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의 삶에 얽힌 얼굴들

: 나의 스승들

by 유영

봄의 끝자락이구나. 가정의 달에 스미는 따스한 볕. 소파에 마냥 널브러지는 나른한 늦오후다. 어제 이모가 주고 간 딸기는 금세 먹었고 겨우내 먹었던 귤은 이제 밍밍한데. 심심함과 무료함 사이 어딘가에 싱거움이 자리할 즈음 문득 창을 타고 넘어오는 활기에 시선을 빼앗긴다. 떼굴 눈을 굴려 바라본 창을 통해 근사하게 꾸민 이들이 눈에 띈다. 한껏 생명력을 뿜어내는 행인들과 푸르른 잎사귀 속 은은한 보랏빛 꽃이 어우러져 조화롭다. 벌써 오월이니 여름도 성큼 다가오려나, 느릿느릿 손을 움직여 리모컨을 집는다.


이유 모를 지긋지긋함에 채널을 정처 없이 떠돌다 작은 반가움에 손을 뗀다. 드라마에서 자주 보이던 배우와 그의 할아버지의 얼굴이 커다란 액정에 비친다. 하얗게 센 머리칼의 할아버지. 지긋한 인상이 꽤 인자해 보인다. 애교로 똘똘 뭉친 손자가 재잘재잘 떠드는 동안 할아버지는 울려오는 전화를 받는 데 여념이 없다. 이어지는 대화 속에서 할아버지의 얼굴에는 점점 행복을 표상하는 충만함이 피어오른다. 발신인은 할아버지에게 안부를 묻고,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건강과 안녕을 빌어준다.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발신인의 목소리에서도 연륜이 묻어난다. 할아버지는 흐릿한 목소리에 힘을 실어 고마움을 답한다. 진심 어린 마음이다. 그렇게 어떤 이와의 통화가 끝나면 새로운 이로부터 전화가 걸려 온다. 끊이지 않고 이어져 발신인은 사라졌다가 새로이 생겨나는데 계속되는 덕담 속에서 어떤 추억들은 살아나고 점차 생생해진다. 고이고이 소중히 간직된 추억들이 옛것이면서도 또렷하게 피어난다. 한동안 훈훈한 장면이 이어진다. 전화선 너머로 오고 가는 아낌없는 마음들을 멍하니 듣다 명확한 지점으로 이동하고 싶다.


바삐 스쳐 간 시간의 흐름에서 아직 마음에 멈춰있는 이를 떠올려 본다. 거대한 덩치와 찰랑거리는 머리칼로 우아하게 피아노를 치던 그. 커다란 눈에 담긴 열정이 아른거려. 빨간 빵모자를 즐겨 쓰고 종종 나를 의심의 눈초리로 보던 이. 타인으로부터 받는 불신이 이렇게 아리다니. 특이한 말버릇으로 수업을 흐트러뜨리다 이내 남다른 카리스마로 긴장시킨 분, 여긴 여전히 고교 추억 회상의 중심에 있지. 통통 튀는 팝콘 같던 우리 모두를 넘치는 사랑으로 어우르던 류 선생님. 성인이 되어서도 나를 이끌어 주신 감사한 분. 강의가 끝나면 어김없이 장문의 응원을 전해주신 권 교수님. 경이로울 만큼 존경스러운 어른이었지. 따끈따끈한 수석 졸업장을 들고 장밋빛 얼굴로 달려간 국문학과 사무실에서 어색하게 맞아준 교수님들. 아 온도 차이 화끈거려. 문화를 다루겠다는 목표를 걱정하고, 응원하고, 길을 열어주고, 손을 잡아준 이들의 얼굴 여럿. 어떤 하나의 삶과 그에 얽힌 인연과 이야기를 새삼스레 바라본다. 어떤 지점에서는 이야기가 펼쳐져 피식 웃다가도 단번에 공허해지기도 한다. 대충 감사함으로 귀결시키려다가도 씁쓸했다가 충만해졌다가 황당했다가 희망찬 마음이 무성하게 자라난다. 두둥실 떠올라 겹치고 흩어지는 수많은 얼굴들. 한편 가장 크게 자리한 구석의 얼굴은 비어있다. 얼굴 없는 은사님을 향한 공허한 기다림이 언제부터였더라.


짙은 유대감을 공유할 선생님을 찾았다. 설레는 새 학기의 첫날이 특히 그랬다. 이번엔 젊고 상냥하고 유쾌한 담임 선생님이 천사 같은 얼굴로 나타나기를. 긴장되는 마음으로 기다리다 터벅터벅 발소리가 가까워지면 마음도 같이 동했다. 동동. 앞뒤로 발을 흔들었다. 발소리가 교실 코앞에서 멈추고 문이 드르륵 열렸다. 눈앞에 등장한 낯선 얼굴. 한자나 도덕을 가르칠 것 같은 고루함이 풍긴다. 동동거리던 발도 동하던 마음도 일시 정지. 서운하고 실망스러운 마음에 샐쭉해진다. 야속하리만치 비슷한 이미지의 선생님들과 연이 닿는 건 왜일까. 한 학년에 한 분쯤은 꼭 햇살 같은 선생님도 계시는데. 푸릇푸릇 자라나길 기다리는 호기심 씨앗을 싹 틔워줄 선생님과는 어쩐지 거리가 멀었다.


함께 친했던 친구들끼리서 같은 반이 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꼭 나만 다른 반으로 떨어진 채로. 들어 보니 거긴 매달 재미난 자체 행사를 진행하느라 배꼽을 잡는다던데, 그래서인지 눈에 띄게 즐겁고 화기애애했다. 뜨겁게 상기된 분위기가 이질적이다. 우린 완전 미지근해. 흐르는 열기를 잔뜩 머금은 웃음소리는 찬 복도를 타고 쌀쌀하게 넘어왔다. 우리는 앞으로 영어 다음으로 중국어가 뜰 것이라는 이유로 뜻도 모르는 중국 동요를 외워야 했다. 이얼싼쓰- 워아이니- 성조도 무시한 채 흥미 없이 부르고 있노라면 그날 하굣길엔 유독 서러움이 사무치는 것이었다. 꿈꿔온 만화영화 속의 상냥한 선생님이 나올 확률은 희박할 터였으나, 모든 행운이 자신을 향하기를 바라던 아이는 선생님 운이 없다며 입을 삐쭉 내밀다 못해 오리가 될 것 같았다.


겉모습만으로 고루하다며 일찍이 재단했던 선생님들은 대체로 따뜻하고 친절하셨다. 그만의 현명함이 빛을 발하는 때도 왕왕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바르고 착한 아이와 남달리 애정을 갖는 아이는 달랐다. 나는 잘 웃고 착하고 예쁘다는 감상을 자주 들었다. 무엇이든 곧잘 잘 해내어 칭찬을 들으며 무탈하게 지냈다. 이렇게 한 해를 마무리할 즈음엔 꼭 그렇게 속만 썩이고 지지리도 말 안 듣던 뺀질뺀질한 어떤 애가 선생님의 애제자가 되어 있었다. 선생님의 옆구리에 쏙 붙어 있는 애들을 보면 어떤 팽창된 서운함으로 그 해를 마무리하게 되는 것이었다. 매년 혼자만의 예단으로 한 해가 시작되고 그 마무리는 탄식이었으니 시작과 끝이 썩 마음 같지 않았던 셈이다. 그래도 어김없이 특별한 제자로 맞아줄 이상적인 선생님을 기대했다.


“선생님!” 이제는 작고 어린 얼굴들이 나를 부른다. 안녕하세요. 내성적인 얼굴. 오늘 악보 안 가져왔어요. 걱정 어린 얼굴. 오늘 간식 뭐예요? 짓궂은 얼굴. 저 시험 망쳤어요. 삐쭉대는 얼굴. 내일은 학교에서 요리한대요. 설레는 얼굴. 저 감독님이랑 상담 안 하면 안 돼요? 불편함이 잔뜩 낀 얼굴. 저는 선생님이 좋아요. 수줍게 반짝이는 얼굴. 제각각의 생김새와 성격이 나타난 생글생글한 얼굴들을 맞는다. 그럼 나는 머리핀 바뀌었네, 잘 어울린다. 연주회 준비는 잘 되어 가? 지난주 학교에서 있던 억울한 일은 잘 해결했니? 손 다쳤다며, 병원은 다녀왔어? 일본 여행은 재밌었니? 나를 보는 얼굴들에 정성껏 응한다.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일흔 명의 얼굴들. 유독 착하고 예의 바른 어딘가 익숙한 얼굴을 향한 시선도 다시 한번 챙긴다. 나는 어떤 얼굴을 기다리다 어떤 이에게 다가간 얼굴이 되었다. 그들에게 나는 어떤 얼굴일까, 잠시 머물러 본다.


쳇바퀴처럼 수십 명의 얼굴을 만난다. 사내 동료들과 예술 교육 참여자들 그리고 협력 업체 담당자들의 얼굴을 스쳐 간다. 정신없이 마주하는 얼굴들. 글방에 간다. 열 명의 반가운 얼굴을 만나고 마음을 듣고 울림을 얻는다. 음악을 한다. 열정적인 표정의 선생님. 반가운 짝. 익숙한 얼굴과 눈을 맞추어 입을 움직인다. 교육을 듣는다. 열네 명의 얼굴을 마주하고 강사님의 총기 있는 눈빛에 응한다. 연필을 꼭 쥐고 바삐 움직인다. 잘하고 싶은 마음에 그 얼굴을 골똘히 바라본다. 삶과 이야기가 비친다. 마음이 마음에 들어차 스민다. 서서히 젖어 든다. 바쁜 삶의 흐름 속에서 어떤 이는 나의 선생님이고, 어떤 이는 나를 선생님이라 부른다. 선생님은 아니지만 어떤 깨달음을 주는 이를 마주하고, 누군가는 내가 자신에게 그런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어떤 얼굴들이 서로 응해서 뜻하지 않은 길을 열고, 답을 주고, 혜안을 건넨다. 어떤 이의 삶에 들어찬 얼굴들이 촘촘히 얽혀 있는 듯하다.


여전히 마음에 자리할 얼굴의 주인공을 찾는다. 그 얼굴의 이름은 선생님일까, 스승님일까, 은사님일까 아니면 다른 이름일까? 평범한 얼굴들이 이룬 특별한 관계를 동경했다. 길을 잃을 때 찾아갈 얼굴, 나의 기쁨을 함께할 얼굴, 진심 어린 안녕을 기원할 얼굴이 필요하다. 이분이 나를 세우신 분이에요. 하고 소개할 얼굴을 찾는다. 그 여정의 끝에서 입이 삐쭉 나온 아기 오리는 언젠가 백조가 될 수 있을까,


그새 햇살이 옅은 색으로 서서히 저문다. 그 자리를 부드러운 서늘함이 대신한다. 두 맨발을 느릿느릿 문대다 얇은 담요 안에 다리를 꼬깃 구겨 넣는다. 양말을 신을까 잠시 고민하던 중 새소리가 잔잔하게 흘러든다. 귀를 간질이다 이내 잦아들고 찾아온 여백은 차 소리가 채운다. 슈웅 슈웅. 싸맨 담요를 걷고 뭉그적 몸을 돌려 아래 깔린 폭신한 러그로 떼굴 굴러 내려온다. 폭. 보들보들한 털실이 피부에 닿는다. 여러 얼굴들이 들어찬 얼굴에 안정감이 피어난다. 마침 살랑이는 은은한 보랏빛 향이 스친다. 은은한 라일락이 코를 매만지다 마음을 지긋이 감싸 안는다. 한가로운 오월의 얼굴이 건넨 위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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