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되려면 날기 위한 연습을 해야 한다
이윽고 이삿날이 도래했다.
예정대로 우리는 이사를 위해 짐을 빼기 시작했다.
하루 전, 임대인과 11시 반에 만나
보증금 반환과 장충금(장기수선충당금) 등
정산을 할 수 있도록 부동산에 요청을 했다.
부동산은 임대인 측에 통보를 했으나
임대인의 대답이 뜨뜻미지근하다고 전해왔다.
아마도 임대인 본인이 제시한 (억지주장한)
'140만 원 + @'를 수용하지 않으면
정산을 진행하지 않겠다고 한듯했다.
본인이 보증금을 반환하지 않을 경우
보증금 반환이 필요한 우리 쪽에서
먼저 숙이고 들어갈 것이라 생각했을 테다.
다만, 그 수를 포함한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구상했고
각 시나리오별 대응책도 마련했기에
큰돈이 걸려있었지만 마음은 쫄리지 않았다.
11시 반, 역시나 임대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본인들의 이사가 늦어지기도 했고
멀리서 오느라 시간이 걸린다는 핑계였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집과 직선거리로 100m로 넘지 않는
바로 옆 단지에 있는 아파트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임대인은
보증금을 반환해주지 않으면
우리가 다음 집으로 이사 가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다만, 나는 월세집으로 이사 가는 터라
임대인의 보증금 반환 없이도
잔금 후 이사를 진행할 수 있었다.
부동산에는 내가 멀리 이사 가는 것이 아니기에
임대인이 도착하면 연락 달라고 했다.
그렇게 나는 보증금 반환을 받지 못한 채
이사를 시작했다.
임대인은 부동산에 나타나지 않은 채
카톡 메시지를 통해 임차인인 우리의 귀책이라며
또다시 판결문처럼 읊어대기 시작했다.
원상복구 의무 미이행,
파손 부분 도배 미진행,
콩자갈 파손 부분 재시공 미이행 등.
나 또한 우리의 귀책이 아님을,
심지어 입주하면서 파손되어 있던 부분을 임대인에 알렸음에도
오히려 그 또한 우리의 귀책이라 주장하는
임대인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그러면서도 정상적인 보증금 반환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임차인 등기권 설정, 지연 배상금 연 12% 청구,
현관 및 세대 비밀번호 미공유 등
임차인이 쓸 수 있는 모든 방법을 행사하겠노라 반박했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어느새 3시 반이 되었다.
이사를 하다 보니 휴대폰이 방전되기 직전이었다.
짐이 사방에 널려있는 거실의 한 구석에 충전시켰다.
충전기를 꽂아둔 곳에 가구를 배치해야 해서
충전기를 빼고 휴대폰을 열어 봤다.
부재중 전화 30통.
그리고 카톡 메시지 15개.
13번째 까지는 늘 그렇듯
나에게 압박을 가하는 내용이었다.
14번째 메시지는 부동산으로,
몇 시까지 올 수 있는지 묻는 내용이었고
대망의 마지막 15번째 메시지는
보증금과 장기수선충당금을 전액 반환할 테니
계좌번호를 알려달라는 내용이었다.
부동산에 연락했다.
"사장님, 방금 임대인이 계좌번호를 알려달라는 메시지가 왔네요?"
"임차인분께서 이기셨어요!! 보증금이랑 장충금 입금받으시면 부동산에 와주세요~"
이겼다. 그렇다. 내가 이겼다.
계약 당시부터 을이었던,
가진 것 없던 임차인인 내가 이겼다.
여러 시나리오를 분석하고
그에 맞게 전략을 짰기에
자칫 먹힐 수 있었던 상황에서도
당하지 않고 방어할 수 있었다.
이사가 거의 마무리 됐을 시점,
와이프에게 나머지를 맡기고
부동산으로 갔다.
부동산으로 들어서자마자
중개사분들께서 그동안 하지 못했던
많은 말들을 해주셨다.
1. 임대인의 그 작태(?)가 처음이 아니라는 것.
2. 40대 중반인 임대인의 배후에는 70대 후반의 부모가 있다는 것.
3. 거리가 멀어 늦는다는 임대인은 사실 바로 옆단지에 살고 있었다는 것.
4. 임대인이 보증금을 반환하겠다는 메시지를 보낸 장소가 부동산이었다는 것.
5. 기타 보증금을 반환하면서 했던 말들.
아직 상황이 마무리되지 못한 시점에서
차마 나에게 할 수 없었던 썰들을
30분 동안 쉼 없이 쏟아내 주셨다.
이 전에도 전세제도를 악용해서
전 세입자에게도 뜯어(?) 먹었다는 것도,
중개사 입장에서 역대급 진상이란 말도 해주셨다.
"임차인님이 그분 콧대를 꺾어주셔서 저희도 속이 얼마나 후련한지 몰라요!"
아, 역시 당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구나.
말이 안 통한 것도 나뿐만이 아니었구나.
보증금을 반환받지 못한 상황에서
우리도 세대 비밀번호를 알려주지 않았기에
임대인의 이삿짐차량도 아파트 단지 앞에서
오후 4시까지 대기하고 있었다.
비밀번호를 알려주는 과정에서
해당 이삿짐센터 팀장과도
잠시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이삿짐을 뺄 때부터도 어찌나 갑질을 하던지
얄미워 죽겠다고 하셨다.
한 예로, 이삿짐을 다 빼고 나서 팀원 4명과 함께
1층에서 대기하고 계셨다고 한다.
임대인이 손가락에 수도꼭지에 다는 필터를 건 채로 보여주면서
"이거 하나도 못 챙기셨는데 제가 이삿짐센터를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요? 당장 다시 올라가서 하나하나 확인하세요"
라고 했다고 한다.
그런 와중에 우리랑 대치하고 있는 걸 보고는
"역시나 문제 있는 X이네요"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임대인의 짐을 옮기면서 확인할 수 있었던
임대인 부부의 직업을 알려주셨다.
임대인은 가정의학과 의사고,
임대인의 남편은 변호사였다고 한다.
나는 일개 직장인으로서
의사-변호사 부부를 이겼고,
이삿짐센터는 임대인에게
이사 지연에 따른 추가비용 60만 원을
청구하겠다고 했다.
임차인, 부동산, 전 세입자, 이삿짐센터.
이해관계자 중에서 어느 한 곳으로부터도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한 임대인은
흔히 말하는 고소득 전문직임에도
일말의 존중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역대급 임대인과의 어마어마한 스토리이자
보증금 반환을 미루는 악성 임대인에 대한 공략집 에피소드 하나와 함께
나의 피 말리는 마지막 전세살이는 종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