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정을 쏟게 된 일
겨울. 몸은 둔해지고 사기도 꺾이는 겨울. 작년에 홀가분히 떠난 겨울이 열 달을 돌아 어
김없이 찾아오는, 이 아름답고도 지긋한 순리에 애써 수긍한다. 늦겨울은 잘 나는 것은 나에
게 중대한 숙제다.
펴내기에 앞서 내가 겨울을 반기지 않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겨울은
나를 꽁꽁 싸매게 만든다는 것. 예쁜 옷을 골라 외출해도 그 안에는 내복도 껴입고 두꺼운
외투까지 두터이 싸매야 한다. 손이 꽁꽁 발도 꽁꽁 어는 탓에 몸의 감각도 쉬이 둔해진다.
애써 귀여운 목도리를 둘둘 말고 알록달록한 장갑을 끼더라도 방한 효과는 그닥 효과적이지
않다. 엄마를 닮아 유난히 찬 몸을 잘 관리해야 해서, 찬기가 들고 나면 하루 이상 뜨끈하게
몸을 보강해야 한다. 그래서 쉬이 연약하고 취약해지는 몸을 유달리 세심히 돌보아야 한다.
그래서 겨울만 되면 햄버거 속 야채가 된다. 이불 안에서 대체로 그런 모양새로 지낸다.
이것은 삶의 환기를 밖에서 얻는 나에게는 일종의 적신호이다. 우리 집은 주상복합의 한 층
을 쓰고 있어 일반 아파트보다 외풍이 많이 든다. 보일러를 돌려도 이곳저곳에서 들어오는
한기가 활기를 절로 꺾어버린다. 그래서 학창 시절에는 전기장판과 겨울 이불 사이에 짓눌
려 귤이나 까먹는 무기력한 한량이 되곤 했다. 그렇게 힘없이 겨울방학을 보내고 나면, 봄이
빼꼼 내민 세상에 얼굴을 들이미는 것이다.
그렇게 마주한 올해의 겨울 역시 묘한 만남처럼 느꼈다. 늘 그렇듯이 추운 날씨에 활동
범위를 좁히고 지내다 보니 새해가 찾아왔다. 삶은 이리도 연속적인데 새해의 숫자를 마주
하는 순간, 내내 이어져 오던 마디가 뚝 끊기는 느낌이 든다. 완전히 새로운 내가 되어야 할
것 같은 압박. 그런 불편한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올해 신년도 역시 추운 몸을 누이
고 묘한 꿀꿀함에 꽁꽁 쌓여 지냈다. 변한 것 하나 없는 나와 내 주변 환경이 낯설어 괜히
불편한 감정을 마음에 가두었다.
그러다 최근에 글방에 가서 적잖이 충격적인 문장을 보았다. 늘 무던하고 강단이 있어 보
이는 그 애는, 새해를 신년이 아닌 구정을 기점으로 인식한다고 했다. 그럼 1월 중순이 지나
가는 이 시점을 아직 2024년도라고 생각한다는 건가. 그런 궁금증도 들었지만 구태여 입 밖
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누군가는 음력 새해이니 당연한 말이지, 라고 뻔하게 조언할 수 있겠
으나, 내 또래가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이 나에게는 몹시 신선한 기조였다. 마치 새로 사귄
친구가 자신의 생일을 음력으로 챙기는 듯한 그런 마음이라고나 할까. 여하튼 이건 새해를
맞고도 여전하게 지내던 나를 어루만져주는 듯한 말 같기도 했다.
그날 저녁 동료들과 설을 잘 보내라는 인사말을 끝으로 두텁고 보드라운 외투 속에 삼켜
귀가했다. 칼바람 같은 날카로운 바람을 헤쳐오는 길이 2024년의 말일로 회귀하는 듯한 기
분이었다. 방에 들어오니 한 해의 발자국이 이리저리 찍혀있었다. 그리고 그런 자취는 <진
짜 새해>가 오기 전 되돌릴 수 있겠다는 안도감과 강한 사기를 느꼈다.
쌀쌀함을 덜어낼 히터를 세게 틀고 방을 데웠다. 그리고 몸과 마음의 짐을 털어내기로 했
다. 가장 눈에 밟히는 옷장부터 뒤엎었다. 오래된 옷과 새로이 장만한 예쁜 옷이 섞여 있는
모양새가 퍽 답답하게 느껴졌다. 애써 모른 체하던 장롱에 쌓인 옷가지들을 끌어냈다. 성인
이 되고도 손바닥 뒤집듯 취향을 바꾸고 거쳐온 탓에 옷의 모양새가 제각각이다. 옷 무덤의
모양새가 거의 거대한 산처럼 보일 때쯤 분류를 시작했다.
다양한 스타일의 옷들을 꼼꼼히 따져보고 순식간에 버릴 옷들을 쳐냈다. 그냥저냥 쓰던
세탁소 옷걸이는 전부 빼내고, 튼튼한 플라스틱 옷걸이를 옷장에 다시 채워 넣었다. 서재에
있는 모든 책과 파일도 꺼내 들고 정리했다. 버릴 것들은 빠르게 분류하고, 소중한 것은 고
이 다시 차곡차곡 정리했다. 평소 눈이 잘 닿지 않는 가구 뒤편 공간 등까지 꼼꼼하게 구석
구석 챙겼다. 청소하는 내내 겨우내 묵은 마음의 짐을 싹 털어내는 기분이 들었다. 완벽하게
방을 새로이 하고 나니, 마음도 어느새 산뜻해졌다.
정돈된 방, 반짝이는 마음과 함께 그렇게 구정을 맞이했다. 오래된 옷가지들을 떠나보내며
진짜 새해를 맞이했다. 괜히 허전한 구석에는 당근에서 새로이 깜찍한 민트색 수납장을 입
양해서 두었다. 그 꼭대기에는 아끼는 모루카 인형도 살포시 얹어놓았다. 모루카의 얼굴이
캣타워에 올라간 고양이처럼 의기양양한 표정이다. 나름 좀 더 근사해진 방에서 새 출발을
위한 다이어리를 쓴다. 겨울이 되어 멀어졌던 일기도 다시 쓰고, 앞으로의 일정도 계획하며
겨울의 활기를 만들어낸다. 차가운 활기의 감촉은 매우 설레는 맛이다.
건강한 겨울나기의 시작은 추위로부터 몸을 웅크리는 것이 아니라, 맞서 움직이며 온기를
퍼뜨리는 것이었으리라. 달라진 환경과 새로운 모양새의 새해가 좋다. 반갑게 맞이한 이공이
오-.의 둥글고 단단한 어감에 마음이 간다. 왜인지 평화롭고 순탄할 것 같은 예감의 새해를
여러 번 곱씹으며, 이- 오- 이- 오-. 입을 웅얼대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