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집 마련의 욕망에 기름을 부은 그 사람
한창 부동산 시장이 불길처럼 타오르던 시기,
임차인의 권리를 보호한다며 발표된 임대차 3법은
수많은 임차인 중 하나였던 나를
끝내 보호해주지 않았다.
전세 계약갱신을 하지 못했고,
기존에 살던 곳 근처에서 새로운 집을 찾아야 했다.
불과 2년 사이,
집값은 무섭게 뛰어올라 있었다.
평수는 줄었고, 보증금은 1억 원 넘게 올랐다.
바로 옆 단지, 연식 차이도 고작 4년.
조건은 거의 같았지만 가격은 전혀 같지 않았다.
그때 우리가 계약한 금액은 5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최고점을 찍고 있다.
그만큼 비정상이었다.
부동산 급등기에는 임대인이 ‘갑’이 된다.
지금 돌아봐도 말도 안 되는 금액이었지만 당시의 나는 철저한 ‘을’이었다.
그리고 이 시기의 ‘을’은 유난히 더 초라해진다.
기존의 임대인을 A,
새로운 임대인을 B라고 부르겠다.
B와 전세 계약을 맺던 그 시절
지금 생각해보면 아직도 나는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었다.
집값은 적폐들이 올려놓은 것이고,
임대차 3법은 결국 임차인을 위한 법이라고
순진하게 믿고 있었으니까.
얼마나 무지했냐면,
직장에 다니고 있는 내 명의가 아니라
퇴사 후 육아에 전념 중이던
아내 명의로 계약을 했다.
대출을 받으러 갔더니
부부임에도 불구하고 와이프의 대출금리가 더 높았다.
미리 알았더라면 내 명의로 했을 텐데,
아니면 대출 상담사와 조금이라도 더 이야기해 봤을 텐데.
그땐 그저 ‘원래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다..
B에게 연락했다.
대출 때문에 계약자 이름 변경을 해야하는데
계약서만 다시 작성할 수 있는지 정중히 요청했다.
B는 이를 받아들였다.
일주일 뒤 부동산에서 다시 보기로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B를 ‘괜찮은 임대인’이라 생각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아직은 몰랐기 때문이다.
(천하의 썅X일줄은 꿈에도 몰랐다.)
약속된 날을 사흘 앞두고 부동산에서 전화가 왔다.
"안녕하세요. OO부동산인데요. 3일 뒤에 계약서 다시 쓰기로 했죠?"
"네, 맞습니다. 저희가 잘 몰랐네요.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아....근데.... 임대인 B가 특약사항에 몇 가지 추가하겠다고 하시네요."
"그래요? 딱히 걸리는건 없는데, 혹시 어떤 사항들일까요?"
"네....저희가....내용을....카톡으로 보내드릴게요...."
말끝이 자꾸 흐려졌다.
이 상황에서 메시지로 정리해서 보낸다는 건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거나 외우기 힘들 정도로 길다는 뜻이다.
둘 다 였다.
내용은 이랬다.
-. 세대 내 흡연 적발 시 즉시 퇴거할 것.
-. 애완동물 키우다 적발 시 즉시 퇴거할 것.
-. 시설 및 기물 파손 시 보증금에서 공제 후 즉각 퇴거할 것.
위 내용은 임차인으로서의 당연한 의무이자
일반적인 주택임대차법에도 나와있는 규약이다.
처음부터 특약에 넣었더라면 꼼꼼한 사람이구나 하고 넘어갔을텐데
하지만 계약서를 다시 쓰는 시점에 굳이 추가된 이유는 분명했다.
우리를 못 믿겠다는 뜻이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옆에 있던 와이프도 속상해했다.
그래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미 가계약금은 냈고,
예산에 맞는 집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선택권이 없는 ‘을’이 되어 있었다.
결전의 날이 왔다.
부동산에 모여 계약서를 다시 작성했다.
우리 때문에 다시 모였기에
시작하기 전 비타500을 손수 돌렸다.
그게 '을'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 같았다.
ㄷ자로 앉아 다시금 계약서 내용을 살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저희가 잘 몰라서 계약자를 잘못 설정하는 바람에 두 번이나 오시게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잠시 숨을 고르고 이어서 말했다.
"특약사항에 보니 애완동물, 흡연, 기물파손 내용을 추가하셨더라구요. 저희는 동물도 안 키우고 흡연자도 없거든요. 추가하신 이유가 있을까요?"
B가 말했다.
"저희, 그냥 갈까요?"
순간 공기가 얼어붙었다.
침을 삼키는 소리가 사방에 퍼진다.
한 겨울인데 등골에 땀이 흐르는게 느껴졌다.
머리가 하얘진다는 말이 비유가 아니라는 걸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저.희.그.냥.갈.까.요.'
일곱 글자로도 사람 하나를 충분히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도.
지옥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이 그냥 가버리면 더 비싼 금리로 대출을 받아야 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고 묻는다면
그날만큼은 가오보다 돈이 더 중요했다.
부동산은 우리 눈치만 살폈다.
아무 탈없이 계약서에 빨리 사인하기만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그렇게 벙어리 삼룡이 마냥 아무 말도 못하고
계약서를 다 쓰고 부동산에서 나올 때 까지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서른다섯 살에 울먹일 것 같아
"안녕히가세요" 인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끝나고 집에 오니 부동산에서 문자가 하나 와있다.
"잘 참으셨어요. 저 분이 좀 유난히 까탈스러워요.
그래도 어차피 이삿날 잔금만 하고나면 2년 동안 볼 일도 없으니 마음 편히 드셔요."
잔금날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와이프는 가구 배치하느라 집에 먼저 가있었고,
나 혼자 잔금을 치렀다.
정신이 너무 혼미해서
송금하는데 0을 하나 빼먹고 보내기도 했다.
얼마나 호구처럼 보였을까...
그렇게 험난한 우리의 세 번 째 전세살이이자,
마지막 전세살이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정말로,
입주한 지 2년 동안 우리는 B를 다시 볼 일이 없었다.
하지만 전세 만기 시점에서 B는 또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