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권하는 책

박완서 『그 여자네 집』-《참을 수 없는 비밀》

by 한남


《참을 수 없는 비밀》


첫 잔의 소주가 혀에 닿고 목구멍을 넘어 식도를 거쳐 위에 이르는 곧은 길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 무색 투명한 액체는 목구멍을 넘자마자 따듯한 장밋빛으로 변하면서 곳곳에 길은 낸다. 그 느낌이 하도 자릿하고 황홀해 하영은 부르르 진저리를 친다. 둘째 잔에서 화끈한 줄기는 가지를 뻗는다. 석 잔째에서 가장귀는 더욱 섬세하게 갈라진다. 하영은 자신 안에서 물이 오른 아름다운 나무처럼 우뚝 선 피돌기를 그대로 그리라면 그릴 수도 있을 것처럼 모세혈관까지 선명하게 느낀다.


(박완서 -『그 여자네 집』, 103p)



인어공주는 왕자님과의 인연을 위해 마녀에게 찾아가 자신의 다리와 목소리를 맞바꾼다. 그렇게 자신의 정체성과 친구, 그리고 가족까지 버리고 왕자와의 사랑을 꿈꾸지만 결국 실패하고 물거품이 되어 사라진다.


가지고자 하는 바가 있으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처럼 적나라하게 가르쳐주는 동화가 또 있을까 싶다.

인어공주의 결말도 절대 선택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됨을, 갖고자하는 것이 클수록 잃는 것도 큼을 마음 깊이 새겨지도록 일부러 새드 엔딩으로 만든 것이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의 희망을 꺾지 않기 위해 해피엔딩으로 각색한 디즈니의 《인어공주》는 내 스타일이 아니다.


이처럼 아이들에게도 가르쳐주는, ‘1을 얻으려면 1을 버려야 한다.’ 의 등가교환의 법칙. 나도 내 목숨을 구하기 위해 무언가를 내 놓아야 했다. 많은 걸 각오한 나에게 마녀는 술을 마실 자유를 빼앗아갔다. 그다지 술을 먼저 찾지 않는 나에게 말이다. 술자리가 있으면 거부하거나 빼는 일 없이 마다하지 않고 참석하지만 앞장서서 술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나였는데.

내 목숨 값이 고작 그 정도였나 보다.


처음에는 별로 불편함을 못 느꼈다. 애초에 집 밖에 나가야 술을 마시든 말든 하지, 가족끼리 술 마실 일이 머 있다고.

그러나 점점 외출이 잦아지고 새로운 누군가를, 오랜만에 만나는 누군가를 보기 시작하자 비로소 잃은 것이 꽤 컸음을 깨달았다. 동호회에 나가서도, 간만에 고등학교 친구 볼 때도, 소개팅 나갈 때도 왠지 모르게 쫄리고 속상하다.

술 못 마시는 이유를 일일이 설명하기도 싫고, 술만큼 사람 사이에 윤활제가 되어주는 것이 없는데 그게 없으니 나만 삐걱되는 것 같다. 그 일들이 자꾸 반복되니 사람 만나러 나가는 것도 꽤 고민된다. 점점 술의 존재감이 커져가니 평생 해본 적 없는 ‘혼술’이라는 것도 해보고 싶을 지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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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글을 보았다. 그것도 자기 전, 침대에 엎드려 있을 때.

방문을 열고 살금살금 나와, 골프연습장 갔다 돌아오는 길에 2+1 행사로 샀던 탄산수 3병을 냉장고에서 꺼내왔다. 그리고 저 글을 떠올리며 한 모금 한 모금 마셨다. 별 수 있나 흉내라도 내야지. 비슷한 느낌 난다. 비슷해서 더 짜증나고, 짜증나서 더 술맛 나는 상상 음주.

3병을 모조리 비우고 알근하게 취기를 느끼며 그대로 잠들었다.


그리고 느지막히 일어나 이렇게 낙서를 휘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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