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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 준 Jul 24. 2023

왜 '학교교사'가 학생의 '가사도우미'를 도맡는가?

교권침해로 인한 서울 서초구 초등학교 교사의 극단적 선택에 대하여

아이들은 자연에서 뛰놀면서 배워야한다.


이것은 아동 교육의 시초이자 처음으로 아랫사람을 대하는 따뜻한 마음을 이론으로 풀어낸 프뢰벨의 이론이자, 전문적인 교육이론의 시작점이다.


사람은 자연에서 태어나 서로 부대끼며 놀고 지내며 이웃끼리 친하게 지내야 '자연스럽다'.

말 그대로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 속에 지내는 사회적 동물의 한 행동인 것이다.


때로는, 다른 사람과 지내면서 마찰이 생길 수 있다.


평생을 올바르게 정답만을 고르며 살아갈 수 없는 노릇이며,  쳇바퀴같은 인생을 살기엔 삶은 너무나도 길다.

인간이기에 실수를 하며 그 실수를 통해 우리는 배워간다.


우리가 실수를 하는만큼 우리는 배움을 얻고, 알아낸 지식을 행동으로 녹여내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몸소 전파한다. 그것이 진정한 옛 선조들의 지혜이자 하늘이 내린 축복이다.


교사의 책무는 교육을 받는 아이들 각자가 가진 개성을 보존시키되, 실수에서 배우며 사회에 녹아들도록 하는 촉매제이다. 아이들이 사회에 나가기 전에 크게 무너지지 않도록, 조금씩 다치게, 그리고 조금씩 무너지게 하는 방파제같은 역할을 해야한다.


그 속에서 아동은 힘을 얻고, 자신이 실수해도 실패하지 않고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넘어져도 언제든 따뜻한 안식처로 도망칠 수 있음을 느낀다. 그것은 어린 사람에게 국한된 사실이 아닌, 어른 또한 그러하다. 우리도 예전에는 어릴 적 수 많은 어른들의 훈계를 받으며 자라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은 인간적인 안락처는 사라지고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는 날카로운 사회가 되어가는 것만 같다. 코로나가 만들어낸 '마스크끼는 사회'가 우리를 서로 말을 줄이고, 서로에게 눈치를 보며, 자신의 이득만을 챙겨가는 열대우림 속 야생동물의 포식자로 만들어간다.




최근 이슈가 되고있는 교사의 극단적 자살은 새로운 사실은 아니지만, 새로운 여파를 만들어낸다.


나는 교사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이 사건에 대해 이렇게 물어보고 싶다.


"교사가 학생을 책임질 의무가 있다면, 교사를 책임질 사람은 어디갔는가?"


교사도 사람이다. 사회적 틀을 준수하는 사람이지만, 정도를 넘어섰다는 직감을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번 교사의 극단적 선택에 대한 인도적 견해는 대부분 심하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그 이유는 한 개인에게 책임을 과하게 떠넘기며, 서로 물어뜯는 양상이 되어가기 때문이다.


학생을 돌볼 사람이 교사라면, 교사를 돌볼 사람은 어디갔는가?




대학 시절, 교수님께서 Rogers의 견해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우리가 먹는 쌀이 그러하듯, 인간또한 생명체이기에 자연 속에서 잘 자랄 양분과 따뜻한 햇빛, 그리고 충분한 물과 같은 환경을 조성한다면 우리 인간은 건강하게 자랄 것이다. 나는 그럴 것이라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으며, 여러분 또한 그 따뜻함을 조성하는 한 생명체이다."


교수님의 그 말씀은 당시, 앞으로 무엇을 하며 돈을 벌어야 하는지 고민하던 나에게 방황하는 것이 틀린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아님을 알려주며 마음 한 켠을 보듬어 주었다.


내가 그 때에 받았던 마음을 교수님도 옛날에 다른 사람에게 건네 받았을 것이며, 그 사람들 또한 다른사람에게 받고, 또 받고... 그렇게 우리네 삶은 이루어졌다.





누군가의 잘못을 손가락질 하기보단, 우리는 따뜻함을 건네야 한다.


그리고 개성이 강한 아이에겐 강력한 훈육이 필요하다.

설령 그것이 아이를 찌그러트릴지라도, 엇나가게 만드는 실책을 만들진 않아야한다.


수직적인 폭력이나 손찌검은 물론 나쁘다.

하지만 무분별한 폭력과 강력한 훈육의 차이는 아이를 두들겨 때리거나, 소리를 치는 과정에서 "아이가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이다.


최악보단 차악을 고르는 선택도 필요하다.

우리 사회는 차악을 피하기 위해 최악을 선택하는 실수를 저지른 것이 아닐까?


이런 마음아픈 이야기가 들리는 순간일수록 우리는 더 많은 애정과 관심으로 삶을 관철해야한다.

그리고, 사람에 대한 애착을 포기하지 말고 천착해야한다고 굳게 주장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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