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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가 Feb 09. 2023

내 안의 나의 동네

추억이기에 더 좋은 기억

어릴 적 나는 빌라에 살았다. 8동의 건물이 있는 작은 단지로 빌라구역을 두둘 루 벽돌 2개 정도 두께의 담장이 쳐있었다. 


그 시절에는 집 밖 세상이 놀이터였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 아무런 약속 없이도 밖에 나오면 또래들이 항상 있었고, 얼음땡, 팽이치기, 술래잡기, 세발뛰기, 다방구 등, 지금은 TV에서 '추억의 옛날놀이'라고 표현되는 것들이 일상이었다. 


어린 시절의 치기? 객기?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시절 유난히도 겁 없이 놀았다. 술래잡기를 하는 반경이 빌라를 중심으로 200미터 정도는 됐다. 공터가 아닌 주택가였기 때문에 200미터는 생각보다 훨씬 큰 공간이다. 나란 녀석, 제법스케일이 컸다. 

차 아래 들어가 숨어있기도 하고, 주차된 트럭 위에 올라가 누운 채로 숨기도 했다. 신기한 건 그 넓은 곳에서도 다들 찾아낸다는 것. 꼭 한두 명은 "못 찾겠다 꾀꼬리- 신발 벗고 나와라-'의 마법 주문 후에야 등장하곤 했다.


소독차를 따라다니며 동네를 세 시간 넘게 돌아다니다가 돌아온 적도 있다.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죽어라 쫓아갔는데, 날이 어둑해지고 소독차 아저씨가 식당으로 들어가는 탓에 강제 귀가조치를 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동네를 빙글빙글 돌아 충분히 집에 갈만한 장소였다.


빌라단지 안에서는 닌자놀이랍시고 벽을 넘고 좁은 담벼락 위를 돌아다니며 놀았다. 담은 제법 높이가 있어 힘껏 도움 닿기를 하고 벽을 발로 한 번 차고 나서야 위에 손이 닿는 수준이었다. 표창 대신 '콩알탄'을 이용해 사람들이 지나가면 몰래 던지기도 했다. 여차하면 담 안쪽으로 몸을 숨기면 됐다. 나란 녀석, 대체 왜 그랬을까...?


어떤 때는 빌라 옥상에 올라가 아래를 슬쩍 내려다보고 오기도 했다. 난간은 없었다. 3층 빌라 옥상 위에 기와 같은 게 쌓여 살짝 경사져있고, 끄트머리에는 빗물이 곧장 쏟아지지 않도록 20cm 정도의 턱이 있었을 뿐이다. 지근 생각하면 정말 아찔하게도 놀았다. 그때라고 안 무서웠던 건 아닌데 왜 그러고 놀았나 싶다. 다리를 후들거리며 슬금슬금 기어 다녔던 기억이 선명하다. 이 정도로 또렷한 기억이면, 무의식적으로 죽음의 공포가 새겨진 거 아닐까? 진짜 왜 그러고 놀았는지 미스터리다.


그렇게 어린 시절 추억이 담겨있던 동네를 이사 후, 10년 정도 지났을 때 그곳을 다시 찾았다. 몇 년 전부터 재개발의 소식이 들리고 있어서 동네 군데군데가 변해가고 있었다. 그래도 80% 이상은 그대로의 모습에 오랜 추억이 빼꼼빼꼼 튀어나왔다.


빌라에 도착하자마자 담벼락을 보고 크게 놀랐다. 어릴 적 그렇게도 높던, 나의 성벽이 되어 보호해 주던 담벼락이 내 어깨만큼도 안 됐다. 고개만 쑤욱- 내밀면 반대편 아래까지 다 보일 정도로. 진격의 거인이 된 기분이다. 어린 시절 나는 요정이었던 걸까? 대체 얼마나 작았던 거지? 

내가 성장했다는 생각을 기준으로 잡고 보니 빌라 단지가 좁게 느껴졌다. 얼음땡을 해도 숨이 차도록 뛰어다니던 곳이 차 몇 대가 세워진 것만으로도 숨 막히게 느껴졌다. 아득히 높던 건물높이도 제법 낮아 보였다.(그래도 여전히 떨어지면 죽을 것 같았다.) 차마 옥상에 올라가 보진 않았다. 


그 정도 눈에 담은 걸로 만족하고 돌아섰다. 어린 기억의 모든 게 담겼던 동네. 익숙하게 낯선 곳이었다.

떠오른 추억들은 현재의 내 기준과 비교되어 온전한 추억을 외곡 시키는 것 같았다. 

그 시절 그 담은 내게 그 정도 높이였고, 그 단지는 그만큼의 세상이었다. 그랬었던 추억인 아닌, 그 추억 자체를 간직하고 싶다.

내 마음의 의미가 잘 전달될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때를 떠올리는 지금의 기억을 덮어씌우는 게 아닌, 그때의 기록을 편집 없이 남겨두고 싶은 그런 거.

그래서 더 자세히 둘러보지 않고 돌아섰다. 


그 후로 한두 해 정도 지나서 전체 재개발이 확정되어 동네자체가 큰 아파트 단지로 바뀌었다고 한다. 더 이상 골목의 형태도 장소마다의 추억도 흔적 없이 사라졌지만, 지금도 눈 감으면 구석구석 여행 할 수 있는 그 동네가 내 안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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