간절히 원하면 아무리 늦은 나이에라도 꿈은 이루어진다고 가족과 친구들에게 우쭐댔습니다. 미국 와서, 매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전 세계 직원들과의 회의에도 신나서 일을 했었죠. 누가 일 시키기 전에 뭐 하나라도 회사에 도움이 될만한 일을 찾아서 했습니다. 후회 없이 일을 했던 즐거운 시간이지만, 정리해고라는 망치로 뒤통수를 한번 세게 맞고는, 제 생활을 뒤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때처럼 일을 하지는 않습니다. 아직도 주어진 일은 열심히 합니다만, 제 마음속에는 선이 하나 생겼습니다. 어릴 때 짝꿍과 싸운 뒤에 책상 가운데 선을 긋던 것과 비슷한 심정이랄까요? 이십몇 년 간 같은 회사에서 직장생활을 너무 즐겁게 하면서 눈에 씌웠던 콩깍지를 이제야 벗겨냈다고 할까요? 예전에는 아침에 눈뜨면 휴대폰으로 회사 이메일 확인하고, 첫 회의하기 전에 허겁지겁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유럽부터 시작해서 미국 쪽 회의, 그리고 저녁에는 아시아 쪽과 하는 회의까지 마치면 하루가 저물었죠. 


지금은, 회사 휴대폰은 침대로 가져오지도 않습니다. 아침에 눈뜨면 커피 한잔을 들고 컴퓨터를 켜는데, 역시 회사 컴퓨터는 아닙니다. 제가 보통 6시 좀 넘으면 일어나는데, 컨디션에 따라서 글을 쓰거나, 책을 읽거나 혹은 프로그래밍에 도움이 될만한 사이트에서 공부를 하거나 합니다. 보통 첫 회의가 8시 반 정도에 시작합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시간이 8시 약간 넘었으니, 이제는 글쓰기를 슬슬 마무리하고, 회의 준비를 해야 할 시간이죠. 아침 회의가 끝나고 업무를 보다가 오후에 적절한 시간이 되면, 다시 제 일을 보기 시작합니다. 산책을 하기도 하고, 책을 보거나 나이롱 뽕 프로그램을 손질하기도 하고요.


어떤 시작은 우쭐하고 설레고, 어떤 시작은 부끄럽고 참담하기도 합니다. 올 초의 사건이 없었더라면 제 하루의 모습이 지금과 많이 달랐겠죠. 제 인생의 가장 큰 좌절을 겪고 등 떠밀리듯이 한 새 출발인데, 새 옷을 입은 것처럼 뻐시럭 거리기는 하지만, 산뜻한 느낌도 있어서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