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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남 Dec 03. 2016

[단편소설] 어느 날, 아침 #4

이별한 남자들의 찌질한 순간

#4



 그녀는 머리카락이 길었다. 그녀가 샤워를 하고나면 그렇지 않아도 자주 막히는 수챗구멍이 더더욱 말썽을 피웠다. 항상 그것을 마음써하는 그녀를 위해 틈만 나면 화장실 청소를 했다. 더러워진 화장실을 보여주는 게 부끄럽기도 했고. 그랬는데 이젠 구멍이 막혀 물이 잘 안 내려가도 그냥 내버려둔다. 시간이 한참 걸릴 뿐 어차피 물은 다 빠지니까. 습기 차서 물때가 좀 생기면 어떠랴. 와서 흉보는 사람 없는데.



 성에가 다 녹았다. 앞 유리에 김이 살짝 서려 히터를 끄고 창문을 내렸다. 외부온도와 내부온도를 맞춰야 하는 까닭이다. 이렇게 김이 서린 것을 제거하려 창문을 내리면 그녀는 춥다며 모자를 뒤집어쓰고 웅크리곤 했다. 옆에서 보면 꼭 거북이 같아 그리 사랑스러울 수 없었다. 그러고 보면 그녀는 추위를 정말 많이 탔다. 그래서 겨울철에 그녀를 차에 태울 일이 있으면 항상 미리미리 조수석의 열선 시트를 켜놓았다. 손을 호호 불어가며 기다리다 내 차를 보고 반갑게 뛰어 들어와서는 엉덩이 밑에 손을 깔고 앉아 따뜻함을 즐기는 모습을 보면 너무나 귀여워, 내가 보는 날 만큼은 날씨가 추웠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곧잘 했었다.



 바람결에 내 옷에 묻은 고기 냄새가 코를 간지럽힌다. 육회나 회를 좋아하고 소고기는 미디움이나 미디움레어로 먹는 나와는 달리 그녀는 무엇이든지 푹 익혀 먹었다. 같이 스테이크 먹으러 갔을 때도 다시 더 익혀달라고 주문했던 그녀였다. 어제 고기 구울 때 뿌렸던 후추와 파슬리. 그녀를 위한 까르보나라 만들기 위해 샀었던 것들이다. 나오기 전 뿌렸던 섬유탈취제. 이걸로 서로에게 뿌리며 장난 쳤던 것도 새록새록 생각난다. 별의 별 것들에도 기억이 스며들어 있다. 짜증이 난다.



 책상 끄트머리에 놓인 컴퓨터. 침대에서 같이 영화 보려고 그렇게 해두었었다. 다시 원상복귀 시켜두려다가 그냥 두었다. 난방을 하더라도 바닥만 따뜻하지 윗 공기는 별로 안 따뜻해서 책상에 올려둔 채로 컴퓨터를 하면 좀 춥다.


 온 나라가 소지섭과 임수정의 로맨스에 푹 빠져 연인을 돌팅이, 아저씨 부르던 때가 있었다고 한다. 그 당시 공부하느라 TV를 보지 않았던 나는 전혀 몰랐었다. 어쩌다 《미안하다 사랑한다》를 본 적 없다는 이야기를 하게 되면 주변 사람들은 명작이라며 한 번 보라고 추천을 많이 했지만 무엇을 다운 받아 본다는 것이 나에게는 무척 귀찮은 일이었다. 그녀가 내 방에 와서 보자고 조르기 전까지는. 1년에 적어도 한 번은 정주행한다는 그녀와 함께 방에서 불을 끄고 영화관처럼 해서 같이 보았었다. 헤어지는 날에도 같이. 드라마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녀는 이별을 고했고, 난 그 드라마의 여운에 빠져 지금도 종종 보고 있다.



 방청소를 하며 책장에 꽂은 『보통의 존재』. 여행 중에 이야기하다가 책을 좋아한다는 나의 말에, 그녀는 무심코 집어든 저 책이 마음에 들어 그 자리에서 끝까지 다 읽고는 두고두고 읽으려고 샀다고 했다. 그 말 듣고 바로 휴대폰으로 주문했던 책이다. 읽겠다 읽겠다 해놓고 전공 책 좀 펴보느라 반 정도 밖에 읽지 않았다.


 내가 쓴 칼럼이 담겨있는 신문. 그녀는 신문에 글이 실리면 나보다도 더 기뻐해주며 열심히 읽어주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꽤나 행복해서 더 열심히 글을 쓰고, 더 큰 창작의 고통에 시달리고는 했다. 지금은 의욕이 없어서 몇 주 째 글을 쓰고 있지 않다. 다시 쓸까하는 생각이 들지만 아직은 귀찮다.



 와인잔 걸이. 지난여름 근처 유원지에서 만들었던 DIY 제품이다. 제품 리뷰를 쓴 블로거는 쉽게 만든 모양인데 우리는 꽤 오래 걸렸었다. 치과 의사가 손이 그리 둔해서야 어디 쓰겠냐며 핀잔을 주던 그녀. 그때 당했던 굴욕을, 나는 수제 맥주를 통해 만회했었다. 비록 적당히 만든다는 것이 좀 많이 만들어 걱정했는데 맛이 좋아 둘이서만 마셨는데도 일주일 만에 동이 났다. 그래서 나중에 다시 만들자고 했었는데, 남은 재료와 먼지 묻은 키트가 그 간의 일을 알려줄 뿐이다.



 지금 운전대를 데워주는 핫팩. 빼빼로데이 때, 손수 만든 빼빼로, 조그마한 인형, 직접 쓴 손 편지와 함께 선물상자에 담겨있었던 것이다. 빼빼로는 이미 다 먹어버렸고 인형은 같이 근무하는 동생에게 줘버렸는데 핫팩은 깜빡했다. 그녀가 준 선물은 이제 내 곁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남아있는 핫팩을 보니 반갑기도 하고 그 걸 보고 가슴이 아리는 내 모습이 한심하기도 하다. 이거 하나만 쓸 생각이다. 나머지는 안 쓸 테다.



 출발하기 전 룸미러로 뒷 유리를 살피다 본 내 모습. 카키 색 남방, 갈색 니트, 짙은 회색의 코트. 본래 패션에 관심이 별로 없었다. 겨울도 후드티 몇 개와 패딩의 조합으로 그냥저냥 보냈었는데, 그녀는 내가 후드티 입은 모습을 싫어했다. 니트 입는 것을 좋아하는 본인의 취향에 맞추어 셔츠와 니트 조합을 항상 추천했고, 그 조합에 패딩이 가당키나 하냐며 나를 끌고 코트를 사러나가 하루 종일 쇼핑한 끝에 샀던 게 바로 지금 입고 있는 코트다.


 이제 한국에 도착했다고 연락 온 구두와 캐주얼 화, 벨트도 그녀가 골라준 것. 엄청난 할인에 기뻐하며 결제하고 만난 블랙 프라이데이. 그날 우리는 헤어졌다. 그럴 거면 골라주지나 말 것이지. 지금도 나는 의문이다. 사이가 멀어지는 기미가 보였다면 모를까 별 다툼 없이 행복한 나날을 즐기고 있었는데, 우리가 왜 헤어졌는지 도통 모르겠다. 차단된 내 전화번호만이 현실을 알려줄 뿐이다.

 곧 도착할 저 신발들을 신고 다닐 수는 있을까?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기를 바랄 수밖에...



 따뜻해진 차와 깨끗해진 앞 유리와 뒷 유리. 달릴 준비를 모두 마친 차. 출근 시간대를 지나 한산해진 거리. 드라이브하기에 딱 좋다. 싱숭생숭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노래를 크게 틀고 따라 부르며 출발한다. 그녀와 함께 한 추억이 서린 그 장소로부터 조금씩 조금씩 멀어져가는 것에 희열을 느끼며 집으로의 소심한 질주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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