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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이킴 Jan 25. 2020

미국 회사에서 포지션별 업무

내가 잘하는 일 혹은 좋아하는 일

이제 곧 떠나게 되었지만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에서 22년을 다니면서 매우 다양한 포지션에서 다양한 일들을 해 왔습니다. 같은 회사에서 22년이나 다니면 지겹지 않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다행히 저는 22년 동안 한 가지 업무만 한 것이 아니고 꽤나 다른 분야와 다른 성격의 업무를 할 수 있어서, 지겹다는 느낌 없이 즐겁게 회사 생활을 했습니다.


처음에 입사는 필드 애플리케이션 엔지니어 (Field Application Engineer: FAE) 포지션이었습니다. 공대 졸업하고 한국에 진출해있는 외국인 회사에 취업할 때 가장 많이 보이는 있는 자리입니다. 기술에 대한 이해와 현장에서 고객 관련 응대 둘 다 필요한 자리입니다. 예를 들어 자기가 리눅스 기반의 소프트웨어 개발에 관심이 많지만, 그냥 연구소에서 죽치고 앉아서 개발만 하는 것보다는 실제 고객 프로젝트를 지원하면서 사람들도 만나고 다양한 경험도 하는 것이 좋다면 잘 맞는 일자리입니다.


근데 저는 이 일을 하다 보니, 저랑 한 팀으로 다니는 영업 담당자의 일이 좀 더 재미있어 보였습니다. 저희 회사에서는 영업 담당자를 어카운트 매니저 (Account Manager: AM)이라고 부르는데, 이 말은 특정 어카운트, 즉 고객을 담당하는 책임자라는 의미입니다. 삼성 어카운트 매니저, LG 어카운트 매니저, 현대 어카운트 매니저 뭐 이런 식이죠. 물론 그 회사에서 발생되는 매출을 책임져야 하고 그에 따라서 월급도 오르락내리락 춤을 춘다는 스트레스는 있지만, 제 눈에는 특정 회사에 대한 영업 전략을 짜고, 회사에서 필요한 지원을 받아내고, 이를 실행하고, 그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일련의 과정이, 마치 회사 내의 조그만 독립 기업처럼 보였던 거죠.


근데 이 일을 몇 년 하다 보니 다른 회사에서 컨트리 매니저 (Country Manager) 포지션으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습니다. 미국의 소프트웨어 스타트업이 한국에 지사를 처음 여는데 그 자리를 제안받은 겁니다. 어카운트 매니저는 특정 회사를 맡아서 일을 하지만, 그 위의 컨트리 매니저는 한국 전체의 영업에 대한 책임자이니 당연히 더 매력적인 포지션이죠. 근데 이 일은 9개월 정도만에 접고 다시 원래 회사로 돌아왔습니다. 비즈니스가 생각보다 잘 되지 않아서, 지사를 철수하고 대리점에게 업무를 맡기기로 한 겁니다. 잠시 떠나 있는 동안 좋은 사람도 많이 만나고 경험도 많이 했지만, 가장 크게 배운 것은 제가 들고 다니는 명함의 의미였습니다. 어떤 비즈니스가 이루어질 때, 그것이 명함에 있는 제 이름 때문이기보다는, 명함의 회사 이름이 훨씬 더 크다는 것이죠. 잘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인데, 원래 다니던 회사에서는 투철한 애사심과 자부심 때문인지 회사와 저를 일심동체로 생각했던 듯한데, 바깥에 나가서 같은 사람이지만 전혀 이름 없는 스타트업 회사의 명함을 들고 비즈니스를 해 보면서 차가운 현실을 깨달은 거죠. 스스로가 호랑이라고 믿고 있었는데, 결국 호가호위하는 한 마리 여우에 불과했었나 하는 씁쓸한 경험이었습니다.


다행히 떠난 지 오래되지 않았고, 현직에 계시던 컨트리 매니저께서 여전히 저를 예쁘게 봐주셔서 얼른 원래 다니던 회사로 복귀하게 되었습니다. 복귀 후에 좀 다른 일을 하게 되었는데, 서비스 세일즈 매니저 (Service Sales Manager)라는 업무였습니다. 보통 회사의 제품 (Product)을 팔게 되는데, 이 포지션은 서비스, 좀 더 정확하게는 프로페셔널 서비스 (Professional Service)를 파는 일입니다. 우리말로는 기술 용역, 즉 만들어진 제품을 파는 것이 아니고 고객의 요구사항에 맞춰서 새로운 기술을 개발해주는 그런 종류의 비즈니스입니다. 이 일이 재미난 이유는, 제품이라는 것은 물론 세월에 따른 시장의 요구사항의 변천에 따라서 바뀌기는 하지만, 그래도 정해진 형태와 쓰임새가 있는 데 반해, 서비스는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서, 비즈니스의 자유도가 아주 높다는 매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회계용 소프트웨어가 필요할 때 마이크로소프트 액셀을 사서 쓸 수도 있지만, 사람을 고용해서 내 필요에 맞는 회계용 소프트웨어를 만들어달라고 할 수도 있는 것과 비슷하죠.


이 일 이후에 제가 맡은 것은 솔루션 아키텍트 (Solution Architect)라는 일인데, 위에서 나온 포지션들이 대부분의 외국인 회사에서 흔하게 있는 자리라면, 이런 일자리는 있는 회사도 있고 없는 회사도 있는 것 같습니다. 잡 타이틀이 좀 어렵지만 뭐 업무 자체는 다들 하는 일입니다. 고객의 상황에 맞추어서 가장 적절한 솔루션을 구상하고, 제안서를 만들고, 협상을 하는 등 비즈니스를 지원하는 역할이죠. 그때 저희가 한참 모바일 솔루션에 크게 투자하고 있을 때라서, 좀 더 전문성을 갖고 기술 영업을 지원하기 위해서 만든 신규 포지션이었습니다. 제가 이 일에 매력을 느낀 것은, 필드 엔지니어로 입사해서 기술적인 부분을 계속 보다가, 한동안 너무 영업일만 하다보니 다시 기술 쪽 일이 그리워지더군요. 영업을 하면서도 기술에 대한 끈을 놓지 않고 계속 보고 있던 것도 그렇고, 아마도 제 안의 엔지니어 본능이 저를 좀 더 제 적성에 맞는 포지션으로 유도를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때 제 커리어에서 어떻게 보면 가장 큰 전환점이 생깁니다. 회사가 모바일 사업을 보다 잘하기 위해서 인수합병을 추진했는데, 그때 산 회사가 한국에 있는 모바일 리눅스 전문 벤처기업이었거든요. 그래서 거기 센터장으로 다른 분이 계셨었고 저는 그 팀과 밀접하게 일을 하는 솔루션 아키텍트였는데, 그 센터장님이 다른 곳으로 떠나게 되고, 저는 정말 전혀 예상치도 않고 있었는데, 제가 그 자리를 맡게 된 겁니다. 크게 봐서 두 가지 정도의 요소가 고려됐다고 생각하는데, 첫째는 제가 한국에 근무하는 사람들 가운데 교포분들 빼고는 가장 영어를 편안하게 하는 사람이었다는 점입니다. 둘째는 비즈니스 경험과 더불어 기술적인 백그라운드가 있고 여전히 현장에서 기술 관련 업무를 하는 사람이라는 점이, 원래 영업 사무실 출신인 제가, 50명도 넘는 개발팀을 관리하는 매니저 자리에 발탁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간 그 자리의 공식적인 명칭은 딜리버리 디렉터 (Delivery Director)라는 포지션인데, 외국인 회사의 업무나 직제를 잘 모르시는 분들이 아주 헷갈려하는 잡 타이틀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기서 포인트는 딜리버리라는 말의 의미인데요, 음식 배달하시는 분들의 업무가 고객이 주문한 음식을 신속, 정확하게 그리고 손상 없이 잘 전달해 드리는 것 아닙니까? 이 포지션도 비슷한데 음식 대신에 위에서 이야기한 프로페셔널 서비스, 즉 고객이 돈을 지불하고 이런저런 기능을 갖는 소프트웨어 솔루션을 만들어 달라고 주문을 하면, 그걸 책임지고 제시간에 좋은 성능과 품질로 개발해서 납품을 하는 것을 책임지는 자리라는 의미입니다.


제가 그 일을 4년 정도 했는데요, 이 회사에서 보낸 22년 가운데 가장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고, 심지어 끊었던 담배를 다시 시작할 정도로 힘들었던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힘든 일을 다른 직원들과 같이 견디면서 가족처럼 친해지고 보람도 느끼고, 그러는 과정에서 정말 재미있게 일했던 4년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가 지금 미국에 와서 살게 된 계기를 마련해준 포지션이었기에 더 특별한 기억입니다. 그 일을 하다가, 회사가 비즈니스 전략을 모바일에서 자동차 쪽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본사의 매니지먼트에 변화가 생겼고, 외부에서 새로 오신 보스와 호흡을 잘 맞춰서 일을 하다가, 결국은 본사에서 글로벌 개발팀을 관리하는 자리로 오게 된 겁니다.


샌디에이고에 2017년 1월에 이사를 온 후에, 한국의 개발센터에 있던 50여 명 외에, 유럽의 개발팀까지 해서 대략 90명 정도의 엔지니어와 프로젝트 매니저들을 관리하는 업무를 맡았는데, 하는 일이 크게 두 가지가 바뀌었습니다. 그 전에는 고객 요구사항에 맞춰서 프로젝트를 하는 서비스 딜리버리만 했었는데 미국 와서는, 제품 개발도 맡게 되었습니다. 이 경우엔 외부 고객이 아니고 내부 고객인 제품 전략팀의 요구사항에 맞춰서 소프트웨어 솔루션을 개발한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업무의 차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더 자세히 쓰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한 가지 변화는, 한국 사람뿐 아니라 외국 사람들에 대한 인사 관리도 하게 되었다는 부분입니다. 제가 한국에서 사람을 관리하는 방식은, 시스템적인 부분보다는 인간적으로 많은 대화를 통해서 사람대 사람으로 서로 이해의 폭을 넓히고, 이를 바탕으로 그 사람에게 맡는 업무를 맡기는 방식이었는데, 당연히 유럽의 개발팀에게는 통하지 않는 방식이었죠. 그 과정에서도 많은 것을 배웠는데, 제 입장에서는 좀 아쉬움이 많이 남는 영역이었습니다.


그러다가 회사가 모회사에서 분리돼서 사모펀드가 새로운 주인이 되고, 그러면서 조직개편이 이루어져서 제가 일하던 자동차 비즈니스 유닛에서 갖고 있던 개발팀들이 보다 더 큰 전사 개발팀에 통합이 되면서 제 업무도 바뀌게 되었습니다. 밑에 부하직원이 없고 개인으로 일을 하는 일종의 기술 영업을 하게 된 겁니다. 일반적으로 외국 회사에서 BDM (Business Development Manager)들이라고 해서 딱히 번역이 잘 되지 않는 포지션인데요, 하는 일은 결국 영업들이 우리 솔루션을 더 잘 팔 수 있도록 지원하는 역할입니다. 위의 솔루션 아키텍트가 그나마 가장 비슷한 업무인데, 그것보다는 조금 더 비즈니스 쪽에 가까워져서 제품의 가격이나 비즈니스 모델, 혹은 파트너사와의 협업 등 좀 더 큰 그림에서 비즈니스 전략을 고민하고 영업팀을 지원하는 자리죠.


그렇게 해서 22년 넘게 이 회사에서 다양한 포지션을 경험했고, 미국에서 위의 포지션을 마지막으로 회사를 떠나게 되었네요. 제 개인적인 회사 업무를 너무 장황하게 썼나 싶어서 좀 민망한 기분도 듭니다만, 반면에 필드 엔지니어로 외국인 회사를 입사해서 거칠 수 있는 다양한 커리어 경로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관심 있는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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