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니랑 혀기는 집에서 역할놀이를 많이 한다. 문제는 서로 원하는 스토리가 달라서 자꾸 틀어진다는 것. 효니가 산책을 하면 혀기는 갑자기 좀비를 출현시키고, 효니가 도망쳐서 문을 닫으면 혀기의 좀비는 문을 부수고 와서 결국 깨물고 만다. 옆에서 듣고 있자면 대체 뭘 하고 싶은 건지,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다. 서로 원하는 장르 자체가 다르다. 결국 둘 중에 한 명이 삐져야 역할놀이는 끝난다.
그런데 최근에는 제법 잘 논다. 혀기는 혼자 노는 것도 좋아해서 이것저것 깨작거리고 있으면 효니가 다가온다. 그리고 누나랑 같이 놀자고 사정을 한다. 목소리에 불쌍함이 잔뜩 배어있다. 전에는 혀기가 막무가내로 괴물이야기만 해서 효니가 놀기 싫어했는데, 요즘은 약점 잡힌 사람처럼 혀기의 요구를 최대한 맞춰주며 논다. 같이 노는 게 재미있는 모양이다.
확실히 요즘 혀기의 고집이 줄었다. 한 살 더 먹었다고 허용할 수 있는 불만의 그릇이 커진 모양이다. 누나가 이야기하면 무조건 "아니이!" 하면서 멋대로 하던 녀석이 이젠 제법 균형을 맞출 줄 안다. 전에는 얄짤 없었다. 조금만 달라도 무조건 부정하다고 삐지더니, 이제는 방향이 달라도 지그재그로 나아가는 법을 터득했다. 몇 달 만에 성장했다.
사실 아직은 효니가 참아주는 부분이 더 많다. K-장녀의 고충이다. 혀기가 조금 불편한 기색을 보이면 "알았어~ 알았어~ 그렇게 하자."하고 맞춰준다. 참 더럽고 치사하다. 설득이 안 통하는 상대이니 요령 있게 상황을 조율한다. 가끔은 못 들은 척하고 어물쩍 넘어간다. 효니 역시도 성장했다. 사회생활을 잘 해낼 싹수가 보인다.
둘이 방에 들어가서 몇 시간씩 깜깜무소식이다. 이렇게 조용할 녀석들이 아닌데... 그래서 가끔 살아는 있나 하고 슬쩍 문을 열어본다. 예고 없는 방문에 둘 다 경계하는 눈빛을 보내는 것 보면 알아서들 잘 놀고 있는 듯하다. 괜히 벌집을 들쑤실 필요는 없으니 조용히 문을 닫고 나온다.
며칠 전, 둘이 방앞에서 도어록 비밀번호를 누르는 척을 하고 있었다. 서로 비밀번호를 정해서 맞다 틀리다를 하더니 공책을 가져와 비밀번호를 적어서 공유했다. 나중에 슬쩍 보니 숫자만 16개가 적혀있었다. '이 정도면 집주인도 집에 못 들어가는 거 아닐까?' 하는 현실적인 고민을 해봤다.
다음날 프린터로 도어랑 사진을 뽑아 방문 앞에 붙여줬다. 제법 리얼하다. 그날부터 놀이 때가 아니어도 방앞에서 번호를 누르는 시늉을 하며 들어간다. 매번 비밀번호가 달라 보이는 건 기분 탓인가 싶지만, 일단 잘 활용하고 놀아줘서 좋다.
어쨌건 아내분과 나에겐 조금의 여유가 생겼다. 더 이상 옆에서 지켜보지 않아도 되고, 녀석들도 우릴 피해서 둘이 논다. 알아서 자리를 피해주니 효녀, 효자가 따로 없다. TV프로 하나 온전히 볼 수 있는 기쁨은 에덴에서 휴식을 취하는 기분이다.
그런데 극 N의 걱정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녀석들이 알아서 잘 노니까 신경을 덜 쓰게 된다. 귀찮음에 절은 몸뚱이를 안 움직여도 되니 편하다. 괜히 애들을 불러봤자 스스로의 안식을 파괴하는 꼴이니 소파에 얌전히 있는다. 거의 나무늘보다.
하지만 익숙함에 속아 소중한 걸 잃는다고 했다. 여전히 대화는 자주 하지만 점점 놀아주는 일이 줄어든다. 심심하다면 스마트 폰을 조금 허락해 주고, 너무 오래 한다 싶어 제지하고 나면 둘이 같이 놀라고 시킨다. 사실상 함께 노는 일에 손을 뗐다. 그러다가 점점 즐거움의 거리가 멀어지는 건 아닌가 싶다.
애들끼리 노니까. 내가 안 놀아주니까. 이대로 익숙해져서 교류가 적어지고, 사춘기가 돼서는 완전히 벽이 생겨버릴까 봐 두렵다. 그래서 조금씩 함께하려는 마음을 갖는다. 애들 방에 도어록 사진을 붙여준 것도 놀이에 도움을 주고픈 마음의 표현이었다. 음... 분명 그런 마음이었는데 글을 쓰면서 떠올려보니 별것도 아닌 거 해놓고 생색내는 것 같다.
예전에는 몸이 멈춰있을 틈도 없을 만큼 많이 놀아줬는데 왜 이렇게 됐을까? 나이를 먹으니 점점 힘들다고 말하지만 변명이다. 몸보다는 마음이 힘들다. 아니. 그냥 귀찮은 거다. 아이들은 좋은 쪽으로 성장하고 있는데, 나는 못난 쪽으로 퇴화하고 있다.
이제 다시 아이들과 '함께' 노는 시간을 늘려야겠다. 가족을 사랑하고 녀석들을 사랑한다면. 지금의 행복이 언제까지나 계속되길 바란다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인 것 같다. 나중에 애들한테 이쁨 받고 용돈 받고 살려면 지금부터 아양 좀 떨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