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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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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남 Dec 03. 2016

[단편소설] 어느 날, 아침 #1

이별한 남자들의 찌질한 순간

#1




 ‘아, 집에 가야하는데 귀찮네.’

 희성은 출근할 필요가 없는 토요일인데도 지금 일어나야만 하는 오늘이 영 아쉽다. 가족끼리 가까운 곳에 나들이 가기로 해서 오전 중으로 집에 가봐야 한다. 평소였으면 어제 퇴근할 때 자취방이 아닌 집으로 바로 갔을 텐데 동료 공보의들과 스크린 골프를 치고 뒤풀이를 하느라 못 갔다. 술을 진탕 마셨더니 중간부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내 방에서 마시길 잘했어.’

 치대를 졸업하자마자 공보의가 된 희성이 공보의로 배치된 지역에는 공사 문제로 관사 하나가 모자랐다. 2년 전에 지어졌음에도 부실공사를 한 탓인지 관사 한쪽 벽이 일부 무너지는 바람에 공사 중이었다. 그래서 신임공보의 6명이서 가위바위보를 했고, 꼴지를 한 희성은 관사 대신에 월세의 일부를 지원받게 되었고, 고민하다 자취방을 서부정류장 근처로 잡았다. 그리고 이내 그곳은 주변 공보의들의 아지트로 변했다. 제각기 관사가 하나씩 있었지만 지소 2층이라 여사님 눈치도 좀 보이고, 근처에 논밭 밖에 없는 시골이어서 놀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게다가 희성의 방 주변에는 술집을 비롯해 놀 것도 많으면서 교통도 괜찮아 어느 모로 보나 사람들이 모이기에는 최적지였다.


 다들 언제 갔는지 술자리가 그럭저럭 정리되어 있다. 베개가 두어 개 있는 걸 보면 몇 명은 자고 간 듯하다.



 ‘몇 시지?’

 8시 반이다. 슬슬 준비하면 10시, 늦어도 11시 안에는 집에 도착할 수 있다. 늦지는 않겠다. 희성은 침대에 일어나 앉았다가 다시 눕는다.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전기장판을 떠나기가 싫고 두려운 탓이다. 이불 밖에 도사리고 있는 찬 공기가 썩 반갑지가 않다. 갑작스레 맞이할 차가운 공기에 이내 잠이 깨겠지만, 샤워하다 따뜻한 물 맞는 기분이 좋아 계속 서 있게 되는 것처럼 나오기가 싫다. 그렇게 10분을 넘게 미적대다가 얼어붙어 있을 자신의 차를 떠올리며 결국 자리를 정리한다.



 ‘차 좀 녹이고 그러려면 시간 좀 걸린다. 일찍 준비해야 해. 오늘도 시동 잘 안 걸리면 어떡하지.’

 20만 km 넘게 달려 수명의 끝을 향해가는 희성의 차는 겨울만 되면 말썽이었다. 며칠 전에는 작년에 배터리를 바꾸었음에도 불구하고 시동이 걸리지 않아 차를 놔두고 버스를 타고 출근해야 했다. 시외버스터미널까지 마중 나온 강우 형이 아니었으면 대책이 없었다. 빨리 공보의 생활을 끝내면 새 차를 사리라. 자리에 일어나서 밤사이 건조해져버린 목을 축이기 위해 냉장고를 열어 찬 물을 찾는다.



 냉장고 안에는 스파게티 소스, 신기해서 몇 개 사서 먹었더니 극악무도한 이국적인 맛에 놀라 장식용으로만 쓰고 있는 각종 동남아 주스, 종류별로 모아둔 수입 맥주, 너무 한꺼번에 많이 만들어서 두고두고 먹고 있는 루이보스 티, 알로에 주스까지 온갖 것들이 들어있다. 오직 찬 물만 없다. 다 마셔놓고 새로 사온다 사온다 생각만 하고는 또 깜빡한 것이다. 처음 자취를 시작할 때는 빨래, 설거지, 청소, 요리까지 무엇이든지 열심히 했는데 가면 갈수록 대충하게 된다.



 ‘칫솔이 여기 왜 있어.’

 냉장고에 어울리지 않는 칫솔을 밖으로 꺼내고, 알로에 주스를 페트병 째로 들고 마신다. 찬 기운이 식도를 따라 퍼진다. 분명 물을 삼켰는데 가슴이 쩌릿쩌릿하도록 시원한 것이 방금 들이마신 것이 마치 찬 공기가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머리까지 맑아지는 기분이 든다. 아직 다 마시지 않은 알로에 주스 뚜껑을 닫고 다시 냉장고에 집어넣는다. 더럽지만 머 어떠랴 나 혼자 사는 집, 누가 머라 할 사람도 없는 나만의 왕국이다.



 속옷을 챙기고 보일러를 목욕상태로 바꾼 뒤 면도를 했다. 머리를 감으려 하는데 아무리 샴푸통을 펌프질해도 피식피식 소리만 들릴 뿐이다.

 ‘아, 맞다. 물 말고 샴푸도 사야했었는데.’


 통에 물을 부어서 남은 내용물까지 탈탈 털어 써놓고는 또 까먹은 무심함을 탓하며 희성은 여행용 샤워세트에서 샴푸를 꺼냈다. 그러는 사이 벌써 화장실 바닥은 첨벙 첨벙이다. 며칠 전부터 수챗구멍에 물이 잘 빠지지 않고 있다. 전에는 그럴 때마다 열심히 머리카락을 제거하고 가끔씩은 구멍에 손을 집어넣고 헤집어 물이 잘 빠지도록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좀 귀찮다. 어차피 주말 지나고 돌아오면 다 빠져있으리라.


 샤워를 하고 속옷을 입는데 고기냄새가 배여 있다. 어제 뒤풀이의 후유증이다. 스크린 골프 한 판 치고, 근처 오뎅탕집에서 소주 몇 잔 걸친 다음 돌아오는 길에 고기 몇 근을 샀었다. 전시용으로 있던 후추와 파슬리도 꺼내 데코까지 하며 허세 좀 부렸었는데 그 이후로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화장실에 있다가 나오니 그 전에는 못 느꼈던 고기냄새가 강렬하게 느껴진다. 아까 속옷 입을 때 예감은 했다만 좀 심하다. 얼른 후드를 켜고 창문을 열고 모든 옷에 탈취제를 뿌렸다.

 ‘오늘은 창문 열고 나가야겠네.’

 월요일 퇴근하고 자취방에 왔을 때의 냉골바닥이 걱정된다. 



 책상 가장자리로 옮겨둔 컴퓨터를 켜서 《미안하다 사랑한다》를 태블릿으로 옮기도록 해놓고 간단하게 청소를 시작했다. 설거지도 하고, 바닥에 널브러진 『보통의 존재』는 책장에 꽂고, 내가 쓴 칼럼이 실린 조그마한 지역신문도 살짝 구겨진 것을 판판히 펴서 파일에 끼워두었다. 하얗게 먼지가 내려앉은 맥주제조 키트와 와인잔 걸이도 닦고, 청소하다 발견한 핫팩도 하나 뜯어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오늘 입을 코트는 디자인이 깔끔하니 좋았지만 대신 얇아서 좀 추웠다. 그리고 지금 운전대를 잡으면 얼음장 같을 것이 분명하다. 핫팩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대충 마무리하고, 컴퓨터도 끄고, 가스밸브도 확인한 뒤 밖으로 나왔다.



 운동화를 신고 계단을 내려가는데 문자가 왔다. 블랙 프라이데이 때 주문한 구두와 캐주얼화, 벨트가 국내로 들어왔다는 내용이다. 꽤 시일이 지난 탓에 그만 잊고 있었다. 싼 맛에 머 하나만 걸려라 식으로 5개나 주문했다. 이중에 2개만 성공해도 본전치기. 얼른 배송이 되었으면 좋겠다.



#2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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