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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남 Dec 22. 2016

[소설] 내려놓음 92 일어설 준비Ⅰ

20대 한의사, 암에 걸리다.



92 일어설 준비Ⅰ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했다. 샴푸 거품을 씻고 내려가는 물에는 갓 자라난 머리카락도 함께 했다. 거울에 아수라 백작이 비친다. 누런 속살을 다시 드러낸 왼 머리는 사라져 가던 병식(病識)을 일깨우는 또 하나의 주홍글씨가 되었다. 짧은 머리는 스타일링이 될 수 있지만 반만 남아버린 머리는 아무리 포장을 해도 이상하다.


 방사선 치료가 시작되면 머리카락이 빠질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으나 한동안 그럴 기미가 없어 또다시 비껴나간 부작용을 만끽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머릿속 깊이 자리한 암덩이를 제거하기 위해 강력한 방사선 총을 쏘아대는 전쟁터에서 성하게 남아날 민초가 몇이나 될까? 오히려 탈모는 그만큼 강력한 수단이 통하고 있다는 징표이기에 다행스러웠다.


 그래도 아쉽기는 했다. 왜 하고많은 곳 중에서 하필 뇌였을까? 만약 다른 부위였다면 방사선으로 생긴 상처로 붓더라도 어지럽거나 미식거리는 일 없고, 또 머리에 쏘지 않기에 머리카락 빠질 일도 없을 텐데. 미세한 변화에 민감할 필요도 없고, 수술을 앞두고 기억력이나 사고력, 시각의 상실에 대해 걱정할 필요도 없는데. 그냥 간단하게 그 부위를 뭉텅 잘라내고 쉽게 끝냈을 지도 모르는데. 뇌라서 유리한 건 오직 통증의 부재(不在) 뿐이다.


 ‘아니다. 덕분에 좋은 의료진 만났잖아.’


 한 번 외출했다가 거하게 데인 이후로 밖에 나가는 일은 가급적 자제했다. 그저 집에서 자전거 돌리며 드라마보고 아버지가 차례 주는 밥을 먹고 학교에서 퇴근한 어머니의 푸념을 듣는 일상. 그래도 그 속에서 나는 바깥과의 소통의 끈을 놓지 않았다.


 하루에 한두 명씩은 꼭 연락했다. 마음이 편해져서인지 지난 시간을 잘 보낸 스스로가 너무 자랑스러워 알리고 싶어서인지 몰라도 병원에서와는 달리 쉽게 메시지를 보내지고 전화도 걸렸다.

 병문안 왔었던 소꿉친구 일리, 마찬가지로 소꿉친구이지만 저 멀리 취직해버려 찾아오지 못한 가연이가 시작이었다. 멀쩡한 내 모습을 으스대며 자랑하고 조만간 모여서 밥 한 끼 같이 할 것을 약속했다.

 ‘둘 다 취직해가지고 시간이나 나겠나...’


 그 다음은 예과 1, 2학년 시절 마냥 어린 애 같던 나를 그나마 사람답게 만들어준 회린이 누나에게 연락했다. 필명 ‘한남’도, 내가 필기나 2차창작물마다 찍어놓은 낙관도 실은 누나를 닮고자한 노력의 결과물일 정도로, 누나가 나에게 끼친 영향력은 지대했다. 그런 엄마 같은 존재에게 위로받고 싶어 전화했더니 누나는 이미 나의 상황을 어느 정도 전해 듣고 있었다. 그동안 있었던 일, 생각한 내용들, 앞으로의 계획을 한 시간 넘도록 떠들어대었다.

 누나가 말했다.


그래, 내가 이렇게 니가 멀쩡하게 있을 줄 알아서 별로 걱정도 안 했다.

나는 나를 못 믿었는데 누나는 나를 믿고 있었다.





93 일어설 준비Ⅱ 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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