썰매는 무료지만, 몸살치료비는 유료
눈이 온다. 그것도 아주 많이!
퇴근길, 눈이 얼마나 쌓였는지 체크하기 위해 평소 다니는 길을 조금 돌아 집 근처 고등학교 운동장을 살핀다. 학생들이 등교하는 평일인데도 눈이 가득 쌓여있다.
내가 이해되지 않는 한 가지가 있는데 '왜 이 학교 학생들은 눈이 와도 좋아하지 않는가' 하는 거다. 매년 눈이 올 때마다 이 학교 운동장을 살피는데 입구 쪽만 발자국이 조금 찍혀있고 나머지는 깨끗한 설원이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은 밟고 싶어지는 게 본능 아닌가?
소복이 쌓인 눈에 손가락을 하나 찔러 넣는다. 음. 이 정도면 4~5센티는 될 것 같다. 만족스럽다.
집으로 돌아와 곧장 아이들에게 출동명령 내린다. 창고 가장 안쪽에 봉인돼있던 썰매를 양손에 꺼내 비장하게 나선다. 아이들 손에는 오리집게가 하나씩 들려있다. 신발에는 전날 미리 방수스프레이까지 뿌려뒀다. 철저한 준비자세!
뽀보복- 뽀보복-
간지르르한 발소리를 내며 걷는다. 한껏 들떠 주변에 쌓인 눈에 정신 팔린 아이들과는 달리 나는 미세한 긴장감을 느낀다.
'또 얼마나 힘들까?'
한바탕 썰매를 끌고 나면 다음날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프다. 아이들은 쑥쑥 크니까 매년 그 무게가 더 늘어난다. 매년 같은 두려움을 느끼며 썰매 타기를 꾸준히 실행 중이다. 키즈카페나 놀이공원은 언제든 갈 수 있지만, 눈 오는 날 아이들과 노는 건 일 년에 몇 번 없는 타이밍 싸움이다. 귀찮다고 한번 쉬고 나면 눈이 치워질 수도 있기 때문에 놓칠 수 없는 유니크한 기회다.
동계올림픽 국가대표 선수가 출전하는 마음가짐으로 학교 운동장에 입장한다. 비장한 마음가짐은 나뿐이다. 애들은 그냥 신나서 난리다. 잠시 아이들을 지켜본다. 처음부터 힘을 빼면 아이들 체력에 맞출 수 없어서 먼저 하고 싶은데로 놔둔다.
아이들은 눈오리 집게로 오리를 만든.... 아니, 못 만든다. 자꾸 부서진다. 결국 시작부터 내 몫의 할 일이 생겼다. 눈이 제법 쌓여있는 곳을 찾아 자리를 잡는다. 나는 생산직으로 오리만 만든다. 아이들에게는 저쪽 어딘가로 오리들을 옮겨 쌓아 두라고 지시한다. 역시 배달의 민족답게 열심히 오리들을 나른다. 나는 생산 속도를 올리며 아이들에게 좀 더 빨리 옮겨달라고 말한다. 아이들은 오더에 따라 달리기 시작한다. 그래. 그렇게 뛰어다녀라. 그렇게 힘 좀 빼라. 흐흐흐.
배달위치에 제법 오리가 쌓이면 그때부터는 아이들이 안 온다. 쌓인 물량이 마음에 드는 건지 힘들어서 그런 건지 둘이서 속닥거리고 논다. 생산물량은 계속 쌓여가는데 배달원들은 파업이라니. 그렇담 전쟁이지!
앞에 놓인 오리를 힘껏 던진다. 살짝 빗나간 오리가 퍽 터지면서 전쟁의 시작을 알린다. 아이들은 오리가 쌓인 곳부터 내가 있는 곳까지 왔다 갔다 하면서 눈을 던진다. 집게를 이용해서 실시간으로 오리를 만들어 던지는 나랑은 비교할 게 못된다. 화려한 무빙실력을 뽐내며 애들을 압도한다. 평소 말 안 듣는 애들에게 가하는 소소한 복수다. 녀석들은 그저 놀아주는 거라고 생각할 테지! 흐흐흐.
이렇게 치졸한 마음가짐으로 웜업을 한다. 가볍게 뛰면서 추위에 굳은 몸을 풀어주다가 오리가 다 소진되면 자연스럽게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간다. 썰매 두 개에 각 각 아이들을 태우고 양손으로 끌어준다. 1년 동안 애들이 컸다 해도 8살 6살 두 녀석의 무게는 아직 버틸만하다. 음? 아니, 안 되겠구나... 스스스- 끌고 다닐 때는 괜찮은데, 조금 속도를 내서 뛰어가면 묵직함이 확 느껴진다.
운동장 끝까지 달려갔다가 다시 돌아오면서 아내분에게 작은 녀석을 넘긴다. 무게가 절반으로 줄어든 만큼 기동성이 올라간다. 밟히지 않은 눈길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운동장 구석구석을 헤집고 다닌다. 중간중간 아내분에게 들려 썰매를 교체한다. 아무래도 미친개마냥 뛰어다니는 내가 끌어주는 걸 애들도 더 좋아할 테니 공평하게 기사노릇을 해준다.
뜨겁게 달궈지는 폐를 통해 묵직한 호흡이 터져 나온다. 호흡이 가빠지며 다리도 조금 비틀거린다. '평소에 운동을 좀 할 걸'하고 생각하다가 어차피 소용없겠구나 하고 깨닫는다. 이렇게 뛰어다니는데 당연히 힘들겠지.
썰매 운영시간은 좀 짧은 편이다. 더 끌어주고 싶어도 내가 죽을 것 같아서 안된다. 경사로라도 있으면 편하게 밀어주기라도 할 텐데, 온통 평지뿐이라서 내 체력만큼이 딱 운영시간이다. 집 근처에 썰매를 탈만한 경사지역이 없는 게 아쉽다.
그래도 죽겠다 싶은 순간 한두 번 더 힘을 내서 끌어준다. 그 정도는 해야 나 스스로 만족할 수 있다. 이 정도는 해줘야 애들도 만족할 거라고. 이런 일방적인 대답을 내리고 나서 감기 걸릴 수 있으니 그만 들어가자는 뻔한 핑계를 내민다. 미리 오리도 만들고 눈싸움도 한 탓인지 순순히 돌아가자는 말을 따른다. 훌쩍이는 걸 보니 녀석들도 내심 추웠던 모양이다.
귀가 후 뜨스운 물로 샤워를 한바탕 하고 나니 노곤하게 축 처진다. 아이들도 평소보다 30분은 일찍 잠자리에 든다. 그 모습으로 아이들도 잘 놀았구나 싶은 대답을 얻는다.
사실 눈 오는 날은 아이들보다 내가 더 기다린다. 기억 속에 새겨질 특별한 추억을 아이들에게 남겨주고 싶은 아빠 마음으로, 눈 오는 날이면 바닥에 쌓이는지를 계속 확인하게 된다. 아이들의 행복이 내 행복이 되면서부터 생긴 버릇이다. 언제까지 이렇게 썰매를 끌어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들이 따라 나오는 때까지는 계속 이렇게 함께 추억을 만들고 싶다.
아. 그나저나 내일도 허리 아프겠지? 아니다. 내 몸이 감당할 수 있을 때까지만 추억 쌓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