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의 허상을 알게 된 그날 이야기
입주한 지 2년 동안 우리는 B를 다시 볼 일이 없었다.
하지만 전세 만기 시점에서 B는 또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첫 만남이 그랬듯
임대인은 끝까지 우리를 좌지우지하려 했다.
여차저차 2년이 흘렀고, 계약 만료 3개월 전
우리는 계약갱신 여부에 대해 논의하게 되었다.
당시의 시세는 우리가 계약한 금액보다
약 1억 원 정도 낮은 호가의 매물이 형성되어 있었다.
세대 수도 적고 거래량도 많진 않았지만
3개월 전 1억 정도 떨어진 실거래 내역이 있었다.
우리의 입장은 명확했다.
'1억 감액된 조건으로 계약갱신'을 하는 것이 유리했다.
그래야 분양받은 집의 입주 시점을
맞출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분양받은 스토리 또한 구구절절하기에
다른 에피소드에서 따로 풀 예정이다.)
우리는 현실적인 선에서 생각했다.
만약 임대인이 7~8천만 원 정도의 인하를 제안한다면,
이사비용과 복비를 감안해 적당히 받아들이고 갱신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정반대였다.
임대인은 오히려 임대료의 상한선인
5% 인상을 제시했다.
시세, 주변 단지, 실거래, 호가.
우리가 제시한 모든 근거는
임대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때까지 우리는
‘호구’로 보였던 것 같다.
그렇게 계약 갱신은 어그러졌고
임대인은 직접 입주하겠다고 했다.
우리는 또다시 집을 알아보게 되었다.
다만, 분양받은 아파트의 입주 시점까지 1년 남짓이라
전세가 아닌 월세를 선택했다.
이사 날짜가 다가오던 어느 날,
임대인에게 연락이 왔다.
본인들이 입주할 집이니
구조도 보고, 가구 배치도 구상할 겸
집 내부를 한 번 봐도 되겠느냐는 요청이었다.
나는 흔쾌히 OK 했다.
이때까지는 몰랐다.
그 방문의 진짜 목적을.
이사를 얼마 남지 않은 주말 저녁,
임대인이 방문했다.
집에는 나와 첫째만 있었다.
마지막까지 예의를 지키고 싶어
공손히 인사했고,
따뜻한 캔음료도 건넸다.
하지만 임대인은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음료를 몇 모금 마시더니 바닥에 내려놓고
집 안을 샅샅이 훑기 시작했다.
사진도 200장은 넘게 찍었다.
“이사 날까지 깨끗하게 써주세요.”
명령인지, 충고인지 모를 말을 남기고
임대인은 그렇게 홀연히 떠났다.
역시 인간은 변하는 게 아니구나 싶었다.
와이프한테서 전화가 왔다.
"임대인이 집 잘 보고 갔어?"
"어, 본인들이 들어올 집이라 그런지 구석구석 사진까지 찍더라.
외풍도 심하고 수납도 별로 없는 오래된 집에 들어와 살 생각하니
걱정이 많나 봐. 하하하."
이사 일주일 전, 부동산에서 연락이 왔다.
정산과 보증금 반환 일정 조율이겠거니 했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3일 뒤면 이사 나가시죠?"
"네, 임대인이 들어온다고 하더라고요.
얼마 전에는 집에 와서 사진만 몇 백장을 찍더라고요."
"아, 그때 사진을 많이 찍던가요?"
잠시 후 부동산을 통해 전달받은 파일 하나.
A4 용지 20장 분량의 자료.
임대인이 직접 작성한 문서였다.
(내용증명은 아니었다.)
그날 찍은 사진들과 함께
우리가 집을 엉망으로 사용했다는 주장.
매주 일요일에 청소,
거의 매일 환기했음에도 발생한 결로,
입주 당시 이미 바닥까지 드러나 있던
베란다의 콩자갈 등
우리가 입주하며
사진까지 찍어 전달했던 하자들을
임대인은 모두
우리의 귀책으로 돌리고 있었다.
결론은 간단했다.
수리비 140만 원
추가 하자 발생 시 비용 @
보증금에서 공제
그리고 문서 말미에는
판결문에서나 볼 법한 단어가 적혀 있었다.
“임차인은 이에 응할 것을 명합니다.”
부동산에서도 난처해했다.
이런 방식은 처음이라고 했다.
나는 부동산을 통하지 않고
임대인과 직접 소통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시간을 벌었다.
이틀 후 임대인이 그 파일을 보내왔다.
임대인이 보내온 파일은 hwp.(한글) 파일이었다.
나는 한글 뷰어가 깔려 있지 않아 확인이 어려우니
전화통화나 카톡 메시지로 보내달라고 했다.
(추가적으로 시간을 끌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 사이 나는 대응 자료를 만들었다.
중요한 부분은 붉은색과 밑줄로 강조했다.
그렇게 조용히 물밑작업을 진행했다.
다음날 (이사 3일 전) 아침,
임대인은 또다시
가독성조차 떨어지는
수천 자의 장문 메시지를 보내왔다.
나는 내용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그날 저녁 8시에 확인을 했다.
(이때까지 '1'이 지워지지 않았을 듯)
그리고 정확히 2시간 뒤인 10시에
준비해 둔 자료를 전송했다.
임대인처럼 글로만 주저리주저리 하기보다는
사진과 메시지를 주고받은 내역, 시간 등을 표기했고
임대인의 억지 주장에 정면으로 반박하는 슬라이드로 보냈다.
못 본다는 말을 하지 못하게 사진 파일로 변형해서 보냈다.
그다음 날 오전, 임대인은 또다시 장문의 메시지를 보냈다.
결론은 수용 불가.
"돈을 주지 않으면 보증금도 없다.”
이러한 억지가 먹히는 이유는
임대인이 전세 제도의 허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통, 전세로 살던 세입자는
이사를 가게 돼도 전세로 구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이사 나가는 날에는 보증금을 돌려받아야지만
이사 들어가는 새로운 집에 잔금을 할 수 있다.
보통 집주인은 잔금을 해야만 세대 비밀번호를 알려준다.
즉, 잔금을 해야만 이사가 가능하다.
보통 전세 거주 시 많은 문제가
보증금 반환 때문에 발생한다.
나는 이사 가야 하는데
집주인이 보증금을 반환하지 않고
배 째라고 눕게 되면
새로운 집으로는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
짐은 뺐는데 다시 넣을 곳이 없어지는 것이다.
나의 상황을 보자면
임대인이 배 째라고 누워있는 상황이다.
다만, 누워있다가도 140만 원+@를 주면
다시 훌훌 털고 일어나겠다는 뜻이다.
여기서 내가 만약 새로이 이사 가는 집에
잔금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면?
그대로 당하게 된다.
하지만, 나는 월세로 가는 것이었고
월세보증금 잔금을 위해 마통까지 뚫어놨었다.
임대인이 보증금을 주지 않아도
나는 버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두었고,
여차하면 임차인 등기권 설정을 위해
법원도 방문하려고 했었다.
즉, 상대가 쓸 수 있는 모든 수에 대비하였다.
준비하면서 느낀 건
전세라는 제도가 순전히 '신뢰' 하나로 떠받치고 있는 제도였고
절대로 완벽한 제도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임대인에 대한 신뢰'하나가
이 제도를 지탱하고 있었다.
돈을 쥐고 있는 자가
장난을 치지 않고 정상적으로 행동한다는 그 신뢰 하나가
이 제도를 살아 움직이게 하고 있었다.
이윽고 이삿날이 도래했다.
예정대로 우리는 이사를 위해 짐을 빼기 시작했다.
- To be continu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