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그 여자네 집』-《길고 재미없는 영화가 끝나갈 때》
('전동 휠체어를 보며' 수정본입니다.)
난 방귀를 참을 수 있을 때까지만 살았으면 싶다우.
처음으로 그 화제에 끼어든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노인네들이 다들 박장대소를 했다. ……
그러나 나는 느닷없이 끼어든 그 말이 마치 순조로운 차의 흐름 속에서 급브레이크를 밟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가슴이 철렁하면서 진저리가 쳐졌다. 우습기는커녕 여지껏의 즐거운 기분이 일시에 깨어나는 듯했다. 어머니는 사람들이나 웃기자고 그런 말을 할 분이 아니다. 깔끔하다 못해 결연하기까지 한 어머니의 표정이 아니더라도 나는 그걸 알 수 있었다. 늙어갈수록 생리현상을 참는 기능이 헐거워지는 건 사실이나 어머니가 못 참아낼까봐 두려워하는 건 단지 그뿐이 아닐 것이다. 사람의 체면 유지를 위태롭게 하는 온갖 것들이 포함된 것처럼 느껴지는 건 어머니를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믿는 딸의 감상 이상의 것. 연민이었다.
(박완서 -『그 여자네 집』, 133p)
늘 그렇듯 하루의 유일한 일정인 골프 연습을 위해 집을 나선 참이었다. 횡단보도 앞에서 녹색 신호를 기다리는 나의 앞쪽으로 ‘이이잉’ 소리를 내는 전동 휠체어 한 대가 다가왔다. 편히 지나갈 수 있도록 길을 비켜드렸다. 94년 이후 최악의 폭염이 휘몰아치던 더운 여름날, 바람 한 점 없이 따갑게 내리쬐는 햇볕을 오로지 머리에 감싼 손수건 하나로 퉁치고 나를 스쳐지나가는 할머니.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모자를 살며시 들고 땀을 훔쳤다.
방사선 치료가 끝나고 한 달 쯤 지나면 머리카락이 나기 시작할 거라던 선생님의 말씀과는 달리 아직 내 왼 머리는 희뿌연 살갗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래서 밖에 나갈 때는 항상 모자를 썼다. 그러면 모자 안에 오갈 데 없이 갇힌 열기에 머리는 울기 시작하고, 물방울이 맺힐 잎사귀가 없기에 줄줄 흘러내리기 일쑤였다. 수시로 닦아주어야 했다.
공보의 1년차 때 근무한 보건소는 읍내에 있었다. 몇 대 없어 불편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버스가 다니기는 해서 환자들은 그것을 많이 타고 보건소를 찾았다. 그러나 2년차 때 있었던 지소는 버스가 거의 다니지 않아 몇 십분 걸어서 오시거나 아들이나 딸이 차로 모셔다 드리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개중에는 직접 트럭을 몰고 오시는 할아버지도 있었지만 나의 눈에 가장 신기하게 보였던 분은 어디서 구하셨는지 골프장 카트를 몰고 오시는 노부부였다.
속도도 꽤 빠르고 천으로 된 천장은 햇빛과 바람을 적절히 가려주어 누구의 기지인지 몰라도 참 잘 생각했다 싶었다. 4인승이라 뒷자리에 동네 할머니를 달고 오는 경우도 잦았다. 아내를 진료실에 보내 놓고 밖에서 담배 하나를 태우며 뒷짐 지고 서 있는 할아버지의 모습에는 기품이 흘렀다.
수술을 앞두었던 그때 나는 생각했다. 저렇게 바퀴의 도움이 필요한, 어쩌면 바퀴 없이는 움직일 수 없는 거대한 짐으로서의 삶을. 나의 육중한 몸뚱이를 원망했다. 평소에도 원망하기는 했지만 그때만큼 원망해본 적은 그 전에도 그 후로도 없었다. 나를 보살펴야 할 주변사람들의 고생이 눈에 훤했기 때문이다.
5년 전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할아버지의 생신이었던 음력 칠월 초하룻날, 같이 화투도 재미있게 치고 할아버지께서 그해 여름에 거창 개울가에 놀러갔었던 이야기도 들었는데 중간고사 기간에 돌아가셨으니 모든 일이 2달도 채 안 되어서 일어난 셈이다. 병원에서는 그 당시 우리들에게 치매라고 이야기 했지만, 나중에 공부를 해보니 섬망(譫妄)이 아니었나 싶다.
섬망(譫妄, delirium)
열병, 전신감염, 대사장애 등으로 인해 오는 급성 뇌증후군
<특징>
밤에 더 심함
기복이 심함 (정신이 나는 듯한 순간과 의식이 희미해지는 순간이 교대로 엇갈리기도 함)
지남력의 상실, 환각, 감정 장애 (주로 공포) 등의 증상을 보임
낮에 몽롱하게 신음소리만 내며 누워 계시던 할아버지는 밤이 되면 응축시켜둔 에너지를 내뿜으셨다. 가족들이 할아버지에게 무언가 심상치 않은 변화가 있음을 알게 된 것도 멀쩡하시던 분이 갑자기 오밤중에 길거리를 배회하시다 허리를 크게 다쳐 병원에 입원하면서였다.
아픈 할아버지를 위해 지근거리에 있는 우리 식구와 이모네 식구가 간호했는데 주로 낮에는 이모가, 밤에는 아버지가 곁을 지켰다. 그분의 사랑을 듬뿍 받으셨기에 더 마음이 애달팠던 어머니도 퇴근만 하면 병원으로 달려가셨다. 어머니는 할아버지와 얼마 밖에 같이 할 수 없음에 늘 슬퍼했지만 그렇다고 출근을 안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동생과 나는 아직 학생이었으니까.
그 상황에서 병원에서는 할아버지를 커버하기 힘들다며 요양병원으로의 전원을 요구했고 원거리에 있어 간호에 일조하지 못했던 외삼촌은 그러기를 원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린 아버지는 극렬하게 반대했고, 결국 가시는 날까지 그분의 곁에는 항상 가족들이 함께 했다.
그 당시 학생이던 나는 병간호 업무에 있어 한 발 빠져있던 못된 손자였는데 딱 한 번 아버지의 대타로 사촌 형과 함께 할아버지를 간호한 적이 있었다. 오후까지만 해도 자리에 가만히 누워 끙끙 앓는 소리만 내시던 할아버지는 병실의 불이 꺼지는 밤이 되자 누가 불쌍하다고 나눠주기라도 한 걸까 갑자기 생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소싯적 시절로 돌아가 주주 총회를 몇 번이나 열었고, 최 이사와 무슨 악연이 있었는지 십여 분을 다투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그 와중에도 가슴을 계속 치셨다. 정신을 잠시 잃으셨을 때 다친 허리로 인해 TLSO를 착용하고 계셨는데 그게 무척 답답하신 모양이었다. 자신의 몸통을 강하게 압박하는 갑옷을 제거하려 용쓰는 할아버지의 에너지는 가히 폭발적이어서, 곧 있으면 TLSO를 부서져 당신이 원하는 해방감을 맛보게 되지 않을까 생각하게 만들었다.
할아버지는 옛날 분 치고는 키가 굉장히 크셨다. 170cm 정도. 병원에 입원하신 이후로 도통 음식을 드시는 것을 거부하셔서 모두가 달라붙어 죽을 입 안에 흘려 넣어야 했고, 식사 시중 하나는 이모가 끝내줬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는 점점 말라가 주위 사람을 안타깝게 하고 있었다. 그래서 할아버지를 말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겠다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할아버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는 건장한 20대 남자 두 명이 감당하기에도 버거웠다. 시방 할아버지가 맹렬히 태우고 있는 것은 당신의 몸이 아닌 영혼인 것만 같아 어떻게든 그분을 진정시키고 싶었더랬다.
사촌 형은 할아버지를 “할배~”라 정답게 부르며 조금씩 진정시켜나갔다. 능숙하게 사투리를 써가며 그분을 어르는 형을 보니 어린 마음에 질투가 나 형 따라서 할아버지를 연신 불렀지만 내 입에서는 “할아버지...”가 나올 뿐이었다. 왜 어머니는 사투리를 쓰는 것을 싫어해서 할아버지를 정답게 부를 수 없게 만들었는지 심통이 다 났었다. 나도 형처럼 격식 없이 할배 할매 부르고 싶다고 수없이 생각했다. 공보의 시절에는 일부러 사투리를 쓰며 진료하려고 노력했었는데, 그날의 기억이 아직 가슴 깊이 남은 까닭이다.
그렇게 사촌 형이 어르고 달래고 하다 보니 날이 밝았고, 다가온 햇빛에 할아버지께 달라붙은 악령이 도망이라도 간 것처럼 이내 잠드셨다. 형이 다 하고 살짝 거들기만 했을 뿐인데도 꽤 힘든 밤이라 당장 집에 가서 눕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아니다, 이 힘든 시간을 혼자서 감당하고 있었던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도 함께 했다. 병문안 갈 때면, 옆방의 환자나 보호자들이 아버지를 많이 칭찬했다. 할아버지를 휠체어에 태우고 자주 산책 나가고 극진히 잘 보살핀다고 말이다. 그냥 그렇구나하고 넘어갔었는데 막상 경험해보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이 힘든 일을 자처하고 나셨던 아버지가 정말 위대해보였다.
아픈 사위를 위해 야채수를 손수 끓였던 외할아버지와, 장인의 똥오줌 수발까지 마다하지 않고 나섰던 아버지. 지금까지 어느 누구의 이야기이든 지어낸 이야기이든 간에 이처럼 아름다운 장서 관계는 둘은 적도 본 적도 없다고 말한다면 그건 과장일까?
얼마 뒤 할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자식 고생시키고 싶지 않다던 할아버지의 평소 소망대로. 워낙 삽시간에 지나가버려 남은 이에게 아쉬움이 많이 남았지만 적어도 그날만큼은, 아버지의 존경스러운 면모를 볼 수도 있어 좋은 느낌으로 남아있는 기억이었다. 그렇지만 이제 그 기억이 족쇄가 되어 돌아온다.
‘할아버지보다 10cm는 더 크고 몸무게는 2배인데 누가 나를 억제할 수 있을까?’
저번에 이모는 아기를 대신 돌보아주다가 손목이 나가기도 했다. 10kg 내외의 아가의 꼼지락거림에도 사람이 다치는데 하물며 20대의 건장한 남성이 그런다면 주변 사람 몸이 남아날까.
침 맞으러 오는 할머니들이 자식 고생시키기 싫다며 멀쩡히 잘 지내다가 때 되면 자다가 끝을 맞이하고 싶다고 이야기하던 것이 이거였구나, 절실히 공감했다. 아니 어쩌면 치매 따위에 대한 공포는 내가 그들보다 더 했으리라. 그래서 빌고 또 빌었다. 병신으로 만들 거면 그냥 죽여 달라고.
그랬다. 난 나의 목숨보다도 나의 체면(體面), 내 몸[體]과 얼굴[面]으로 표현된 나의 영혼이 더 소중했다. 본능만 남은 짐승으로 남아 주변사람들을 괴롭히며 나의 영혼과 나에 대한 기억을 더럽혀 나간다는 미래는 죽음보다도 더 싫은 결말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기억을 반추하며 남 이야기하듯 글을 쓰고 있다. 나의 영혼은 원하던 모습 그대로 보존되었다. 그래서 지금 나는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