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극N의 육아

엉금엉금 아이교육

결국 해내고 말거니까

by 유가

"오. 피. 이. 엔."

길을 가다가 갑자기 혀기가 영어를 읽는다. 시도 때도 없이 "에이 비 씨 디 이 에프 지~"를 외치며 알파벳송을 돌림노래로 불러대더구먼, 셀프 특훈의 성과가 드러나는 모양이다. 노래만 하는 줄 알았지 알파벳을 읽을 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놀라움과 대견함이 폭발한다.


그런데 마냥 좋아하기엔 조금 난해하다. 다른 부모들 같으면 내 자식 천재 소리를 하며 호들갑을 떨었겠지만, 혀기가 숫자랑 한글을 모른다는 걸 먼저 알아야 한다. 숫자를 읽기는 읽는데 "일 이 삼 넷 오 육 일곱 팔 구 십."같은 소리를 한다. 군인도 아닌 것이 숫자를 왜 저렇게 읽는지... 1에서 100까지 숫자를 세보라고 하면 중간중간 빼먹기도, 순서를 바꾸기도, 난리다 난리.

한글은 자기 이름 누나이름, 딱 두 개만 정확하다. 글을 보고 "이거 내 이름에 있잖아!" 하면서 찾아내는 건 잘하는데, 다른 글자를 모른다. 진짜 중간이 없는 녀석이다.


효니가 잘했기에 더 비교가 되는 듯하다. 호기심이 많은 극N 효니는 어릴 때부터 혼자 숫자랑 한글을 뗐다. 한글은 조금 알려주니 간판들을 읽어가며 점점 실력을 늘렸고, 숫자는 장난감집에 적혀있는 걸 보고 스스로 깨우쳤다. 그마저도 지금의 혀기보다 1~2년 정도 더 빨랐던 때였다.

이 정도라면 부모들이 천재라고 호들갑 떨만하다. 하지만 난 중심을 지켰다. 작은 변화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그렇구나~"하며 담담하려 애썼다. 괜히 부모의 호들갑에 애들이 힘든 가시밭 길을 걷게 될까 봐. 지금은 빠를지 몰라도 결국 나중에 높은 난이도를 넘어설 때가 중요한 거 아닌가. 진작부터 부담감을 세뇌시키고 싶진 않았다.


혀기는 친구들에 비해 말이 느리다. 어린이집 초반에는 친구들이 애기취급하며 놀아주지 않아 많이 속상해했다. 부모로서 걱정이 컸다.

시기별 발단의 기준은 이미 효니가 되었기에 비교될 수밖에 없었다. 말이 빨랐던 효니가 술술술 문장을 말할 때, 말이 느린 혀기는 단어 하나씩 뱉는 수준이었다. 주변에 혀기랑 비슷한 수준의 친구들은 언어치료를 받으러 다니고 하는 바람에 더 초초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결국은 할 거야. 천천히 기다려 주자."라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혀기를 부르면 반응하는가? 그렇다.

-혀기가 말을 하는가? 뭔 소린지는 몰라도 입을 쉬지 않는다.

-혀기가 시킨 일을 행동하는가? 다행히 말은 잘 듣는다.

이 세 가지를 기준으로, 혀기에게 시간만 준다면 잘 해낼 거라고 믿었다. 장애가 있어서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게 아니니까. 저렇게 쫑알거리는데 답답하면 자기도 말을 할 테지.

조급한 건 어른들 뿐이다. 당사자는 별생각 없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고 나니 제법 말이 늘었다. 여전히 발음이 조금 부족하지만 말은 잘한다. 어휘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언어를 이용해 최대한 돌려 막기 한다. 가끔 저런 말은 또 어디서 듣고 배웠나 싶은데, 아마 높은 확률로 효니를 의심하고 있다.


여전히 미숙한 혀기가 영어를 말한다. 한글도 숫자도 잘 모르면서. 다른 아이들보다는 느릴지 몰라도 스스로 확실한 성장을 나타내고 있다. 순서가 조금 애매하긴 하지만 조금 더 기다려주면 한글도 숫자도 다 알 테지.

조금 더 기다려주자. 욕심을 내려놓고 혀기의 노력을 응원하고 성장을 칭찬해 주자. 길을 잃고 절벽으로 향하지만 않는다면 천천히 함께 주변을 돌아보며 함께 걸어갈 것이다.


그래도 역시 공부는 좀 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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