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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남 Dec 24. 2016

[소설] 내려놓음 98 뒤늦은 봄Ⅰ

20대 한의사, 암에 걸리다.



98 뒤늦은 봄Ⅰ




 방사선 치료도 막바지에 다다랐으나 생각보다 삶의 질이나 체력은 떨어지지 않은 채 중앙신체검사소 방문이 예약된 5월 9일 월요일을 맞이했다. 저번 방문보다는 그나마 나은 대접을 받으며 MRI를 비롯한 여러 검사를 받았고 그 결과 의병제대 판정을 받았다. 어차피 2달 넘게 일을 하지 못하고 있었고, 단지 귀찮았던 행정 절차를 마무리 지은 것이 불과했지만 그래도 아쉬웠다. 이제 누군가에게 직업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들으면 나는 한의사라고 답해야 할까, 백수라고 해야 할까.


 다음 날, 병무청에서 찍은 MRI 영상을 방사선 종양학과 선생님에게 전달하고 치료를 받았다. 영상을 본 선생님의 표정은 썩 좋아보지는 않았지만 그냥 넘겼다.


 ‘병무청 의사가 조영제 없이 찍어서 종양의 상태를 알 수 없다고 했어. 하얗게 표시된 게 종양의 영향인지, 뇌부종인지 모른다고. 보니까 병무청 MRI가 1T 밖에 안 되는 것 같더라. 불확실한 정보가 들어오니까 선생님도 헷갈려서 그런 표정 지은 거겠지. 불안해하지 말자!’


 종료일은 5월 12일. 이제 딱 2번 남았다. 조금만 참으면 된다.



 치료가 끝나면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추가 방사선 치료는 없고 병용 투여 중이던 Temodal 160mg도 4주간의 휴약기를 갖는다. 그 후 예정된 화학요법을 총 6cycle. 각각 한 cycle의 길이는 4주로, 28일 중 첫 5일간 Temodal을 먹고 그 다음 23일 동안은 다시 휴약한다. 첫 cycle은 320mg을, 그 다음부터 남은 5cycle은 450mg을 먹는다.


 즉 이틀 뒤면 30차례의 방사선 치료가 끝나고 3월 30일부터 계속되었던 44차례의 Temodal 저용량 투여기간도 끝난다. 남은 일정은 6cycle에 걸쳐 이루어지는 30차례의 Temodal 투여. 단순 계산으로 해보면 전체 치료의 70% 이상이 벌써 지나갔다.

  뇌부종도 치료가 끝나면 1주일 이내로 해소될 거라 RO 선생님께서 이야기하셨으니, 이제는 일상 생활하는데 있어 애로사항도 거의 없는 셈이다. 다만 머리카락이 반쪽만 남았을 뿐. 그것도 치료가 끝나고 한 달 정도 기다리면 조금씩 자라날 것이라고 하셨다.


 6~7시간에 불과하던 하루가 이제는 24시간이 될 터, 앞으로 어떻게 시간을 보내면 좋을지 고민했다. 먼저 집근처 성당에 문의하여 교리 교육을 신청했다. 작년에 충동적으로 천주교 통신 교리 신청해놓고는 한 번도 안 들었는데, 중환자실에 찾아온 신부님께는 안수 기도를 청했던 빚이 있었다. 그리고 수술 전 간절히 청한 기도를 들어주신 것에 대한 빚도 있어 응당 그리 하는 것이 옳다고 보았다. 나의 그런 결심을 들은 연주 형은 반가워하며 대부(代父)가 되어주겠다고 했고 성경과 십자고상, 그리고 주교님의 축성을 받은 묵주까지 선물해주었다.



 나는 승부욕이 매우 강한 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주변에서는 아니라고 평가하는 경우가 더 많은데 그건 나의 승부욕이 치사하게 발휘되어 잘 알아차리지 못하는 까닭이다.

 1년차 때는 보건소, 2년차 때는 운수지소에서 같이 근무한 승현이 형은 어떤 일에 도전하거나 경쟁할 때는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라는 마음가짐으로 전력을 다해 덤벼 무언가를 성취해내는 스타일이었다. 그래서 탁구, 배드민턴, 축구도 수준급이었고 골프는 필드에서 싱글을 치고 스키는 스키장 패트롤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반면에 나는 좋게 말해 내 분수를 아는 놈이었고, 오로지 가능성이 있는 것에만 승부욕을 발동시켰다. 조금 해보다 안 되면 ‘내 몸뚱아리가 늘 그렇지 머.’ 하고 포기했고, 포기한 것에 대해서는 지더라도 마음 쓰지 않았다. ‘해도 안 되는 거 괜히 마음 쓰지 말고 그 시간이나 즐기자’ 정도. 그런 식이다 보니 나는 못하는 것은 웬만하면 손대는 일이 없었다.


 나는 영어 공부를 무척 싫어해서 간단한 회화도 잘 안 되는데, 그건 순전히 트라우마 때문이다. 고1 3월 쯤 학교에서 단체로 영어 시험을 치러 간 적이 있었다. 그건 토익이었는데 토익이 무엇인지에 대한 개념도 없던 시절이라 시험 방식 자체가 무척 생소했다. 중학생 시절에 했던 영어듣기 평가와는 달리 질문도 방송으로 나왔고, 머라고 말하는 지 당최 알아들을 수 없었다. 심지어 듣기 방송이 끝났는데도 난 2문제가 남아있었으니, 무엇을 듣고 무슨 문제를 풀었는지 알 수 없는 노릇. 더 심각한 것은 Reading 점수가 Listening 점수보다 더 낮게 나왔고, 그 결과 나의 신발사이즈 300보다 딱 10이 높은 310점이라는 극악무도한 점수를 받아들어야 했다.


 중학생 시절만 하더라도 교과서만 달달 외우면 100점 맞는 데는 큰 지장이 없어 영어를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친구들이 500점 600점 맞는 동안 나는 300점짜리 성적표를 들어야 했고 그 이후로 영어공부를 기피했다. 틀리는 게 싫어서. 그리고 지는 게 싫어서. 그래서 한의사의 꿈조차 이루지 못할 뻔 했다.


 마찬가지로 학창 시절부터 지금까지 할 줄 아는 게임은 오직 레이싱 게임 하나인데 그건 그나마 하루 만에 사람다운 플레이가 가능했고 또 이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면서 배우는 게 당연함에도 난 그 과정을 견디지 못했다. 그 덕분에 한의대에 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공부는 잘했고 게임을 못했으니.




99 뒤늦은 봄Ⅱ 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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