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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남 Dec 21. 2016

[소설] 내려놓음 91 정체성Ⅲ

20대 한의사, 암에 걸리다.



91 정체성Ⅲ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빈둥거리며 심심해하는 나를 본 주변 사람들은 부러워하곤 했다. 그러나 뒤처지는 것을 강박증처럼 싫어하는 나에게는 고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다이어트 뿐. 머리카락 문제 때문에 밖에 나갈 형편이 못 되어 자전거라도 열심히 돌렸다. 그냥 자전거를 돌리기에는 너무나 지루했기에 병원에서 보려다가 말았던 드라마를 몰아보았다. 병원에 있을 때는 눈앞에서 다 튕겨나가던 자극이 집에 오자 무난하게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페이지 터너》


 페이지 터너는 촉망받는 피아니스트 유망주 여주인공 ‘유슬’과, 장대높이뛰기 국가대표 상비군 남주인공 ‘차식’의 이야기를 담은 3부작 드라마이다. 페이지 터너(page turner)는 연주자의 옆에서 연주자 대신 악보를 넘겨주는 사람을 뜻하는데, 이 드라마의 기획 의도는 다음과 같다.


……우리 인생에도 이런 페이지 터너가 존재한다. 다음 페이지를 넘기기 힘들어 좌절하고 있는 순간 그 페이지를 넘겨주는 누군가 말이다.

 이 드라마 속 청춘들도 누군가는 주인공인 연주자로, 누군가는 그 연주자를 돕는 페이지터너로 무대에 선다. 과연 이 청춘들의 무대는 어떤 모습일까? 이 무대에서 누가 주인공이고 누가 페이지 터너가 될 것인가? ……


 수술 받기 전, 나는 시각 상실에 대한 두려움에 떨었다. 종양 때문에 시야장애 발생했다는 것은 곧 시신경 주위에 종양이 있다는 사실을 의미했기에 공포가 더 했다. 대개 시신경 경로를 피해서 시술한다고 하나 만의 하나 가능성도 겪는 입장에서는 매우 큰 법이다.

 눈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한의사를 할 수 있을까? 나는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시간’ 적어도 그 안에서 만큼은 항상 한의사를 꿈꾸고 있었다. 그렇게 이루어낸 목표가 하루아침에 사라진다면 난 어떻게 될까.


 여자 주인공 ‘유슬’은 비록 자신의 꿈이기보다는 어머니의 꿈이긴 했지만 어릴 때부터 오직 피아니스트를 위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교통사고로 그만 눈을 잃어버린다. 남자 주인공 차식은 장대높이뛰기 선수이다. 늘 성공해서 어머니를 건물주라 만들어주겠다고 호언장담하며 열심히 훈련하는 효자이지만 척추분리증 판정을 받고 선수생명이 끊어진다. 아직 젊지만, 적어도 살아온 나날만큼은 몸 다 바쳐 이루려했던 목표를 하루아침에 날려버린 그들의 모습은 내가 두려워하던 미래와 맞닿아있었다.


 청춘 성장드라마답게 유슬은 자살시도 같은 극단적인 선택도 하지만 극복해내고 원래 꿈을 향해 다시 나아가고, 차식은 새로운 꿈을 찾아 앞으로 나아간다. 누군가에게는 클리셰대로 진행된, 뻔한 드라마 중 하나일수도 있지만 나에겐 잊고 있던 중요한 걸 떠오르게 했다. 수많은 페이지 터너들이 이번에 함께 했었다는 것을. 좁게는 성공적인 수술 및 치료를 해준 의료진과 24시간 대기하며 간호를 한 가족, 넓게는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불안감을 받아준 주변사람들까지, 많은 사람들이 나의 페이지터너가 되어주었다는 것을.


 생각해본다. 만약 내가 시각에 문제가 생기거나, 운동 영역에 문제가 생겼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차식처럼 새로운 꿈을 찾았을까, 아니면 유슬처럼 원래 꿈을 향해 다시 나아갔을까. 몇 번을 생각해보지만 아무래도 난 한의사를 포기 못할 것 같다.




 《돌아와요 아저씨》


 폭발적인 인기를 끈 경쟁작에 밀려 역대 SBS 수목드라마 중 최저시청률을 기록했지만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명품드라마였다. 현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천국으로 가는 기차에서 뛰어내려 이승으로 잠깐 ‘역송체험’ 하는 두 남자를 그린 작품으로, 일본의 소설가 아사다 지로의 『쓰바키야마 과장의 칠일간』을 원작으로 했다. 과장 좀 보태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온 나에게는 여러모로 공감이 갈 만한 소재.

 극 중에서 역송체험을 떠나는 두 남자, 김영수와 한기탁에게 성녀 마야는 경고한다. 자신의 원래 정체를 밝히면 무시무시한 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그리고 그 벌은 드라마 후반부에 잠깐 보여준다.


 ‘자신의 존재를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세상’


 드라마를 보며 나는 다른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남겨진 이들을 눈물짓도록, 못해 준 것을 후회하고 받은 것에 대해 미안해하도록 만들 거라면 차라리 벌을 받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했다. 실제로 한기탁은 여동생과 그녀의 남편을 위해 정체를 밝히고 존재의 소멸을 택하기도 했고.


 그러나 수술을 앞둔 그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애초에 내 삶의 목표에는 책을 출판하는 것도 있을 정도로, 세상에 내가 존재했었다는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한 나였다. 그랬기에 다가오는 운명 앞에서도 끊임없이 손을 놀렸다. 그래놓고 상황이 좋아지자 사라지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는 나. 나 자신에 살짝 웃음이 났다. 만약에, 아주 만약에 다시 죽음의 위기에 놓인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까? 아무래도 미련을 못 버리고 또다시 무엇이라도 끄적거리는 나를 발견하게 될 것만 같다.




92 일어설 준비Ⅰ 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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