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랄라~ 라랄라~
제가 요새 읽고 있는 책이 있습니다. The Servant라는 책인데 A Simple Story About the True Essence of Leadership이라는 부제가 붙어있습니다. 리더십에 관한 책인데 딱딱하지 않고 이야기 형식으로 되어있어서 아침마다 30분 정도씩 정독하고 있습니다. 1998년에 나온 오래된 책인데, 우리나라에는 2013년에 시대의 창에서 “서번트 리더십: 내 안의 위대한 혁명”이라고 번역이 되어서 나와있네요.
그 책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고요, 오늘 아침에 읽은 부분에, Simeon(시몬)이라는 수도사가, 회사를 운영할 때 종업원을 섬기는 리더십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하자 한 사람이 반론을 제기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I think you’re living in la-la land, Simeon.” (시몬, 그건 라라랜드에서나 있을법한 이야기잖아요)
La La Land는 2016년에 개봉한 뮤지컬 영화로 각종 영화제에서 상도 많이 받았고, 라이언 고슬링과 엠마 스톤도 연기를 잘해서 흥행에도 성공한 영화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여기서 라라랜드는 영화의 배경이 된 LA를 의미하는 애칭이기도 하고, 여주인공 미아(Mia)의 꿈이 할리우드에서 성공한 배우가 되는 것인데, 그게 약간 좀 비 현실적인 꿈이라는 의미도 담겨있고, 또 두 사람이 알콩 달콩한 사랑을 하다가 헤어지고 결국 마지막에 달콤 쌉싸름하게 짧게 재회하는 장면을 보면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의 의미도 있지 않을까 혼자 짐작해봅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제가 아주 재미있게 봤던 또 다른 영화가 떠올랐습니다. Crazy Stupid Love라는 2011년 여름에 개봉한 코미디 영화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개봉을 안 했는데요, 5천만 불 투자해서 거의 그 세배에 해당하는 수입을 올린 영화입니다. 미국 드라마 오피스에서 아주 꼴통 진상 지사장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해낸 스티브 카렐 (Steve Carell)이 제작과 주연을 맡아서, 방황하는 중년 남자의 역을 참 재미있게 잘 표현했습니다. 거기에 보면 라이언 고슬링과 엠마 스톤이 연인으로 나오면서 이 영화의 막장성을 끌어올려주는 역할을 합니다.
다시 라라랜드로 돌아가서, 이 lala라는 표현이 약간 정신 나간 사람이 내는 소리를 의성어로 표현한 것이라 제정신이 아니다라는 의미도 있고, 또 가끔 영화 같은 곳에서 보셨겠지만 미국에서 (주로 어린이들이) 뭔가 듣기 싫은 이야기를 듣지 않기 위해서 귀를 막고 입으로는 다른 소리를 내는데 그때 내는 소리도 라~라~입니다. 그래서 뭔가 현실과 동떨어진, 뭐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그런 뉘앙스를 갖게 되었다고 설명이 나옵니다.
로스앤젤레스는 천사의 도시라고 하죠. 이 지역을 발견한 스페인의 신부님이 로스앤젤레스 강을 보고 지은 이름이 원래 “Saint Mary of the Angles at the Little Portion”이라고 합니다. 1769년 8월 2일, 그 신부님의 일기에 북위 34도 10분에 있는 아름다운 강을 발견하고 붙옅다고 나오는 이름인데요, 8월 2일이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 “포르치운쿨라의 천사들의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 축일”이라고 부르는 날이라고 해서 그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주가 되는 성모 마리아의 이름은 빠지고 천사들만 도시의 이름에 남았네요.
LA를 가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이 유명한 도시의 첫인상이 대단히 실망스럽습니다. 그 오래된 노래(세샘 트리오, 1978년 곡, 나성에 가면)에도 나올 정도로 유명한 도시잖아요. 노래 가사에도 보면 푸른 하늘 이야기도 나오고 꽃모자를 쓰고 사진을 찍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이 꽃모자 부분의 가사에서 lala의 그 라랄라~하는 밝지만 왠지 비현실적인 이미지가 떠오르기도 합니다만, 사실 이 노래는 이별노래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LA를 가는데 함께 못 가게 되어서, 가면 편지를 보내달라고 하는 슬픈 가사입니다. 원래 LA에 가면이라고 가사를 붙였는데 당시 영어를 못쓰게 하는 당국의 규정에 걸려서 나성에 가면으로 고쳐서 다시 녹음했다고 하는, 그 당시의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일화도 있는 노래지요.
노래의 가사대로, LA 공항에 내려서 바깥에 나오면 참으로 눈부시게 푸른 하늘이 긴 비행에 지친 여행객을 반겨줍니다. 여기까지는 영화에서 많이 봤고 마음속으로 그려봤던 로스앤젤레스의 모습이 맞습니다. 그런데 막상 차를 타고 시내, 그리고 특히 혹시 숙소를 코리아타운 쪽에 잡으셨다면, 대략 그 나성에 가면이라는 노래가 발표된 시점에서 한 10년 정도 후의 우리나라 80년대, 아니면 많이 쳐줘서 90년대쯤에 멈춰진 것 같은 오래된 도시의 풍경을 보게 됩니다. 길거리에 유난히 노숙자들(Homeless)들도 많아서 무서운 느낌마저 들기도 하지요.
물론 그 후에 유명한 관광지를 다니면 좀 마음이 풀어지기는 합니다. 정말 별거 없지만 할리우드에 가서 스타들의 이름이 새겨진 플레이트 위를 걷거나 비벌리 힐스 근처를 드라이브하면서 저기 어딘가에는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유명한 사람들이 살고 있겠지라고 생각하면서 드라이브를 하다 보면, 마음속의 LA와 살짝 비슷해질락 말락 하긴 합니다. 하지만 너무나 현실감이 없어서, 왜 LA를 라라랜드라고 부르는지, 그리고 왜 할리우드에서 유명한 영화배우가 되고자 하는 것이 비현실적인 꿈이라고 하는지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화려한 영화가 만들어지는 도시와 실제 우리의 눈에 비치고 내가 매일매일을 지내는 도시가 잘 매치가 되지 않으니까요.
저도 그렇고 저희 집사람도 그렇고 LA에 가서 가장 좋았던 곳이 게티 뮤지엄(The Getty)이라는 곳이었습니다. 폴 게티라는 석유재벌이 수집한 그림, 가구, 조각을 전시한 곳인데, 제가 그런 쪽에는 문외한이라 수집품에 대해서는 뭐라고 할 것이 없는데요, 그 장소의 고즈넉함과 여유가 너무나 좋았습니다. 건물들도 멋있고, 실외의 정원도 아름답지만 특히나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는 LA 시내의 모습과 멀리 보이는 바다의 풍경은, 번잡한 일생 생활을 떠나서 마음을 차분하게 해 주는 조용한 매력이 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샌디에이고는, 특별히 다운타운 지역에 살지 않는 한 그냥 지역 자체가 매우 한적하고 평화로운 곳입니다. 어디 따로 찾아서 가지 않아도 하루하루가 아무런 드라마가 없는 조용한 동네입니다. 일주일 열심히 일하고 주말에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골프장에서 지인들과 골프 치면서 맥주 한잔하고, 가끔 한인마트나 코스트코에 장 보러 가는 것이 일상 생활이지요.
지금은 코로나 사태로 더욱 이렇게 조용히 지내지만, 그 전에도 뭐 대단하게 다른 것은 없었습니다. 골프를 마치고 누구네 집에 모여서 카드놀이를 하면서 술을 마시고, 가끔씩 팜스프링스나 라스베이거스로 놀러 가는 일이 없어진 것인데 뭐 그 전에도 그렇게 대단히 뭘 하지는 않았거든요. 물론 전에는 사무실에 출근을 했으니 사람들과의 만남도 많았고, 그러다 보면 가끔은 술자리도 하고 그랬는데요, 그것도 아주 가끔 많은 사람이 모이는 워크숍 끝나고 하는 특별한 회식이라던가 혹은 개인적으로 친한 동료와 한잔 가볍게 하는 수준이었죠.
한국에 있으면, 사실 어느 정도 사회생활을 한 사람이라면, 마음만 먹으면 일주일 내내 회식과 술자리를 갖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오히려 마음을 먹고 큰 노력을 해야 일주일 내내 집에서 가족과 저녁을 먹을 수 있죠. 순수하게 업무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같이 일하는 동료, 상사 그리고 부하 직원과의 관계이고, 제품이나 서비스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사석에서 쌓이는 거래처와의 인간적인 관계나 신뢰인 경우가 많습니다.
얼마 전에 한국에서 친한 동창이 부친상을 당했다는 소식에 단톡 방이 잠깐 북적였습니다. 문상도 문상이지만 워낙 중고등학교부터 쭉 친했던 친구들이라 보통 부모님 상을 당하면 저희가 운구를 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저희 아버님 돌아가셨을 때도 이 친구들이 운구를 해 줬었고요. 아침에 발인이라 새벽까지 가서 대기하고 있어야 하는데, 뭐 저야 미국에 있으니 고생한다는 말만 해 주고 말았습니다.
저는 미국에 와서도 아버님 제사랑 차례를 모시는데요, 얼마 전 설날에도, 한국 시간 아침에 맞춰서 이곳에서 오후에 저희끼리 조촐하게 차례를 모시고, 한국에 계시는 어머님이랑 장인, 장모님, 고모님 그리고 작은 아버님까지 전화로 인사를 드렸는데, 저희 어머님이나 처갓집이야 서로 평소에 소식을 전하니 전화로 길게 이야기할 것이 없고, 다른 친척분들은 워낙 멀리 살고 소식도 잘 모르고 하니 짧게 안부인사만 주고받는 정도라서 역시 길게 통화할 일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짧고 조용한 설날 명절을 마치고 바로 일상으로 복귀했습니다. 목요일 저녁이 한국 시간 설날이었고, 금요일 아침부터 늘 하던 대로 전화와 화상회의로 업무를 했고요, 토요일은 골프장에 가서 늘 보던 지인들과 라운딩을 하면서 즐거운 하루를 보냈죠. 일요일은 골프도 하고 책도 보고 영화도 보면서 푹 쉬었고, 월요일은 다시 아침부터 회의를 하는 일상이 시작됩니다.
제가 느끼는 라라랜드는 이런 평화로움이 아닌가 싶습니다. 부정적인 의미에서 눈과 귀를 막고 일상과 동떨어지는 비 현실성과는 좀 다른, 하루하루 분명히 현실에서 살되, 또 반대로 너무 깊이 몰입하지 않는 이런 고즈넉함 이죠. 한국에서 살 때는 하루하루가 너무나 많은 사건과 드라마로 채워져 있었다는 느낌이라면, 미국에 와서는 그런 각종 이벤트 및 거기에서 비롯되는 감정의 동요가 현저하게 줄어든 것입니다.
불교에서 출가를 한다는 것은 소유했던 것을 버리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어떤 소원이든 다 들어주겠다며 출가를 만류하는 부왕에게 태자 싯다르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네 가지 소원을 들어주신다면 출가하지 않겠습니다. 아버지, 영원히 젊음을 누리며 늙지 않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출가하지 않겠습니다. 아버지, 영원히 병들지 않고 건강하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출가하지 않겠습니다. 아버지,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출가하지 않겠습니다. 아버지, 사랑하는 사람들과 영원히 이별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출가하지 않겠습니다. 이런 고통을 두 번 다시 겪지 않게 해주실 수 있다면 출가하지 않겠습니다.”
저희 일반인들이 이렇게 자기 존재의 본질을 찾기 위해서 출가를 감행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정신을 빼놓는 현실에서 좀 벗어나야 좀 더 근본적인 것들이 보이는 것도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즐겨보는 TV 프로그램 중에 자연인들이 나오는 것이 있습니다. 건강을 찾기 위해서 산속에 들어가신 분들도 있고, 경제적인 이유로 세상을 버리고 산에 터를 잡으신 분들도 있습니다. 젊고 잘 나가는 공학도 부부가 삶의 다른 면을 보기 위해서 불편한 산중 생활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더군요.
저는 어찌 보면 몇 년 전에 미국에 이민을 오면서, 그동안의 삶과는 좀 달라진 방식을 경험하게 되었고, 특히나 코로나 사태로 외부와의 접촉이 최소화되면서 더욱더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시간이 많아졌다고 하겠습니다. 처음 몇 년은 출장도 굉장히 많아서, 업무적으로 보면 여전히 정신없이 바쁘고, 복잡하게 얽힌 다양한 국적의 직장 동료들이나 고객사 또는 파트너 회사 사람들과 얽혀 지내면서, 한국에 있던 시절 못지않게 정신없이 지냈었죠. 물론 그런 와중에도 출장을 다니지 않을 때는 항상 가족과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요. 그리고 일 년 전에 본의 아니게 직장을 옮기게 되고, 그리고 그 직후에 코로나 사태가 터지면서, 거의 출가생활수준으로 현실의 세계가 조용해지면서 스스로의 위치와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하는지 돌아보는 일 년을 보냈습니다.
음… 라라랜드로 라랄라~하고 시작했다가 좀 너무 이야기가 무거워졌습니다만, 뭐 급하게 마무리를 하자면, 일상과 떨어져서 현실성이 없다는 것은 반면에 나를 온통 흔들어서 본질을 돌아보기 힘들게 하는 생활의 굴레에서 빠져나와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많이들 힘들어하시는데, 건강하게 잘 이겨내면 비 온 뒤에 땅이 더 굳어지듯이 좀 더 중심을 잡고 삶을 사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