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마다의 잔상

by 유영

최근 좋은 기회로 지역 전시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다. 같은 문화 업계에 몸을 담고 있는 지인이 남양주시 공모 사업에 선정되어 함께하자는 제안이었다. 친할아버지 때부터 3대째 남양주 토박이인 나의 흥미를 자극하는 솔깃한 내용. 흔쾌히 수락했다. 나는 생을 비롯한 친족들과의 혈연, 친구, 다수의 업무적 집단까지 이곳에 있다. 그래서 함께 머무르는 이들보다 몸과 마음이 유달리 가깝다. 고향이자 서식지인 곳을 다루려니 오히려 갈피를 못 잡고 골머리를 앓았다. 그러다 문득 아빠가 젊었던 시절에 사진을 했다는 것이 떠올랐다. 오래된 남양주의 풍경이 담긴 사진이라도 몇 장 찾을 수 있을까 싶어 두리번 앨범을 찾았다.


사진첩은 결혼 예물인 아이보리 빛깔의 자개 서랍장에 고이 들어있었다. 이사를 오기 전에 살던 아파트에서부터 우리 가족 앨범들은 저곳에 고정된 채 컴컴하게 보관되어왔지. 두리번 눈을 돌려 서랍장을 찾았다. 새삼스레 오랜만에 마주한 서랍장에는 매캐한 먼지가 조금 덮여 있는 것 말고는 그런대로 여전히 근사했다. 시간의 흐름이 무색해 보였다. 문을 열어 보니 앨범들이 제대로 서지 못하고 쓰러진 채 서로를 짓누르고 있었다. 햄버거 속 재료같이 겹겹이 쌓인 모양새를 멍하니 보다 두꺼운 앨범 여러 권을 꺼내 들었다.


오랜만에 빛을 본 사진첩의 속지들은 매우 압축되어 있었다. 서로 엉겨 붙다 못해 한 장씩 들어 올릴 때마다 비닐에서는 쩌억쩌억 소리가 났다. 아빠의 앨범은 풍경보다는 주로 인물 사진이 많았다. 속지들을 애써 한 장씩 떼어가며 바라보니 지나간 얼굴들이 눈에 띄었다. 이 남자애는 인어공주 놀이만 하면 나를 마녀를 시켰었지. 이름은 장수영이었다. 내가 네 이름은 수영장이라고 반격했던 장면이 새록새록했다. 이 여자애는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오던 동생이다. 또래보다 유난히 체구가 작아서 우리 엄마가 밥을 많이 주었던 기억이 났다. 전시에 올릴 풍경 사진을 찾는 것은 잊어버리고 추억 여행 삼매경이 됐다. 반갑고 익숙한 얼굴을 떠올리며 그에 맞는 이름과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러다 문득 서랍장 바닥에 놓인 분홍색 상자가 눈에 띄었다. 일곱 권의 두꺼운 앨범의 하중을 받고 있던 상자. 커다란 모양새가 낯설기도 하면서 묘하게 익숙했다. 안에 어떤 내용물이 가득 들었는지, 뚜껑이 박스를 덮지 못한 채로 겅중 들려있었다. 안 맞는 모자를 쓴 것처럼 어설프게 들린 뚜껑을 열어 보니 속에는 알록달록한 편지가 가득했다. 작은 카드 형태의 편지 봉투부터, 크리스마스 편지, 캐릭터 편지, 꽃 모양 장식이 입체로 붙어있는 편지 봉투도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집어 들어 보니 유치원 때 친했던 사이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주고받은 편지가 가득했다. 어떤 것은 나의 여섯 번째 생일을 기념하는 축하 편지, 어떤 것은 챙겨주어서 고맙다는 전학생의 편지였다.


그중 가장 많은 편지의 발신인은 유치원 시절 관계했던 m으로부터 온 편지였다.

“영아 나야 나는 니가 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 니도 네가 좋니? 넌 여덜살이 되면 어떤 초등학교를 다니니? 나는 오빠랑 같이 학교를 다닐 꺼야. 니도 나랑 같이 다니면 좋을텐대. 사랑해. 그럼 안녕”


“나 니가 없어서 나 니 보고싶어. 우리 선생님 여자야. 파랑반에 자주 놀러갈께 초록반 재미 없어 근데 나 니 좋아 ㅎㅎ 나 파랑반 선생님 좋아 우리 선생님 시시해 우리 자주 편지 쓰자 사랑해”


m은 나의 유치원 노랑 반 동창이자 첫 단짝 친구다. m이 건넨 편지지 속에는 사랑한다는 어린 마음과 네가 가장 좋다는 마음이 삐뚤빼뚤한 글씨로 한가득 적혀있었다. 우리는 반에서 가장 키가 큰 여자애들이었다. 부채춤을 출 때도 각각 왼쪽과 오른쪽 양 끝에 서야 했고, 단체 사진을 찍을 때도 가장 맨 끝줄에 나란히 섰다. 음악 장기 자랑을 할 때도 모두가 장구를 칠 때 우리 둘만 심벌즈를 치고, 단체 이동할 때면 맨 뒷줄에서 씩씩하게 함께 이동했다. 둘은 여러모로 공통점이 많았고, 자주 붙어 서로를 의지했다.(유치원 단체 사진에 m과 내가 함께 브이 포즈를 내밀던 사진들을 보면 아무래도 그럴 것이다) 가만히 앉아 편지를 읽어보니 우리는 말을 배운 이래로 글을 통해 순수한 마음을 고백하는 시기를 함께 보냈다. 타인을 향한 애정 어린 마음을 아낌없이 전하는 방법을 같이 연습했다. 유치원을 졸업하고 m은 서울로 곧장 이사를 떠나 우리는 서로의 근황을 모르게 되었지만, 종종 유치원 사진을 보게 될 때면 m의 생각이 나곤 한다.


어떤 훈훈한 아련함에 젖은 묘한 마음으로 m의 편지를 고이 접어 봉투에 다시 넣어놓았다. 편지를 내려놓은 자리 옆에는 갈색의 정갈한 편지 봉투가 있었다. 뒤집어 들어 보니 명조 체를 빼닮은 근사한 글씨체가 눈을 사로잡았다. 고등학교 친구인 h로부터 온 것이었다.


“빵재가 어제 또 나 불러내서 혼나느라 학원 늦어서 또 혼남. 올해 진짜 최악이야 그래도 너랑 같은 반 된 건 참 좋아;; 빨리 고1 끝내고 내년에 우리 견학 동아리 만들어서 같이 다니자 꼭 이야.”


h의 편지에는 대체로 당시 담임 선생님에 대한 불만이 한가득 적혀있었다. 2016년의 h는 그야말로 불같은 사람이었다. 남녀공학이지만 분반 제도를 고집했던 우리 학교의 각 학급은 동성의 학생만 약 40명이 모여있었다. 입시를 앞두고 내내 화기애애하다가도 한순간에 의가 상하고 소원해지던 그런 예민한 시기. 그 속에서 h는 어떤 묘한 신경전에 절대 참지 않는 학생이었다. 선생님의 불합리함에도 목소리를 내고, 무례하게 구는 친구에게 의자를 던지며 화끈하게 맞서는 면모가 있었다. 그럼 나는 애써 웃어주며 잘 지내라고 타이르곤 했다. 우리는 불과 물처럼 꽤 조화로운 관계였다. 고등학교 때 견학 동아리를 만든 h는 성인이 되더니 틈만 나면 훌쩍 홀로 여행을 갔다. 특히 후쿠오카에 다른 집을 마련했나 싶을 정도로 자주 오갔다. 그런 h는 세상에 다양한 성향의 사람이 있다는 것을 여행 중 몸소 느끼더니 서서히 유해졌다. 술집에서 무례하게 추파를 던지는 이를 보아도 그러려니 하는 모습을 보니 확실히 그런 것 같았다. h는 여행 예찬자가 되었다. 종종 나에게도 여행을 권했다. 여행이라면 질색하는 아빠로 인해 여행에 소극적인 나에게 h는 혼자 하는 여행의 장점을 누누이 읊어주었다.


스물둘이 되던 해를 맞아 혼자 해외여행을 떠났다. h의 강력한 권유에 용기를 얻었다. 처음 떠난 대만은 그 어느 곳보다도 아름다웠다. 환상적인 물가에 먹고 싶은 메뉴를 골라 마음껏 먹고, 보고 싶은 강과 숲을 바삐 다니고 그러다 졸리면 숙소에 들어와 낮잠을 잤다. 그렇게 홀로 하는 여행에 매료되었다. 우리는 각자 다닌 여행지를 자주 꺼내어 공유했다. 서로의 블로그를 드나들며 여행기를 보고, 술을 마시며 어떤 여행지가 뜨는지에 대한 대화를 실컷 나누었다. 한 곳에 가만히 있던 법이 없던 h는 험난한 인테리어 디자이너로의 삶을 택하더니 점차 여행이 뜸해졌다. 자연스레 나도 현실에 치여 예전만큼 붙어 지내기는 어려워졌다.


종종 멀어지는 인연에 속절없이 아쉬운 날이 있다. 마음을 준 이들과 어느샌가 데면데면한 사이가 되면 하염없이 어떤 허무함이 아른댄다. 숱한 날을 함께한 특별했던 친구들과 자연스레 멀어질 때는 유독 그렇다. 편지 봉투를 하나하나 펼쳐 읽으며 발신인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대부분은 지금까지 여전한 인연이 드물었다. 이제 멀어진 이들이라는 것이 못내 씁쓸했다. 그럼에도 멀어진 이들이 여기 이 편지지에 짙게 남아있음을 느낀다. 멀어져도 분명히 나에게 붙어있다. 떠난 이들의 잔상이 여전히 나에게 새겨져 있다.


남겨진 마음은 선명하게 아른댄다. m과 나누던 우정의 마음, h와 입 모아 떠들던 웃음, 그 외 오고 가며 마주치는 수많은 얼굴들.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나는 그 이야기를 차곡차곡 쌓아왔다. 여전히 나는 친구에게 손 편지를 주고받는 것을 좋아한다. 이제는 여행에서의 두려움은 없는 사람이 됐다. 함께하는 여행보다 홀로 하는 여행에 끌린다.


m과 h는 여전히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그 마음의 얼굴과 언젠가 마주치는 찰나를 잠시 상상해본다. 다시 만나고 또 금방 멀어진다고 하더라도, 서로에게 서로가 남아 저마다의 새로운 날을 만들 것이다. 멀어져도 남겨진 잔상이 근사하고 애틋한 풍경을 만들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언가 멀어지더라도 분명 일부는 남는다는 것을 아는 것일 테다. 아른대는 얼굴들이 데려갈 새로운 날의 풍경이 궁금하다. 그런 마음과 함께 수십 개의 편지 봉투를 스윽스윽 모아냈다. 두 손을 휘적휘적 바삐 움직여 박스에 차곡차곡 넣는다. 다시 분홍색 박스가 알록달록한 편지지로 가득 찼다. 그런 상자를 또 잠시 바라보다 뚜껑을 다시금 겅중 닫아놓았다. 뚜껑의 틈새로 어떤 이야기들이 형형하게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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