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 발걸음이 출근길 발걸음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가기 싫어 미적거리는 게 아니라 늦지 않아야 한다는 조급 함이다. 특별한 약속이 있는 건 아니다. 그저 빨리 집에 가 남편으로써 아빠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는 책무감.
간혹 평소보다 빨리 퇴근하는 때가 있지만 그렇다고 다른 길로 새진 않는다. 일찍 끝나면 더 많이 가족과 함께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쌓인다.
가정적인 남편/아빠라서가 아니다. 그냥 내 마음이 불안하다. 내 역할은 남편/아빠인데 그걸 안 하면 안 된다는 생각. 경찰서 앞에서 무단횡단을 하는 정도의 불안감이 있다.
집에 있다고 딱히 뭘 하는 건 아니다. 가볍게 청소를 돕거나 하는 정도지만 혼자 도맡아서 노동하는 느낌은 아니다. 말 그대로 조금 도와주는 정도다.
예전에는 보육교사 수준으로 아이들을 보살폈는데 이젠 아이들이 나랑 안 놀아준다. 내가 게을러진 것도 맞는데, 이젠 애들끼리도 잘 논다.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깔깔대고 껄껄대고 난리다. 아빠로서의 역할은 소파에 널브러져 "오늘 학교는 어땠니?", "오늘 어린이집은 어땠니?" 한두 마디 건네는 게 다다.
그런데도 이 책무감은 사라지질 않는다. 뭐 하는 것도 없으면서.
오후 10시. 평균적으로 아이들을 재우는 시간이다. 그때가 돼야 비로소 마음이 풀린다. 긴장감? 의무감? 대충 그런 신경 써야 할 것들이 사라진 후 불어오는 평안함이다. 딱히 할 일이 없는데 사장님과 한 공간에 앉아있는 듯한 불편함이 사라진 거다. 상대방은 별 신경 안 쓰는데 나 혼자 북 치고 장구치고 기 빨리는 거.
어쩌면 책임감, 책무감, 부담감, 그런거 사실은 허상인지도 모른다. 게으름에 붙인 허울 좋은 구실이지. 그냥 쉬고는 싶은데 눈치보이니까 하는 소리다.
이제야 찾아온 자유시간인데 크게 달라지는 게 없다. 특별한 계획도 없고 특별히 시간이 늘어난 것도 아니고, 그냥 똑같이 널브러져 있는 데 마음이 다르다.
미세하게 퍼져있던 긴장이 사라지며 노곤함이 몸을 감싼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듯 근육에 힘이 풀려 둥실한 기분이 든다. 그와 동시에 눈빛은 점점 초롱초롱해진다. 비효율 적인 몸뚱이는 움직여야 할 때는 기운이 빠지고 자야 할 때면 상쾌하게 회복한다. 누가 설정한 건지 연비 최악의 육신이다.
'본격적으로 내 맘대로 해볼까'라는 생각으로 TV채널을 돌린다.(지금까지 마음대로 하고 있었다.) 돌리고 돌리고 돌리다가 계속 돌린다. 원래 밤에는 재미있는 방송을 하기 마련인데 볼만한 게 없다. 꾸준히 봐오지 않은 탓에 눈을 사로잡는 드라마도 뭔 내용인지 모르겠다. 그냥 볼까 하다가 '그래도 처음부터 봐야 더 재미있겠지'라고 생각하며 채널을 넘긴다.(그렇게 킵해둔 방송을 다시 보는 일은 없다.)
가장 즐길 준비가 된 시간에 아무것도 못한다. 괜히 억울한 마음에 채널변경만 반복하며 대충 시간을 때우다 보면 12시가 넘어간다. 아직 정신이 맑은상태라 깨달음이라도 얻을 판인데 어쩔 수 없이 잠자리에 든다. 물론 바로 잠들지 못하고 폰을 열어 한참을 버틴다. 그러다 한두 번쯤 폰을 얼굴에 떨굴 뻔하고 나서 본격적인 잠을 청한다.
어? 왜인지 모르겠는데 아침이다. 시간을 보니 잠을 자긴 잔 모양인데 아직도 이렇게 피곤하단 현실이 이해가 안 된다. 자기 전보다 오히려 더 퀭하다. 그렇게 또 하루가 반복...
이렇게 노멀 하게 하루하루를 보낸다. 어제도 그랬고, 그저께도 그랬고, 아마 오늘도 그럴 거고, 어쩌면 내일도 그렇겠지.
오늘도 출근길 발걸음이 무겁다. 차라리 야간에 일을 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