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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남 Dec 03. 2016

[단편소설] 어느 날, 아침 #3

이별한 남자들의 찌질한 순간

#3



 그녀는 집은 대구였지만 학교는 창녕에 있어 자취를 하고 있었다. 친한 형은 이상형을 ‘잘 취하는 여자 자취하는 여자’이라 종종 이야기했는데 그녀는 잘 취하지 않았지만 자취하는 여성이 갖는 연애의 자유로움을 한껏 느끼게 해준 사람이었다. 부모님의 눈치를 덜 보아도 되니 그녀는 자주 내 자취방에 자주 놀러오곤 했다. 반대의 상황은 꺼려해서 그녀의 집에 가본 적은 없었지만, 아무래도 초등학교 여선생님의 관사에 남자가 들락날락하는 모습은 입초시에 오르내리기 쉬운 법이니 별 불만은 없었다.


 그녀는 전기장판을 깔아서 따뜻해진 침대를 무척 좋아했다. 자기 학교 관사에는 불난다고 전기장판을 못 쓰게 해서 무척 아쉽다고 조잘대곤 했다. 그렇게 같이 잠들었던 그 침대. 거기서 나는 이제 혼자 잠들고 일어난다. 많이 왔다한들 혼자 쓴 날이 더 많건만 마치 늘 내 옆에 있다가 사라진 것처럼 허전하다.



 9시까지 출근하면 되었던 나와는 달리 그녀는 8시 전까지 출근해야 했고 아직은 임용 초년차라 눈치가 많이 보이는 막내였다. 차가 아직 없어 시외버스를 이용해야하는 그녀였기에, 내 방에서 아침을 맞이하는 날은 6시 반에는 일어나 준비를 시작해야 했다. 여자이기에 준비할 것이 많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것도 늦은 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미녀는 잠꾸러기라는 고리타분한 옛 이야기가 절로 나올 만큼 잠이 많았다. 주말에 연락을 하면 안 받을 때가 좀 있었는데 그건 자고 있는 거였다. 3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2시 반이 돼서야 일어나 약속 장소를 대구에서 창녕 시내로 옮긴 적이 있을 정도. 그러다보니 아침만 되면 맥을 못 추기 일쑤였다. 따뜻한 전기장판이라는 안식처에서 차가운 공기가 도사리는 현실로 나서는 게 싫었던 것도 한몫했으리라. 그래서 초반에는 그녀가 아침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는 모습을 누워 지켜보고는 배웅 정도만 하고 다시 잠들었지만, 잠투정부리는 모습이 점점 마음에 걸려 같이 일어나 준비를 도왔고 직접 차로 학교까지 데려다 준 적도 많았다. 차안에서 졸린 눈으로 화장을 하는 모습이 보면 안쓰러운 것이, 결혼하면 집안일만 할 수 있도록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는 생각까지 했었다. 잠시 망상이 폭주한 것이다. 헤어진 지금, 그 때를 되돌아보면 참으로 웃기기 그지없는 장면이다.



 ‘내부 세차 좀 하긴 해야겠다.’


 서서히 녹아가는 성에를 바라보며 희성은 생각한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금요일에는 항상 방청소와 세차를 했다. 혹여나 그녀의 흔적이 부모님의 눈에 띌까봐 걱정돼서였다. 예전 술자리에서 강우 형이 자기 큰아버지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었다.



우리 큰 아빠가 좀 재미있으신 분이거든. 어떤 정도냐면 내 사촌동생이 서울에서 자취를 하는데 방에 가니까 다 청소가 되어 있는 거야. ‘음? 머지?’ 하면서 방을 살펴보니까 냉장고에는 엄마 반찬이 있길래, ‘아~ 엄마 왔다갔나?’ 하고는 탁자를 딱 보는데 흰 종이 하나가 있는 거야. 근데 그게 머였는지 아나?
머였어요?
그게 진짜 웃긴 게, 길이 순서대로 긴 여자 머리카락들 다 모아가지고 나란히 배열해놓고 그 옆에다가 메모를 딱 남겨놓은 거지



지우야. 머리카락 색깔이 두 개구나.
혹시나 싶어서 말하는 거지만 한 사람에 집중하도록 해.
두 여자에게 눈물 나게 하면 니 눈에는 피눈물 나.
서랍에 콘돔이 없더라.
아빠가 좋은 걸로 10개 사다두었다.
잘 쓰렴.



 그 말은 무심히 지내던 나에게 충격으로 다가왔고 그 이후로 집에 가는 주말이 되면 꼭 집과 차를 열심히 청소했었다. 하지만 요즘은...



 아침에 타오르는 갈증을 해결하려 열었던 냉장고. 그 안에 든 잡동사니들. 모두 그녀의 흔적이다.

 살면서 누군가에게 줄 목적으로 요리라 할 만한 것을 해본 적이 없던 나였다. 그런 내가 처음으로 도전한 것은 그녀를 위한 ‘까르보나라’. 집에서 몇 번 연습했지만 그래도 못 미더워 보험용으로 스파게티 소스 완제품을 몇 개 사두었는데 다행히 성공적으로 파스타를 완성시켰고 그 소스를 쓸 일이 없었다. 그것들이 아직까지 냉장고에 잠들어있다.



 극악무도한 맛에 전시만 해놓고 있는 동남아쪽 주스들. 내 자취방에 놀러올 그녀에게 독특한 경험을 시켜주고 싶어 보건소 근처 마트에서 2개씩 사놓았던 것들인데, 같이 한 캔씩 먹어보고 영 입맛에 맞지 않아 그대로 봉인해버렸다.


 정말 코코넛만 넣은 것이 아닐까 싶게 느끼한 맹물 느낌의 음료. 새콤달콤할 것을 기대했으나 밍밍한 신 맛만 자랑하는 라임주스. 기대했던 만큼 파괴력은 없었던 바닐라 맛 음료. 레몬티 정도로 생각했지만 정말 레몬만 잔뜩 짜 넣은 것 같은 레몬주스. 한 캔 한 캔 마다, 그 음료수를 따면서 같이 공유했던 기대와 시간들이 담긴 채 그대로 냉장고를 채우고 있다. 먹기에는 맛이 없고 버리기에는 아까운 것들. 디자인은 꽤 좋아 데코용으로 아직 내버려 두고 있다.



 그리고 수입 맥주. 누가 초등학교 선생님 아니랄까봐 초딩 입맛이던 그녀는 맥주조차 달달한 수입 맥주를 선호했다. 머드쉐이크 초코, KGB 레몬 등등. 얼마 전 동네 마트에서 국군의 날을 맞이하여 군인 및 예비군에 한정해서 수입 맥주 6개를 만 원에 하는 행사를 했는데, 그때 그녀는 신나게 카트에 맥주를 쏟아 넣었다. 그게 아직도 남아있다. 난 드라이한 맛이 좋다.



 많이 만들어버린 루이보스 티. 남자 혼자 사는 방 특유의 냄새가 혹시 날까 싶어서 커피포트에 홍차를 자주 끓였다. 그래놓고 홍차는 또 썩 즐기는 편이 아니라서 페트병에 담아 냉장고에 넣어두었다가 물처럼 마셨었다. 그런 나와는 달리 그녀는 따뜻한 루이보스 티를 무척 좋아했고 올 때마다 끓여 마셨다. 지금 냉장고를 차지하고 있는 홍차도 그녀가 끓인 것이다. 버릴까 종종 생각하다가도 냉장고 문을 닫는 순간 까먹어버리는 예의 그 무심함에 아직도 냉장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아, 그리고 ‘칫솔’. 그녀는 이상하게도 칫솔을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시원한 느낌이 좋다라나 머라나.




#4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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