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가 Apr 06. 2023

가족이 나의 추진력

잠에서 깨어남과 동시에 기발한 생각이 머릿속에 번뜩였다. 새로운 보드게임. 기존에 있던 게임의 기억이 아니라 새로운 게임이었다. 꿈도 전혀 상관없는 내용을 꿨는데 눈을 뜨자마자 몇 시간 동안 그 게임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내가 아무리 보드게임을 좋아해도 이렇게 영감이 떠오를 정도는 아닌데 기묘했다. 


우리 가족은 보드게임을 즐긴다. 소장한 게임도 30개가 넘는다. 

결혼 전 PC게임을 즐겼던 나. 반대로 아내분께서는 게임을 즐기지 않았다. 그런데 나 혼자 게임만 하고 있다면? 서로 함께하고 싶은 마음으로 결혼과 동시에 PC게임을 모두 접고 보드게임에 발을 들였다. 밤마다 같이 게임을 하며 하나씩 게임이 늘어가고, 아이들이 태어나 자라면서는 같이 할 수 있는 게임까지 늘어갔다.


이렇게 관심은 많지만 매니악하게 빠진 수준은 아닌데, 잠결에 뮤즈의 선물처럼 게임에 대한 생각이 강하게 박였다. 운전하며 출근하는 동안 주변 사람들에게 '이런 아이디어 어때?'하고 물어보고 싶어 안달이 났다. 하지만 운전 중에 폰을 쓸 수 없기에 머릿속으로 구체화하며 규칙을 재정비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설명을 해주었을 때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반응이 돌아왔다.(그냥 대충 우쭈쭈 한 것 같기도 한데 말이지...)


평소라면 잠시 들떠있다가 잊힐 기억이지만 "빨리 제안서 넣어봐요."라는 그 한마디에 정신이 번뜩였다. 


'이거 될까? 괜찮나? 해볼까?'


나는 행동파가 아니다. 고민과 계획을 철저히 세우고 세우고 세우다가 흐지부지하게 사라져 버리는 스타일이다. 그런데 그 한마디가 이렇게 힘찬 채찍질이 될 줄이야. 

기회라고 생각했다. 놓치면 안 될 기회. 뮤즈부터 주변사람들까지 이렇게 밥상을 잘 차려줬는데 내 손으로 수저만 들면 될 일 아닌가?


하루가 지났다. 사실 반쯤 마음이 흘렀는데 머릿속에서는 생각이 계속 남아있었다. 되든 말든 해보는 게 미련이 없겠지.

집에서 큰 달력만 한 종이에 구상했던 게임 판을 그렸다. 효니와 혀기가 계속 깔짝대느라 작업시간이 늘었지만 자와 각도기를 요리조리 돌려가며 게임판을 만들었다. 보드게임들을 하나씩 살피며 적절한 말과 보상 컴포트들을 조합했다. 게임에 맞춘 재료들이 아니라, 재료에 맞춘 게임이기 때문에 게임판 지름만 50cm가 넘었다.


하얀 배경에 대충 그리고 장애물들을 테이프로 붙여낸 어설픈 모습이지만 내가 떠올린 게임의 프로토타입이 완성됐다. 곧바로 가족이 둘러앉아 게임을 시연했다. 

비주얼에 비해 플레이 질감이 상당하다! 개인적 애착이 붙어 편파적인 감상이 되겠지만 다들 재미있어하는 눈치다. 효니도 혀기도 재미있다고 말한다. 아빠가 낑낑대고 깨작대는 모습을 지켜봤기에 위로차 건넨 감평일지 모르지만, 어쨌든 긍정적인 반응이다.


물론 직접 플레이하면서 수정할 부분이 점점 늘었다. 머릿속으로 구상한 것과 실제 플레이에는 확실한 갭차이가 있었다. 어떻게 보완할 것인지가 관건이지만, 크게 어렵진 않을 것 같다.


또 하루가 지났다. 일을 끝내고 집에 돌아오니 당연히 모두 집에 있다. 각자 바쁘다. 아내분께서는 손수 음식을 제작 중이셨고, 효니는 거실에서 혼자 태권도를 하는 기행을 보이고, 혀기는 풍선을 튕기며 놀고 있다. 

혼란스러움 속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오니 아내분이 말을 전한다. 


"혀기가 어제 아빠가 만든 거 하고 싶다고 하더라."


기분이 좋았다. 

소꿉장난하듯 뚝딱거려서 대충 만든 걸 좋아해 주니 제작자로서, 아빠로서 기분이 좋았다. 가족에게 이해를받고 지지를 받는다는 기분. 이만한 카타르시스가 없다.


순간 상품성 따위는 크게 중요하지 않아 졌다. 어제까지만 해도 '실제로 제품이 출시돼서 사람들이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이 컸다. 그런데 내 핏줄의 행복을 보니 아이들을 위해 우리 가족이 함께 즐기기만 해도 이미 큰 값을 받은 거란 생각이 든다.


그래도 이왕이면 더 크게 되면 좋을 테지! 마냥 놓아버리기 아까운 욕심이다. 하하!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이 기분 좋다. 

할 수 있다. 해보자. 최소한 우리 가족만큼은 행복해졌으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노력은 계단 그래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