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들을 키우다 보니 속이 옹졸해진다. 조금만 틀어져도 신경질이 튀어나오고 넓은 아량을 지닌 부모의 모습은 환상처럼 멀어진다. 육아가 익숙해질 법도 한데 이해는 줄어들고 오해만 늘어난다.
애들이 어렸을 땐 이해가 늘어갔다. 얼마 전에 태어난 갓난아이가 아무것도 모르고 울고 먹고 싸고 찡찡대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첫 육아로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건 부모도 마찬가지기에, 하나둘씩 상황을 겪어가면서 이해가 늘어갔다.
툭하면 울어재끼는 아이를 보며 어쩔 줄 모르던 시간은 지나고, "애애앵~"하는 사이렌 소리울림과 동시에 기저귀부터 확인하고, 우유시간 체크하고, 둥가둥가 안아주는 게 당연해졌다.
조금 더 커서 기고 걷기 시작했을 땐, 서랍들을 봉인해 두고 부딪히지 않도록 모서리를 가리고, 사고가 나지 않을까 눈을 떼지 않는 게 당연해졌다.
조금 더 커서 어린이집에 들어갔을 땐, 친구들과의 관계에 감정적으로 사고를 치지 않도록 어떤 상황에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를 알려주고, 세상을 알려주고 사회성을 길러주는 게 당연해졌다.
지금껏 아이가 부족한 게 무엇인지 이해하고 도움을 주는 게 부모의 역할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오해만 가득해졌다.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작은 실수를 더 이상 가볍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식사 중 팔에 걸려 쏟아진 물컵을 보며 "하아- 진짜..."라는 소리부터 나온다. 넘겨낼 수 있는 실수도 "그러니까 밥 먹을 때 장난치지 말랬지!" 하는 신경질로 이어간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파악하려 하지도 않고 '또 덤벙대니까 그랬겠지!'라는 판단으로 답을 내린다. 사실 관계를 떠나서 일방적으로 내린 답변은 오해의 싹이 된다.
예전이었다면 "어이쿠!" 하는 촌스러운 반응을 보이며 물을 닦는 게 먼저였는데, 이제는 부정적인 감정을 터뜨리는 게 출발선이 됐다. 이 잦은 신경질은 스스로에게도 독이 된다. 한껏 예민해진 내 모습을 느끼며 '예전엔 안 그랬는데...'라며 체감한다. 딱 그 갭차이만큼의 스트레스가 몰려온다. 그래서 화를 안 내려고 노력한다.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스스로 생각을 할 수 있다고 판단하게 된 순간부터 이해는 오해로 변했다. '행동하기 전에 생각을 좀 했으면...!'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내 기준에 미달하는 상황들을 보기가 너무 힘들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건 어디까지나 내 욕심이다. 생각의 그릇이 생겼다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애들이다. 당연히 경험의 용량도 생각의 범위도 성인인 나와는 다르다. 이제 걸음마를 시작하는 아기한테 100m 달리기 기록을 요구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다. 이렇게나 당연하고 뻔한 일인데, 아이들이 성장하는 모습에 '기대감'이라는 눈가리개를 차고 보게 된다. 어른으로써, 부모로서, 미안하고 미안할 따름이다.
9살. 7살. 아직도 한참 이해가 필요한 나이다. 다 큰 성인도 왜 저러나 싶을 정도로 이해가 안 갈 때가 있는데 애들에게 뭘 바랄까. 나는 참 고약한 욕심쟁이다. 과한 기대가 아니라, 하나하나씩 쌓아지는 아이들의 성장 그 자체를 이해하고 격려하고 축하해주어야 하는 때라는 걸 떠올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