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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가 Jan 25. 2023

나도 노력이란 걸 했었다.

20대 시절, 헤어디자인을 전공으로 미용실에서 일을 하다 나왔다.

미용사들은 물을 만졌다가 곧바로 드라이로 건조하면서 피부가 가뭄 들듯 갈라진다. 특히 보조인 미용 스텝들은 한두 개쯤 상처가 아니라, 가시덩굴로 만든 장갑을 끼고 지내는 것처럼 난도질당한 수준이다. 약해진 피부에 성질 강한 헤어약품들이 닿으니 말이 아니다. 수포가 올라오고 진물 이 나기도 한다.


하루종일 서서 움직이느라 몸도 힘들지만 멘털도 문제다. 고객시술에 대기고객님 순서에 약품에 뭐에... 실제로 신경 써야 할 게 한 둘이 아니다. 서비스직이다 보니 고객 응대가 중요하다. 각각의 개성을 가진 손님을 파악하고 적당한 대화와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니 흐리멍텅하게 있어서는 안 된다. 타인을 파악하는데 특출 난 INJF로써 그 부분은 걱정이 없다. 대신 에너지소모에는 효율이 안 좋다. 적당히 관심을 두지 못하고 모든 것에 최대로 집중하고 최고로 응대하다 보니 금방 지친다. 그래도 별 수 있나. 돈 벌려고 일하는데 지친다고 대충 할 수가 없다. 그런 성격도 못된다. 결국 너덜너덜한 몸을 정신력으로 움직인다.


정말 미용에 진심이었고 최선을 다했다.


어쨌건 저쨋건 결과적으로 미용에 손을 놨다. 2~3년 바짝 벌고 끝내는 일이라면 악착같이 버티겠지만, 평생직이라는 생각은 족쇄가 되어 나아갈 수 없게 했다. 단순 노력의 문제가 아니다. 

손에서부터 번지는 수포가 팔을 타고 몸을 타고 발드에서부터 얼굴까지 온몸으로 퍼졌다. 간지러움을 참더라도 얼굴에 올라온 수포는 '서비스직'이라는 일에 어울리지 않았다. 이런 얼굴로 고객을 상대한다는 자체가 죄스럽게 느껴졌다.


처음에는 디자이너선생님들도 "원래 스텝 때는 다들 그래. 나도 너 때는 더 심했어."라며 으스댔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 손도 처참하긴 마찬가지여서 아프다는 말도 꺼낼 수 없었다. 하지만 점점 상태가 심해지며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도 두 배 이상은 상처가 많았다. 처음에는 기강을 잡으려고 별거 아니란 듯하던 선생님들도 미용을 하지 말라고 걱정스러운 조언을 해주셨다. 미용실에서 스텝은 항상 부족해서 웬만하면 붙잡으려고 하는데 먼저 그만두는 게 어떤지 걱정해 줄 정도면 말 다했다고 본다.


한참 후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내겐 파마약에 대한 알레르기가 있었다. 보통은 드물게 염색약에 대한 알레르기가 발견대곤 하는데 파마약 알레르기는 생전 처음 들었다. 대학에서도 접해본 적 없었고, 지금까지도 미용실에서 파마약 알레르기라고 말하면 미용사분들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눈치다. 

결국 그렇게나 희귀 케이스로 나는 헤어디자이너에 대해 근본적으로 거부당한 존재였다.


허나 기술직이라는 게 그렇다. 할 줄 아는 게 그것뿐이고 스펙도 그것뿐이다. 다른 일자리를 찾으려 해도 뭘 해야 할지, 뭘 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결국 지인의 소개로 다시 미용실을 갔다. 이때는 내가 알레르기 반응이 있는지 몰랐었다. 

몇 달 동안 회복되어 괜찮아진 몸은 순식간에 몸이 예전처럼 변해갔다. 찢어지고 붉어지고 번지고 간지럽고.  또다시 모두가 다 겪는 시기라고 생각하고 버티며 반년을 넘게 보냈다. 하지만 똑같은 고통의 반복으로 버틸 수 없었다. 이미 한 번 경험해 본 실패였기에 기억에 새겨진 절망감이 더해져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같은 실패는 더 큰 패배감을 안겨줬다. 그리고 몇 달 후 세 번째로 미용실에서 일하게 됐다. 두 번째 일 할 때와 같은 이유였다. 다른 것에 대한 관심도 방법도 없었기에 결국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회복됐던 몸이 다시 병들어갔지만 버텼다. 여전히 알레르기에 대해 모르고 있던 때였기에 무식하게 버텼다. 얍삽하게 요령을 부릴 줄도 모르고 열심히 하느라 고스란히 고통을 감수하며 노력했다.


그렇게 몇 달 후 미용실이 문을 닫았다. 나름 이름 있는 체인점매장이라서 문 닫는 건 생각도 못했는데, 건물 계약에 문제가 생겨서 해당 지점이 강제로 사라졌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 덕에 그만둘 수 있었다. 또 미용에서 멀어졌다는 속상함은 있었지만 자책감은 적었다. 단념해야 할 포인트였다. 


그렇게 미용을 밝히던 마음에 불빛이 사라졌다. 


세 번에 일을 하는 동안에도 내가 체질적으로 미용에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몰랐다.

몇 년 후, 미용실에 가서 내 머리에 파마를 하고 나서야 알게 됐다. 파마를 말고 있을 때부터 간지러움이 심해서 집에 오자마자 샴푸를 사용해서 머리를 두 번이나 감고 잤는데도 다음날 귀가 부어 두 배는 커지고 이마와 두피에 물집이 생기고 진물 이 흘렀다. 심각하게 징그러운 꼴을 보고 나서야 병원에서 알레르기 반응이 심하게 있다는 답을 받게 된 거다.


참 고생 많았다. 정말 열심히 했고 누구보다 진심을 다했었다. 몇 번의 실패를 반복하며 나 자신에 대한 후회와 질책을 많이 했는데, 스스로를 알아주지 못한 자신에게 연민이 든다. 이 정도면 나도 사람들에게 모든 걸 쏟아부은 노력을 해봤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땐 그랬다.


그 후로는 솔직히 그만큼의 노력은 안 해본 것 같다. 공황장애도 겪고 감정컨트롤이 안될 정도로 힘든 때도 있었지만, 그 순간들을 이겨내기 위해 예전만큼의 노력은 안 했던 것 같다. 아니, 못했던 것 같다.

현재의 모습이 어떻던 간에 내가 살아온 과정 모두가 무기력한 어둠의 길은 아니었다. 불을 켜지 않아도 전구는 불빛을 비추기 위한 것처럼, 나도 빛을 낼 수 있는 존재라고 믿는다.

다시 한번 그때만큼의 노력을 쏟아부울 순간을 찾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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