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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오른 생각

걷다 보면

등산 일기 10

by 유연

물러서기를 주저하던 더위는 한동안의 비에 씻겨나갔다. 폭삭한 외투가 제법 잘 어울리는 바깥공기다. 바람 끝이 벌써 찬 걸 보니 올해도 가을은 스쳐갈 모양이다. 지난 10월의 긴 연휴를 앞두고 친한 동기와 등산을 계획했지만 무산되었다. 비 때문이었다. 유독 비소식이 잦았던 연휴가 끝나고 나서야 우리는 가까운 소래산을 찾기로 했다.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소래산 공영주차장은 갖가지 차들로 그득했다. 나를 에워싸는 청상한 공기는 가을이라는 것을 천명했다.



들머리를 지나 우리는 아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무리하지 말자는 나의 당부 때문이었을까. 동기가 나와 걸음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 느껴질 때쯤, 잊고 있던 감각들이 떠올랐다. 적당한 호흡과 속도 같은 것들 말이다. 산은 언제 오더라도 이렇게나 상냥하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일상의 구석으로 밀어두었던 산은 의연하게 나를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계절을 한껏 머금고서는 우두커니 서있던 모양이다.



호흡이 가빠질수록, 오히려 머릿속은 고요해졌다. 그토록 열망했던 쉼은, 일정으로 빼곡한 황금연휴보다는 이곳에 있었다는 것을 오늘에서야 알게 된다. 산길은 나로 하여금 자꾸 아래를 바라보게 만든다. 발 밑에 널린 바스락 거리는 행복들을 느끼며 걷다 보니 동기와 나는 주차장과 동떨어진 곳으로 내려와 버렸다. 택시를 타고 주차장으로 가는 길. 이렇게 또 한 번 겸손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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