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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남 Dec 23. 2016

[소설] 내려놓음 97 일어설 준비Ⅵ

20대 한의사, 암에 걸리다.

(1부는 99부작입니다. 12.24 완결 예정)


97 일어설 준비Ⅵ




 이렇게 방구석에 처박혀 자전거 돌리고 책 보고 탱자탱자 놀면서 가끔 글 쓰는 생활을 하다 보니 한의사로서의 직업적 능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게 되었다. 그만큼 여유가 생겼다고 보아야 할까? 매일 나에게 소화기를 다스리는 침을 놓고 있었지만 그 정도로는 부족했다. 그래서 공보의 때 하던 처방정리도 다시 진행하고, 각종 서적에 등장하는 양생법(養生法)도 동의보감 목차 순으로 정리한 다음 적합한 것을 골라 실천했다. 그리고 사상의학의 기초를 잘 설명한 『애노희락의 심리학』 책을 요약 정리하는 작업도 했다. 특히 이것은 우리 가족과 나의 평안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작업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후 한동안 짜증, 화, 신경질, 투덜거림은 금기(禁忌)였다. 이제 막 성인이 되어 부모님과 마찰이 많을 수밖에 없는 동생도 조용했다. 뇌종양이라는 거대한 권력 앞에서 온 가족은 숨죽였다. ‘동완이에게 스트레스를 주어서는 안 된다.’ 그 것은 우리 집 헌법 제1조 제1항이었다. 그 때문에 가족들은 하고픈 말이 있어도 차마 꺼내지 못하고 속으로 삼키기 일쑤였고, 그걸 지켜보는 내 마음 또한 편치 않았다.


 그러나 다행히도 시간이 갈수록 종양의 공포정치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도 어머니도 아버지도 그리고 동생도, 병세의 약화를 체감한 것이다. 그동안 억제되었던 온갖 불평들이 조금씩 흘러나왔다. 겉으로 ‘힘난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달고 지냈지만, 실은 흘러내리는 몸을 정신력으로 억지로 동여맨 것처럼 아슬아슬해보이던 어머니도 어느 순간부터 신경질을 내고 있었다. 나는 안심했다. 화(火)를 낼 수 있다는 건 에너지가 있다는 증거이기에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뒤, 억제되었던 짜증이 처음 집안에 울려 퍼진 날, 나는 한 마디 툭 던졌다.


“이래야 우리 집이지!”


 사람들은 자신에게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채우려고 노력하고, 본받은 싶은 인물이 있으면 따라하려고 하고, 사회에서 요구하는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성격을 고친다. 사람들과 두루두루 어울리기 위해서 약간의 가면을 쓰고, 가면을 쓴 채 계속 생활하다보면 가면이 실제 내 모습이 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대부분 이래저래 사상기운(四象氣運)들은 어느 정도씩은 다 가지게 되는 게 일반적이고 전형적으로 체질적인 특성이 드러나는 경우는 굉장히 드물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족은 독특했다. 어머니와 동생은 전형적인 소양인(少陽人)이었고 나와 아버지는 전형적인 태음인(太陰人)이었다. 그렇다보니 체질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의사소통 방식 때문에 상처받고 오해하는 일이 잦았다. 그것을 어떻게 하면 해소할 수 있을까 고민했고, 나는 해결방법으로 『애노희락의 심리학』 정리를 선택했다. 부모님과 동생이 보아도 이해하기 쉽도록 예시를 들어가며 열심히 자료를 만들었다.


 그러는 사이 방사선 치료도 끝을 향해 느린 발걸음을 옮겼다.




98 뒤늦은 봄Ⅰ 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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