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어느 날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남 Dec 03. 2016

[단편소설] 어느 날, 아침 #2

이별한 남자들의 찌질한 순간

#2



아, 좀 걸리겠네.

 성에가 잔뜩 낀 앞 유리를 보니 한숨이 절로 난다. 차 문을 열고 앉으니 차갑다. 어째 바깥보다 더 찬 기운이 엉덩이를 통해 올라온다. 떨리는 마음으로 키 박스에 차 키를 집어넣고 돌린다. 용쓰는 소리가 들리지만 좀처럼 걸리지 않는다. 3번 만에 겨우 성공. 식겁했다.


 히터를 얼른 틀고 기다린다. 내부가 따뜻해질 때. 성에가 녹으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히터에서 뿜어져 나오는 바람에 내려앉은 먼지가 흩날린다.


 ‘내부 세차한지 얼마나 되었나?’


 손등이 간지럽다. 히터바람에 흩날린 먼지 안에 섞인 머리카락이 손등에 내려앉은 것이다. 머리카락을 집어 들었다.



 길다.

 많이 길다.

 내 것일 리가 없다.



 그녀의 머리 길이를 떠올려본다. 잘 기억나지 않는다. 벌써 희미해진 모양이다. 사진 찍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었던 그녀와 그다지 즐기지 않는 나였기에 가끔 그리울 때마다 쳐다 볼 수 있는 사진이 없었던 탓일까? 실은 사진 몇 장이 있기는 했다. 문제는 그녀가 사진 빨이 정말 안 받았다는 것. 어렴풋이 남은 내 기억속의 그녀가 못 생긴 사진 속 그녀로 덮어질까 두려워 일부러 보지 않았다.


 머리를 쓰담쓰담 해주는 것을 좋아했던 그녀. 그러나 이제 나의 손에는 그녀의 사랑스러운 머리가 아닌, 먼지와 함께 흩날린 머리카락뿐이다.




 그녀를 처음 만난 건 기차 안이었다. 3일 휴가를 내고 주말에 붙여 4박 5일로 내일로 여행을 하고 있었다. 한 번 차를 몰기 시작하면 지하철이고 버스고 기차고 전부 타기 귀찮아진다는 주변 사람들의 말을 듣고 마지막으로 도전한 기차여행이었다. 첫 날 순천만 정원에서 보았던 그녀는 여수에서도, 보성에서도 마주쳤다. 큰 눈에 뽀얀 피부의 그녀는 멀리서 보아도 주변과 확연히 구분되어 찾기 쉬웠다. 그리고 광주에서 담양 가는 버스에서도 그녀를 볼 수 있었다.


 잘 모르는 사람이 듣기에는 운명처럼 보이겠지만, 대개 가고 싶은 곳은 정해져있고 그에 따라 한정된 기차노선과 시간을 맞추다 보면 결국 비슷한 경로와 차편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굉장히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그래서 그러려니 생각하던 나와는 달리 첫 여행 중이던 그녀는 그게 신기했나보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노래를 흥얼거리는 내 앞에 어느새 동그란 큰 눈이 있었다.


혹시 순천만이랑 순천만 정원 가보시지 않았어요?
네, 맞아요.
여수랑 보성도 갔죠?
네, 그쪽도 가시지 않으셨어요? 언뜻 언뜻 본 것 같은데?
맞아요. 맞아. 완전 신기하네요.
그쪽도 죽녹원이랑 메타쉐콰이어길 가는 거예요?
그쪽이 아니고 저 윤서예요. 거기도 가고 메타프로방스도 가요.
아, 저는 희성이에요. 경로가 같네요.
이 다음에는 어디가요?
저는 전주 갔다가 집에 가려구요. 윤서 씨는요?
아직 고민 중이에요.


 고민 중이라던 그녀와 함께 담양을 한 바퀴 돌고 광주로 돌아와 저녁 식사를 같이 했다. 그녀의 집은 대구였다. 집에서 차로 30분은 족히 걸리는 먼 거리긴 했지만 같은 지역에 산다는 동질감은 금방 마음의 벽을 허물게 했다. 나보다 한 살 어린 초등학교 선생님인 그녀는 방학을 맞이하여 여행을 왔다고 했다. 직업이 무어냐는 그녀의 질문에 치과 의사라 대답했고,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이 늘 하는 질문을 그녀도 했다.


가끔 왼쪽 아랫니가 욱신욱신 아파요. 왜 그런 걸까요?
한 번 볼까?
밥 먹었는데 어떻게 그래요. 안 돼. 나중에.


 ‘나중에.’ 나중에도 그녀의 입 안을 내 눈으로 본 적은 없었지만, 만남에는 나중이 있었다. 한 번 갈아타야 해서 불편한 전주에도 같이 갔고, 대구로 돌아오는 시외버스에서는 손을 잡고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이었다.


 여행이 가져다준 떨림을 설렘으로 착각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시작부터 순탄하지 못한 연애였다. 짧은 글로는 표현하기 힘든 우여곡절 속에서, 내꺼인 듯 내꺼 아닌 내꺼 같다는 ‘썸’과 실제로 내꺼라 단언 할 수 있는 ‘연애’ 그 사이 어디쯤에서 우리는 출발해야 했다. 그러나 이미 달려버린 기차가 방향을 바꿀 수 없듯, 관계는 점점 더 깊어져 갔고 꽤 오랜 시간을 함께 했다. 그리고 그 동안 쌓아올린 추억은 뿜어져 나온 화산재가 온 세상을 뒤덮듯 아직도 나의 일상에 묻어있다. 바람이 불면 저절로 흩어지겠거니 하며 일부러 닦아내지 않는다. 창틀의 먼지도 겉에서 슬쩍 보면 눈에 띄지 않지만. 닦고 나면 걸레를 검게 만들어 먼지의 존재를 느끼게 하지 않는가. 추억도 그럴 것이다. 지우려고 애쓰다보면 눈에 더 보이는 법이다. 그냥 시간이라는 바람에 흘려버리리라.



 사실 아침에 눈 뜨고 지금까지 마주쳤던 모든 것들, 그리고 그것들을 대하는 나의 생각. 아직은 그녀가 함께 했다.



#3에 계속

매거진의 이전글 [단편소설] 어느 날, 아침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