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도 관심 없던 정치를 미국에 와서야 보기 시작한...
한국에 살 때, 친하게 지내던 형님이 계셨습니다. 고등학교 때 미국에 이민을 가서 대학을 마치고 직장생활을 하다가 한국 지사를 맡아서 들어온 분이죠. 미국 시민권자인 이 형님은 투표권도 없으면서 대한민국의 정치에 매우 관심이 많으셨고, 아주 뚜렷한 본인의 호불호가 있어서, 친하게 지내는 동생들과도 자주 열띤 논쟁을 벌이곤 했습니다. 그때는 좀 이해가 가지 않았죠. 엄밀히 말해서 투표권도 없는 미국 사람인데, 왜 이렇게 한국 정치에 깊은 관심과 때로는 과한 열정을 갖고 본인의 주장을 하시는지요.
저는 원래 정치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대학생 때 어설프게 데모 따라다니던 것이나, 1학년 때 병영 집체 교육 (문무대 입소)을 반대하는 시위에 참가했다가 교련 과목 점수를 엉망으로 받거나 한 것도, 어떤 생각이 있어서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후에 졸업하고 먹고 사느라 바쁘게 지내다가,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 좀 관심을 갖고 후원에 참여를 한 것도, 역시 무슨 대단한 의지를 갖고 했다기보다, 사람됨에 끌려서 거의 충동적으로 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겁니다. 그 후에 벌어진 여러 가지 일들로 정치에 대한 환멸을 거쳐 다시 무관심으로 돌아섰고, 이제는 미국에 살고 있으니, 더더욱 한국 정치에 관심을 가질 일이 없었죠.
제가 미국에 오던 겨울이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되고 취임한 때입니다. 한국 정치에도 관심이 없었으니 미국의 정치 판도에는 더더욱 관심이 있을 리가 없죠. 그런데 어쩔 수 없이 그 상황을 민감하게 볼 수밖에 없게 만든 일이 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을 하자마자 가장 강력하게 드라이브한 정책들 가운데 하나가 반이민 정책입니다. 제가 사는 샌디에이고에도, 멕시코와의 국경에 불법 이민자들을 막기 위한 벽을 건설하는 내용이 계속 TV 뉴스에 나오고 있었죠.
회사의 지원으로 주재원 비자를 받아서 가족과 함께 미국에 온 제 입장에는 불안한 내용이 계속 뉴스에 나오니, 미국의 정치 상황에 관심을 갖고 지켜봐야 하는 상황이 된 겁니다. 결국은 그 상황을 핑계로 회사의 인사부에 요청을 해서 영주권 신청을 하게 되었고, 1년 반 정도 후에 영주권이 나와서 지금은 안정적인 신분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정책에 불안감을 느껴서 비자에서 영주권으로 전환을 한 덕분에, 올 초에 그 회사에서 떠나게 된 후에도 좀 여유를 갖고 다음 스텝을 고민할 수 있었던 것을 보면, 오히려 그 양반한테 고마워해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그런 이유로 미국에 와서 미국 정치판을 보게 되면서, 처음에 느꼈던 것은 역시 선진국은 좀 다르구나 하는 부러움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의 국회에서 수시로 벌어지는 동물의 왕국을 지켜보다가, 미국의 상하원에서 벌어지는 점잖은 비난과 정책 토론을 보니 격이 다르게 느껴졌던 거죠. 근데 그것도 잠깐이고, 점점 미국의 대통령이라는 양반이 하는 행동과 언행을 보니, 선진국이라는 미국의 정치 수준이 우리와 크게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더니, 최근에는 그 뻔뻔함의 정도가 감히 넘볼 수 없는 수준이라고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덕분에 오히려 예전 오바마 대통령에 대해서 관심을 좀 더 갖게 되었습니다. 이분에 대해서는 일본과 한국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좀 부정적인 평가가 있다고 하던데, 그 부분은 제가 어떤 의견을 가질 만큼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제 관심을 끈 부분은, 이 양반이 말을 너무 잘하는 것 같아서, 그걸 배워보고자 오바마 대통령의 연설을 모은 책을 살 정도였습니다. (백악관 스피치라이터가 뽑은 오바마 대통령 최고의 연설, 베이직 컨텐츠하우스, 2017) 책 자체는 기대에 비해서 많은 도움을 받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그걸 계기로 오바마 대통령이 했던 연설 동영상들을 찾아보게 되었죠.
2015년 사우스 캐롤라이나주의 찰스턴이라는 도시에서, 젊은 백인 청년이 흑인들이 주로 다니던 교회에서 총기를 난사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사건으로 9명이 사망했고, 그 가운데 한분이 클레멘타 피크니 목사님이었죠. 그 목사님의 추도식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직접 추도사를 했는데, 이 연설의 마지막 부분에 그 유명한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부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38분짜리 전체 동영상은 https://www.youtube.com/watch?v=x9IGyidtfGI 인데, 고급 영어를 공부하고 싶으시면 전체를 다 보시면 되고, 전설의 그 어메이징 그레이스 장면만 보고 싶으면 35분 정도부터 보시면 됩니다. 영어 한마디 한마디를 얼마나 꾹꾹 눌러서 진심을 담아서 이야기하는지, 어떤 부분에서 간격을 두고 강조와 감정 조절을 하는지 참 부러울 따름입니다. 오바마 대통령의 임기말 무렵이고, 본인의 임기 동안 하고 싶었던 많은 긍정적인 비전을 실현하지 못한 아쉬움, 그리고 그 가운데 대표적인 문제인 인종 간의 갈등에 대한 회한이 겹쳐지면서 더욱 절절한 연설이 되었을 거라는 평가도 있더군요.
저는 미국의 인종문제에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워낙 우리나라가 단일민족 국가라서 그런 일을 겪을 일이 별로 없어서기도 하고, 제가 오래 일했던 미국 회사도, 실리콘 밸리의 소프트웨어 회사라서 그런지 아시아인이던 흑인이던 피부 색깔로 차별을 받는다고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동양인 고위 임원이 회사에 많지 않은 것은 아쉽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의도적인 차별에 의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고요. 제가 마지막으로 그 회사에서 모셨던 보스이자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의 사장님도 흑인인데, 젊고 의욕과 비전도 있고 능력도 인정을 받아서 앞으로도 계속 잘 나갈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우리나라와 북한이나 일본 혹은 중국과의 복잡 미묘한 관계를, 우리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잘 알지 못하고 별 관심도 없는 외국 사람들이 보면 갸우뚱하듯이, 저도 아직 그렇게 피부에 와닿게 미국의 인종차별 문제를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인종차별 문제는 미국의 역사와 문화를 잘 이해하고, 여기서 나고 자란 사람들, 그리고 특히 백인이 아닌 사람들에겐 매우 현실적인 문제일 겁니다. 그러나 그런 부분을 떠나서, 미국의 역사와 문화를 잘 모르는 이방인인 제 입장에서, 한 나라의 지도자가 이런 사안에 대해서 어떻게 공감을 하고 어떤 의견을 내는지만 봐도, 그 사람의 격이 보입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미국은 지금 굉장한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고 봐야 하겠죠.
비전과 공감능력이 있는 지도자라면, 이런 논란과 분열의 혼란에서도 긍정적인 에너지를 이끌어내는 메시지를 줄 수 있어야 할 겁니다. 그런 면에서 얼마 전에 오바마 대통령의 코멘트가 매우 인상 깊었습니다. 지금은 많이 평화적으로 진정이 된 것 같습니다만, 조지 플로이드의 사망으로 촉발된 시위가 폭력으로 얼룩졌을 때, 그리고 제가 사는 샌디에이고에서도 마침 흑인 청년이 트롤리를 기다리다가 별 이유도 없이 백인 경찰에게 체포되어 끌려가는 장면이 페이스북에 올라가서, 샌디에이고에서도 시위가 격화되고 주 방위군이 출동하는 일이 벌어졌을 때는, 이러다가 큰일이 나는 것 아닌가 하고 걱정이 될 정도였습니다.
6월 초에 미국의 경찰 개혁에 대해서 관계자들이 모여서 약 한 시간 반 정도 진행한 온라인 논의에 오바마 대통령이 참여해서 본인의 의견을 피력했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q_qB6SsErpA) 저처럼 문외한도 미국의 뿌리 깊은 인종문제에 대해서, 그리고 정치의 의미에 대해서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깊이 있고 설득력 있는 이야기가 많았는데요, 이 영상의 제일 마지막 부분에 보면 현재 미국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시위를 보는 의미 있는 시각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And for those who have been talking about protests, just remember, this country was founded on protest. It is called the American revolution. And every step of progress in this country, every expansion of freedom, every expression of our deepest ideals, has been won through efforts that made the status quo uncomfortable. And we should all be thankful for folks who are willing in a peaceful, disciplined way to be out there making a difference.”
"시위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가 있는데요,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나라는 시위(저항)에 의해서 탄생했다는 것을요. 미국 독립 혁명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나라에서 벌어진 모든 진보, 자유의 확대, 강렬한 이상의 표현 등은 현재의 상태를 불편하게 만듦으로써 얻어졌습니다. 현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 평화롭게 질서를 지키면서 바깥에 나와서 시위를 하는 분들에게 모두들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미국의 대통령 선거는 간접선거 방식입니다. 따라서 선거인단이 선출되는 11월 3일이 실질적으로 차기 대통령이 정해지는 날입니다. 5개월도 남지 않았는데, 깊은 관심을 갖고 지켜볼 생각입니다. 대한민국의 촛불시위가 그랬듯이, 미국에서도 이번 일을 계기로 뿌리 깊은 인종 간의 갈등 문제가 건설적인 방향으로 해결되기를 기대합니다. 또한 개인적으로, 이번 일 덕분에 미국의 인종간 갈등, 역사와 문화, 대통령 선거, 그리고 그에 이어지는 정치의 현실적인 역할과, 그에 비추어진 한국의 상황에 이르기까지 보다 깊은 관심을 갖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환멸이라는 변명 뒤에 숨은 무관심으로는, 불합리한 사회에 대해서 어쩌고저쩌고 할 자격도 없을 테니까요. 그것이 미국이던 한국이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