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한 남자들의 찌질한 순간
그녀는 머리카락이 길었다. 그녀가 샤워를 하고나면 그렇지 않아도 자주 막히는 수챗구멍이 더더욱 말썽을 피웠다. 항상 그것을 마음써하는 그녀를 위해 틈만 나면 화장실 청소를 했다. 더러워진 화장실을 보여주는 게 부끄럽기도 했고. 그랬는데 이젠 구멍이 막혀 물이 잘 안 내려가도 그냥 내버려둔다. 시간이 한참 걸릴 뿐 어차피 물은 다 빠지니까. 습기 차서 물때가 좀 생기면 어떠랴. 와서 흉보는 사람 없는데.
성에가 다 녹았다. 앞 유리에 김이 살짝 서려 히터를 끄고 창문을 내렸다. 외부온도와 내부온도를 맞춰야 하는 까닭이다. 이렇게 김이 서린 것을 제거하려 창문을 내리면 그녀는 춥다며 모자를 뒤집어쓰고 웅크리곤 했다. 옆에서 보면 꼭 거북이 같아 그리 사랑스러울 수 없었다. 그러고 보면 그녀는 추위를 정말 많이 탔다. 그래서 겨울철에 그녀를 차에 태울 일이 있으면 항상 미리미리 조수석의 열선 시트를 켜놓았다. 손을 호호 불어가며 기다리다 내 차를 보고 반갑게 뛰어 들어와서는 엉덩이 밑에 손을 깔고 앉아 따뜻함을 즐기는 모습을 보면 너무나 귀여워, 내가 보는 날 만큼은 날씨가 추웠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곧잘 했었다.
바람결에 내 옷에 묻은 고기 냄새가 코를 간지럽힌다. 육회나 회를 좋아하고 소고기는 미디움이나 미디움레어로 먹는 나와는 달리 그녀는 무엇이든지 푹 익혀 먹었다. 같이 스테이크 먹으러 갔을 때도 다시 더 익혀달라고 주문했던 그녀였다. 어제 고기 구울 때 뿌렸던 후추와 파슬리. 그녀를 위한 까르보나라 만들기 위해 샀었던 것들이다. 나오기 전 뿌렸던 섬유탈취제. 이걸로 서로에게 뿌리며 장난 쳤던 것도 새록새록 생각난다. 별의 별 것들에도 기억이 스며들어 있다. 짜증이 난다.
책상 끄트머리에 놓인 컴퓨터. 침대에서 같이 영화 보려고 그렇게 해두었었다. 다시 원상복귀 시켜두려다가 그냥 두었다. 난방을 하더라도 바닥만 따뜻하지 윗 공기는 별로 안 따뜻해서 책상에 올려둔 채로 컴퓨터를 하면 좀 춥다.
온 나라가 소지섭과 임수정의 로맨스에 푹 빠져 연인을 돌팅이, 아저씨 부르던 때가 있었다고 한다. 그 당시 공부하느라 TV를 보지 않았던 나는 전혀 몰랐었다. 어쩌다 《미안하다 사랑한다》를 본 적 없다는 이야기를 하게 되면 주변 사람들은 명작이라며 한 번 보라고 추천을 많이 했지만 무엇을 다운 받아 본다는 것이 나에게는 무척 귀찮은 일이었다. 그녀가 내 방에 와서 보자고 조르기 전까지는. 1년에 적어도 한 번은 정주행한다는 그녀와 함께 방에서 불을 끄고 영화관처럼 해서 같이 보았었다. 헤어지는 날에도 같이. 드라마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녀는 이별을 고했고, 난 그 드라마의 여운에 빠져 지금도 종종 보고 있다.
방청소를 하며 책장에 꽂은 『보통의 존재』. 여행 중에 이야기하다가 책을 좋아한다는 나의 말에, 그녀는 무심코 집어든 저 책이 마음에 들어 그 자리에서 끝까지 다 읽고는 두고두고 읽으려고 샀다고 했다. 그 말 듣고 바로 휴대폰으로 주문했던 책이다. 읽겠다 읽겠다 해놓고 전공 책 좀 펴보느라 반 정도 밖에 읽지 않았다.
내가 쓴 칼럼이 담겨있는 신문. 그녀는 신문에 글이 실리면 나보다도 더 기뻐해주며 열심히 읽어주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꽤나 행복해서 더 열심히 글을 쓰고, 더 큰 창작의 고통에 시달리고는 했다. 지금은 의욕이 없어서 몇 주 째 글을 쓰고 있지 않다. 다시 쓸까하는 생각이 들지만 아직은 귀찮다.
와인잔 걸이. 지난여름 근처 유원지에서 만들었던 DIY 제품이다. 제품 리뷰를 쓴 블로거는 쉽게 만든 모양인데 우리는 꽤 오래 걸렸었다. 치과 의사가 손이 그리 둔해서야 어디 쓰겠냐며 핀잔을 주던 그녀. 그때 당했던 굴욕을, 나는 수제 맥주를 통해 만회했었다. 비록 적당히 만든다는 것이 좀 많이 만들어 걱정했는데 맛이 좋아 둘이서만 마셨는데도 일주일 만에 동이 났다. 그래서 나중에 다시 만들자고 했었는데, 남은 재료와 먼지 묻은 키트가 그 간의 일을 알려줄 뿐이다.
지금 운전대를 데워주는 핫팩. 빼빼로데이 때, 손수 만든 빼빼로, 조그마한 인형, 직접 쓴 손 편지와 함께 선물상자에 담겨있었던 것이다. 빼빼로는 이미 다 먹어버렸고 인형은 같이 근무하는 동생에게 줘버렸는데 핫팩은 깜빡했다. 그녀가 준 선물은 이제 내 곁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남아있는 핫팩을 보니 반갑기도 하고 그 걸 보고 가슴이 아리는 내 모습이 한심하기도 하다. 이거 하나만 쓸 생각이다. 나머지는 안 쓸 테다.
출발하기 전 룸미러로 뒷 유리를 살피다 본 내 모습. 카키 색 남방, 갈색 니트, 짙은 회색의 코트. 본래 패션에 관심이 별로 없었다. 겨울도 후드티 몇 개와 패딩의 조합으로 그냥저냥 보냈었는데, 그녀는 내가 후드티 입은 모습을 싫어했다. 니트 입는 것을 좋아하는 본인의 취향에 맞추어 셔츠와 니트 조합을 항상 추천했고, 그 조합에 패딩이 가당키나 하냐며 나를 끌고 코트를 사러나가 하루 종일 쇼핑한 끝에 샀던 게 바로 지금 입고 있는 코트다.
이제 한국에 도착했다고 연락 온 구두와 캐주얼 화, 벨트도 그녀가 골라준 것. 엄청난 할인에 기뻐하며 결제하고 만난 블랙 프라이데이. 그날 우리는 헤어졌다. 그럴 거면 골라주지나 말 것이지. 지금도 나는 의문이다. 사이가 멀어지는 기미가 보였다면 모를까 별 다툼 없이 행복한 나날을 즐기고 있었는데, 우리가 왜 헤어졌는지 도통 모르겠다. 차단된 내 전화번호만이 현실을 알려줄 뿐이다.
곧 도착할 저 신발들을 신고 다닐 수는 있을까?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기를 바랄 수밖에...
따뜻해진 차와 깨끗해진 앞 유리와 뒷 유리. 달릴 준비를 모두 마친 차. 출근 시간대를 지나 한산해진 거리. 드라이브하기에 딱 좋다. 싱숭생숭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노래를 크게 틀고 따라 부르며 출발한다. 그녀와 함께 한 추억이 서린 그 장소로부터 조금씩 조금씩 멀어져가는 것에 희열을 느끼며 집으로의 소심한 질주를 시작한다.