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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남 Dec 21. 2016

[소설] 내려놓음 89 정체성Ⅰ

20대 한의사, 암에 걸리다.



89 정체성Ⅰ




 밤 10시가 되면 잘 준비를 한다. 샤워하고 침도 놓고 EFT도 실시하고 눈 감고 하루를 회상해보기도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생략되는 과정이 많아지긴 했어도 침은 항상 놓았다. 그렇게 11시까지 시간을 보내고 나면 Temodal을 입 안에 털어 넣고 안쓰러워하는 부모님의 시선 속에 침대에 눕는다.

 잠을 잤지만 잔 거 같지 않다. 자면서도 내가 자고 있음을 인지하고, 자면서도 자고 싶어 하는, 그런 잠을 잔다. 그렇게 끙끙거리며 있으면 새벽 6시에 아버지가 야채수 한 잔을 들고 나를 깨운다.


자, 야채수 먹어.
왜 또 지금 줘. 그냥 나중에 먹을래.
안 돼. 어서 먹어.
약 효과 좀 떨어져서 이제 잘 수 있겠다 싶으면 자꾸 깨워. 그냥 아침 먹을 때 주면 안 돼?


 이렇게 항상 투덜거리지만 변함없는 패턴이다. 하루에 4번 이상, 공복에, 다른 약과 시간 간격을 두고 섭취하라는 지침 때문이다. 솔직히 약도 아닌 것이 약 행세하는 게 고깝고, 평소 약을 지어드려도 시간 맞춰 챙겨 드시지 않는 분들이 야채수 지침만큼은 철저히 지키는 모습에 자존심이 상한다. 모든 게 아픈 아들을 낫게 하려는 지극정성이건만 아침의 졸음 앞에서는 한낱 짜증의 원인일 뿐이다.


 이제부터는 어머니의 바쁜 출근 준비시간이다. 8시까지 구미의 학교까지 출근하려면 적어도 7시 이전에는 출발해야 한다. 씻고 식사하고 화장하고 짐 챙기느라 부산하다. 한바탕 소동과 함께 어머니께서 출근하시고 나면, 이제 아버지는 학교 가야하는 동생을 깨운다. ‘5분만’ ‘10분만’의 향연. 그렇게 대략 8시 반까지 야단법석을 떨다 동생마저 학교로 가고 나면 집 안에는 평화가 찾아온다.


 이른 아침부터 아내와 딸의 외출준비를 한 아버지는 마지막으로 아들을 위해 아침 약과 식사를 준비해준 다음 모자란 잠을 채우러 안방으로 들어가고, 소란스러움을 견디며 꾸벅꾸벅 졸고 있던 아들은 슬그머니 나와 홀로 아침식사를 한다. 단지 약을 먹기 위해서. 항경련제와 함께 처방된 위장약을 먹으면 속이 편해져 잠자는 게 한결 수월하다.


 밥 먹고 다시 자고 있으면 10시 반쯤, 늦은 아침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를 끝낸 아버지가 찾아와 깨운다. 병원에 가자고. 부스스 일어나 샤워를 하고 병원 갈 채비를 한 다음 콜택시를 불러 출발한다. 이때가 11시 반이다. 치료라고 해봤자 대기실에서 기다리다 기계 위에 10분 누워 있다 오면 끝이고, 그렇게 해서 집에 돌아오면 1시다. 방사선이 만들어낸 상처와 그를 회복하기 위해 부어버린 뇌. 뇌부종이 가져온 어지러움과 피로감을 견디며 쥐똥만큼 점심 식사를 하고 다시 잔다. 일어나면 대충 3~4시 사이가 된다.


 나에게 주어진 하루는 고작 6~7시간. 반 토막 난 하루를 가지고 저녁 먹고 운동하고 드라마를 본다. 통증이 있거나 힘든 것은 전혀 없다. 피로하고 잠을 깊게 잘 수 없다는 것이 흠이라면 흠. 다만 이렇게 변화를 꿈꿀 수 없는 안정감은 도리어 족쇄가 되어 나를 가둔다.

 이렇게 무엇 하나 한 것 없이 하루가 금방 지나가는데, 하루하루가 느리게 흐르는 건 이상한 일이다. 예정된 방사선 치료가 30번 밖에 없어 이만큼가지고 치료가 될까 걱정하던 내가 왜 하루가 하루인지 이틀이 될 수는 없는지 답답해하고 있었고, 30이라는 숫자는 영원히 가까워지기만 할 뿐 결국은 도달할 수 없는 경지가 되어 있었다.


 방에 D-day 달력을 만들어놓고 치료를 받고 돌아오면 한 장씩 찢었다. 처음에는 줄어드는 두께를 보면 그리 신날 수 없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 종이 두께에 짜증을 내고 있었다. 조급증을 참지 못하고 ‘어차피 내일 갔다 와서 뜯을 건데 오늘 한 번에 뜯어놓자.’하며 두 장 찢기도 하고, 전 날 뜯은 것을 깜빡하고 또 찢어버리는 바람에 그 다음 날 갔다 와서 뜯지 못하는 날에는 하루 공친 기분이 들어 우울하기도 했다. 치료가 없는 주말이 되면 마치 해야 할 숙제를 안 한 압박감에 시달렸다. 심지어 방금 한 장 뜯었는데도 변함없는 종이 두께를 보며, 마지막 종이가 떨어지면 치료가 끝난다는 소리를 들은 심술궂은 베이먼 영감이 도로 붙여놓은 것이 아닐까 하는 망상에 빠지기도 했다.




90 정체성Ⅱ 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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