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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남 Dec 23. 2016

[소설] 내려놓음 95 일어설 준비Ⅳ

20대 한의사, 암에 걸리다.



95 일어설 준비Ⅳ




 1인칭 주인공 시점을 선택했다. 내 이야기를 나의 시점에서 서술하는, 자전적 소설이 가장 설득력 있다고 보았다. 우선 집에 있는 자전적 소설을 다 모아보았다. 그래봐야 이순원의 『19세』, 김원일의 『마당 깊은 집』,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과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가 전부. 이 중 가장 양이 방대하고 평소 좋아하던 문인인 박완서 선생님 작품을 골랐다.


 예전부터 박완서 선생님을 좋아했다. 수능을 앞두고도 언어영역 지문에 나올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소문을 방패삼아 그 분의 글을 읽었고, 중고서적 모으기에 재미를 붙인 다음부터는 중고서점에 갈 때마다 그 분의 책이 있는지부터 확인했다. 그 덕에 내 방에는 그 분의 책만 해도 30권이 넘었다. 특히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중학생 시절 유행했던 예능프로그램 <느낌표 - 책 책 책. 책을 읽읍시다>에서 추천해서 부모님께서 사주셨는데, 매년 한 두 번씩은 다시 읽느라 책이 다 뜯어져서 다시 사기도 했었다. 위편삼절(韋編三絶)은 아니었지만 위편일절(韋編一絶)은 한 셈. 그 책에 나온 고향산천에 대한 묘사는 너무나 아름다워, 자연과 벗 삼을 수 있는 고향을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갈증을 느끼곤 했다.


 그 갈증은 고령에서 공보의 생활을 하면서 해소되었다. 그러나 고향 같은 곳에서 재미난 생활을 즐기느라 지난 2년 간 독서에 많이 소홀했다. 책을 읽더라도 다이어트나 심리학, 전공서적 같은 실용서적에 치우쳐져 있었다. 간만에 보는 그 분의 책을 설레는 마음으로 폈다. 그러나 그 설렘은 이내 당황, 그리고 경외심으로 바뀌었다. 그 분의 글이 내 삶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음을 발견한 탓이다.


 가끔 나는 늙은 사람이 쓸 법한 어휘나 말투가 나올 때가 있다. ‘어디메쯤, 징건한, 약비나게’ 같은 어휘, ‘~하리라’로 끝맺는 말투. 출처가 어딜까 했더니 바로 『싱아』였다. 그 뿐일까. 지난 날 실연의 아픔을 겪던 시절 끄적거려봤던 산문, 그리고 병원에서 틈틈이 메모해두었던 구절들 모두 『싱아』의 손바닥을 벗어나지 않았다.

 예전부터 이상형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농담반 진담반 삼아 병실에 앉아 따사로운 햇살이 비치는 창문을 통해 바깥을 바라보며 한 숨 짓는 여리여리한 여성을 이야기하곤 했다. 그리고 『싱아』에서 주인공은 이야기한다.


그러나 한편 꽤 철난 후까지도 폐결핵을 동경하고 미화하는 버릇을 못 버린 것은 올케가 그런 유별난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언제고 폐결핵을 앓는 남자와 열렬한 사랑을 해 보고 싶은 게 내가 사춘기에 꿈꾼 사랑의 예감이었다.


 한창 감수성이 피어날 무렵에 읽었던 소설의 영향력은 나의 삶 곳곳에 배어있었다. 그리고 소설의 내용 자체에서도 놀람을 금할 수 없었다. 일제시대, 광복, 한국전쟁 등 험난한 시대상황에 휩쓸려 부유해야 했던 그녀의 심리묘사는 내 마음을 대변했고, 인민군으로 징집되어 생사의 경계를 넘어야 했던 오빠는 내 상태와 흡사했다. 그리고 그런 오빠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시선은 우리 가족들의 그것과 똑같았다. 무섭다.


 ‘사람의 삶이란 다 거기서 거기인 것일까? 아니면 이 소설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똑같은 길을 걸어갈 운명을 지게 된 것이 아닐까?’


 직감했다.


 ‘내가 앞으로 쓸 글은 이 책의 영향력 아래에 있겠구나. 표절이 아닌 오마주로 느껴지도록 열심히 노력해야겠다. 살아계셨다면 어떻게든 찾아뵙고 한 말씀 들었을 텐데.’



 언젠가 읽었던 박완서 선생님의 글에서, 그녀는 땅속을 파고들지 못한 씨는 봄이 와도 싹트지 못하듯 고독의 밑바닥을 치지 않으면 결코 좋은 글을 쓸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내가 고1 때 우리 학교에 강연하러 온 김지하 선생님께서는 글을 잘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는 질문에 ‘사랑’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사랑할 때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생겨나는 간질거림이 바로 시(詩)의 원천이라고.


 사랑과 고독. 상실의 슬픔을 통해 소유의 기쁨을 알고, 소유의 기쁨이 있기에 상실이 슬프듯 사랑과 고독은 결국 하나가 아닐까? 난 아픔을 통해 일상생활을 사랑하게 되었고, 그 일상생활을 잃었을 때 고독을 경험했다. 재료는 충분하다. 만약 나오는 결과물이 엉망이라면 그건 오로지 내 탓이다.




96 일어설 준비Ⅴ 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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