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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가 Apr 03. 2023

노력은 계단 그래프

고3 내가 미용학원을 다니던 시절, 내 속 터지는 육신에게 권태기를 느끼던 시절이다. 학교를 마치고 바로 버스로 40분을 달려 도착한 미용학원. 그곳에서 헤어자격증을 따기 위한 이론과 실습을 배웠다. 크게는 커트와 헤어 웨이브, 파마를 배우는데, 가발을 소모하는 커트보다 파마를 중점으로 연습했다. 꼭 아끼기 위해서라기보다 파마가 그만큼 많은 연습을 해야 하는 기술이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하다.


이제는 오래돼서 기억이 가물가물 한데 아마 제한시간은 30분 안에 대략 60개 정도쯤 되는 파마 롯드를 말아야 했던 것 같다. 돌돌 말린 머리카락은 김을 말아놓은 것처럼 중간에 빈 틈이 없어야 하고, 제식훈련받는 군인처럼 삐뚤어진 것 없이 반듯하게 자리해야 한다. 이걸 시간 내에 빠르고 정확하게 마는 게 포인트다. 그냥 엄청 빡쎄다는 소리다.


나는 학원에서 제일이라고 해도 자신 있을 만큼 열심히 연습했다. 쉴 틈 없이 파마를 말고 풀고 말고 풀고를 반복하며 집중했다.

하지만 결과는 노력과 비례하진 않았다. 시간을 줄이려면 결과물이 꽝이고, 디테일에 집중하다 보면 시간은 과속하며 내달렸다. 나는 내가 유체이탈을 해서 학원 선생님한테 빙의해서 파마를 마는 그 손끝의 감각을 느껴 훔쳐오고 싶다는 생각을 수없이 했다. 분명 알려준 데로 똑같이 하는데도 결과가 달랐다. 팔의 각도, 손의 방향, 시선의 높이, 모든 것을 복사하듯 따라 해도 내 결과는 옆구리 터진 김밥처럼 조잡스럽고 추잡스러웠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아주 조금씩 조금씩 실력이 늘었다. 지독하게 안되던 게 되고 나면 흐름을 타서 점점 실력이 늘 것 같았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겨우 하나 성공하면 그다음 다른 문제가 발목을 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렇게 또다시 유체이탈을 꿈꾸며 연습하다가 어느 순간 아주 조금 성장을 하기 시작했다.

흐름을 타고 극적인 성장세 같은 건 없었다. '이게 내 길이 아닌가?' 싶은 순간이 되어서야 아주 조금 성장했다.

나는 그때 처음 사람의 성장 그래프는 직선이나 곡선이 아닌 계단식 그래프라는 걸 알았다. 


성장의 기쁨도 없이 지루함이 절망으로 변할 때 아주 조금씩 한 계단 올라가는 성장. 나는 가로가 길고 세로는 아주 짧은 계단이었다. 학원에서 같이 연습을 하던 친구 중에는 타고났다 싶은 정도로 실력이 좋은 녀석들이 있었다. 심지어 나보다 더 늦게 학원에 와놓고, 어느새 옆에서 같은 연습을 하는 녀석도 있었다. 어휴. 진짜 그지 같았다. 


한참을 열등감으로 범벅이 되다가 서로의 계단이 다르다는 걸 인정하면서 마음이 편해졌다. 솔직히 다른 사람이 더 빨리 실력이 느는 꼴은 속이 쓰렸지만, 내가 멈추지 않으면 조금 더 시간이 걸리더라도 결국은 같은 높이에 오를 수 있다는 생각이 위안이 됐다. 어차피 인생 길다는데 그거 좀 천천히 간다고 뭔 일이라도 나겠는가 싶었다. 그냥 묵묵히, 그리고 꾸준하게 목적을 향한 노력을 했다. 여전히 유체이탈과 빙의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지만 그럴 수 없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연습만 열심히 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 노력의 계단은 1km를 걸어서 1cm만 오를 수 있다고 해도 묵묵히 걸었다. 동화 속 토끼를 이긴 거북이처럼.


그렇게 그 해 참여한 헤어자격증 시험에서 그 녀석은 합격하고 나는 떨어졌다. 

더 올라가야 했나 보다. 쳇. 이까짓 게 다 무슨 소용이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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